[신간을 기다립니다] 김가을 작가님께 - 장강명 소설가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1월호
나아질 수 있을까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삶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삶은 세상과 내가 만나는 사건이고... 문학은 힘이 되며... 했던 이야기. (2022.11.04)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
남들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쓰는 편지에는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글의 독자가 수신인 한 사람인지, 아니면 실제로는 모든 사람을 향해 쓰는 글이고 수신인 칸에 있는 이름은 일종의 장식일 뿐인지 헷갈리지요. 그런 이중적인 면이 어떤 때에는 낯간지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조금 무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극히 드물게, 이런 형식이 편지 쓰는 이의 마음을 더 열어주기도 할 것 같습니다.
메일함을 뒤적여 확인해 보니 천년의상상 대표님으로부터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의 추천사를 부탁 받은 게 올해 2월 8일이네요. 원고를 다 읽는 데에는 4일이 걸렸습니다. 정말 대단한, 강력한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2월 13일에 천년의상상 대표님께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원고를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몇 시간 정도 고민해 봤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추천사를 정중히 사양하고 싶습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출판사의 간곡한 설득에 바보처럼 마음을 또 바꿔먹으며, "추천사를 쓰기는 쓰겠습니다"하고 연락을 드리면서도 다시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많이 부끄럽네요. 과연 제가 이 원고 추천사를 써도 되는 사람인지..."
우선 저는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에서 고발하는 아버지 폭력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 작가님이 전하는 고통과 공포를 잘 알지 못하면서 뭔가 아는 사람처럼 말을 보태는 일이 민망했습니다. 이 문제 전반에 대해 뭐라도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 폭력의 큰 원인은 가부장제입니다. 누가 제 앞에서 "장강명 너는 가부장제의 공범이야!"라고 말한다면 무척 불쾌하겠지요. 하지만 제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대체로 수혜자였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저는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으로 읽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추천사를 써서 출판사로 보냈습니다. 책은 3월 21일에 출간되었고, 저는 작가님으로부터 3월 30일에 이메일을 받았습니다. 손 편지를 촬영한 이미지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지요. 이메일에는 '댁 주소를 알지 못하고, 주소를 여쭤보는 것도 실례일지 몰라 이렇게 보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손 편지 뒷부분에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서 그리고 '(삶이, 혹은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는 대답을 어딘가에서는 듣고 싶습니다.'라는 문장까지 있었습니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편지였죠.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저는 '글 쓰는 건 그냥 많이 쓰다 보면 점점 쉬워진다, 그래서 힘도 덜 들고 원동력을 너무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답장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답이 길어지더군요. 제 생각이 정리가 안 된 탓이었겠지요. 답이 길어지다 보니 또 자기 검열을 하게 되더라고요.(저는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멘토 놀이도 쑥스러웠고, 40대 후반의 남성 작가가 20대 신인 여성 작가에게 긴 메일을 보내는 모습도 상상하니 징그러웠습니다. 그래서 한참 쓰던 글을 몇 문단만 남기고 거의 다 지웠습니다. 남은 문장들은 결론... 이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이야기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 <월간 채널예스> 편집부에서 살아 있는 한국 작가에게 '신간을 기다린다'는 내용으로 공개편지를 써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았습니다. 공개편지라면 차라리 덜 쑥스럽겠군, 덜 징그럽겠군 싶더군요.
"제가 아버지 폭력으로부터 벗어난 뒤로도 세상이 너무 차갑고, 무섭고, 힘이 빠지고... 다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아질 수 있을까요? 그렇다는 대답을 어딘가에서는 듣고 싶습니다."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는 구절에 주어는 없었습니다. 저는 '삶이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고 해석했는데, 어쩌면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혹시 '제가 나아질 수 있을까요?'라는 말씀이었나요? 7개월 전 저는 '성실하게 살면 대체로 삶이 나아지는 것 같다.'고 썼습니다. 한국 사회는 젊은이의 잠재력을 거의 알아보지 못하고, 주로 경력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그러다 보니 재능이 있건 없건 10년 정도 한 분야에서 전문성과 인맥을 쌓으면 그런 게 무형의 자산이 되어서 점점 몸뚱이 대신 일을 해주기 시작한다는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보니 7개월 전 답장은 '삶이 나아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직장 생활이 나아질 수 있느냐?' 혹은 '내가 일을 잘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처럼 읽히네요. 직장 생활과 일은 삶의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삶 전체는 아니지요.
