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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진의 글쓰는 식탁] 계속 쓰는 사람
<월간 채널예스> 2022년 6월호
닳지 않도록 꾸준히 돌볼 것, 어쩔 수 없는 상처와 흠집을 무늬로 받아들일 것. (2022.06.07)
40년 된 작은 식탁 앞에 앉았다. 모서리와 다리에 상처가 많은 식탁이다. 뾰족한 것에 찔리고 긁히고. 모두 ‘무심코’였을 것이다. 칼로 음식을 썰다가, 컵이나 포크를 쥐고 있다가 무심코 툭. 무심한 사람의 손만큼 뾰족하고 아픈 게 없다.
식탁 위에 책을 쌓아 올린다. 프랑스에 가져온 책은 번역해야 할 원서 두 권과 읽어야 할 책 몇 권, 몇 번을 망설였지만 끝내 두고 오지 못했다. 겨우 20일 머무는 일정에 그 책들을 다 읽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과 불안, 부담 같은 것. 그렇게 무거운 것들을 참 멀리까지 가지고 왔다.
단행본 원고를 송고한 날, 침대에 누워 더는 못 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만한 생각인지 알면서도 바닥난 기분은 쉽게, 자주 찾아왔다.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샀다. 나를 지키는 본능이었으리라. 나는 내 마음이 닳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내게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이 닳아진 상태이고, 무심해진 나는 뾰족한 말과 생각으로 나를 찌른다. 그러니 내게 필요한 것은 나로부터 멀어지는 일, 위태로운 나를 떠나는 일일 것이다.
26시간 여행 끝에 노르망디, 에브뢰(Évreux)시 근교에 위치한 시가(媤家)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곳이다. 풍경도, 이웃도, 집도 모두 그대로다. 세월의 흔적은 있지만 어디 한군데도 닳아지지 않았다. 오십 년 된 주택도, 백 년 된 농가도. 언젠가 시부모님께 오래된 집을 지키는 방식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은 내 질문에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닳지 않도록 꾸준히 돌볼 것, 어쩔 수 없는 상처와 흠집을 무늬로 받아들일 것.
짐을 풀자마자 복도 끝의 빈방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옛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창고 같은 방이다. 상처 많은 식탁과 흔들리는 의자와 옷장이 있고, 옷장의 문을 열면 절판된 문고판 책들과 앨범, 여행 기념품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곳. 나는 그 방에서 혼자 머무는 시간을 좋아했다. 그 방의 식탁 앞에 앉으면 옷장 문이 열리듯 내 안의 문이 열렸고, 말로 할 수 없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것, 감추고 싶으면서 동시에 들키고 싶은 것, 그러니까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들.
다시, 그 식탁 앞이다. 몇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식구들이 잠든 새벽에 노트북을 품에 안고 슬그머니 이 방에 들어와 글을 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아침을 먹기 전까지 두어 시간. 예전에 나는 그 시간 동안 겨우 한 문장을 써도 불안하지 않았다. 그것은 탄생의 신호였으니까. 조급함으로 태어나는 세계를 포기하는 무심함을 알지 못했으니까.
이곳에서 첫 책의 첫 문장을 썼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아침부터 일기장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나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식탁을 더듬으며 그때 그 기쁨을 떠올린다. 딱 나만큼 불안정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마침표를 찍은 후에도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는 그 다정한 세계가 다시금 나를 끌어안는다. 어쩌면 조금 더 쓰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마침표가 완전한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콜레트는 본질적인 예술이란 기다리고, 감추고, 부스러기를 모으고, 다시 붙이고 금박을 입히고, 가장 나쁜 것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으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저 시시함과 인생의 맛을 잃는 동시에 회복하는 법을 배우는 내면의 업무*라고 말했고, 나는 이곳에 돌아와 비로소 내게 글쓰기가 그런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글을 쓰는 나는 무언가를 얻고, 잃고, 부서뜨