그렇다면 삶은 뭐냐. '나아질 수 있느냐?'는 문구의 주어 후보들을 '세상-삶-나' 이렇게 늘어놓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과 '내'가 만나는 현상이 '삶'이로군. '식재료-조리-요리사'라든가 '여행지-여행-여행자'처럼요.
일류 요리사는 다루기 까다로운 식재료로 멋진 음식을 만들고, 훌륭한 여행자는 험한 오지에서 최고의 여행을 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도전을 찾아다니고,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반면, 서툰 요리사와 초보 여행가들일수록 흔한 식재료와 뻔한 관광지를 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비유가 어디로 뻗어 나갈지 충분히 예상 가능하지요? 그러니까 삶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낫게 만들어야 하는' 대상이다, 안전한 선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역경은 삶을 보다 고귀하게 만드는 지렛대가 된다... 하지만 무섭습니다. 그렇게 4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가 '초짜 인생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제가 7개월 전에 보낸 답장과 8개월 전에 썼던 추천사 그리고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를 다시 읽으니 묘한 기분이 들어요. 제 답장보다 추천사가, 그리고 추천사보다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 책 자체가 더 정확한 답변 같기 때문입니다.
요리사에게 좋은 칼이 그러하듯이, 여행가에게 지도가 그러하듯이, 세상 앞에 선 저도 도구를, 힘을 원합니다. 제가 쓴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 추천사에는 '진짜 문학이 주는 뜨겁고 무서운 치유와 부활의 힘'이라는 표현이 있더군요. '이 투사이자 구원자에게 독서가 무기가 되었다.'는 구절도 있었고요. 요리사가 칼 한 자루만 사용하지 않듯이, 여행가가 한 종류 지도만 고집하지 않듯이, 저도 한 가지 힘에만 의지해 세상을 살지는 않습니다. 예금 통장이 몇 개 있고, 도움이 되는 전화번호도 두세 개 있습니다. 지치면 맥주를 마시고, 머리가 복잡하면 산책을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늘 곁에 두고 애용하는 무기는 따로 있는데, 그것은 문학입니다. 문학이 힘이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가설이 있습니다만 딱딱하니 넘어가고, 누군가 "정말 문학이 힘이 돼?"하고 궁금해한다면 저는 그냥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을 권하겠습니다. 문학 독서에는 엄청난 힘, 사람을 살리고 바꾸는 힘이 있고,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는 제가 본 가운데 가장 생생한 증거입니다.
나아질 수 있을까요? 나아질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아도 삶은 나아질 수 있습니다. 삶은 세상과 내가 만나는 사건이고... 문학은 힘이 되며... 했던 이야기.
반복이니 넘어가고... 작가님, 책을 한 권 더 쓰세요. 작가님은 쓰실 수 있고, 잘 쓰실 겁니다. 『부스러졌지만 파괴되진 않았어』가 이번에도 증거입니다.
"신간 발간 계획은 향후 3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던가요? 저한테는 "새 책을 쓰기는 쓸 것입니다."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40대 후반의 인간이 20대 청년과 다른 점이 바로 시간 감각인데, 3년 참 후딱 가더군요. 기다릴게요. 작가님이 원고 작업을 하며 얻을 힘과 별도로, 독자로서 작가님의 궤적을 따라가고 싶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월간 채널예스> 편집부로부터 주문 받은 메시지, 즉 '신간을 기다리고 있으니 써주세요'하는 부탁이 제가 애초에 건넸던 조언 비스름한 희미한 글 쪼가리보다 훨씬 더 나은 응답인 것 같으니. 삶에 대해 제가 얼마 전부터 생각하는 바인데, 세상과 사람이 만날 때 간혹 미스터리한 일이 일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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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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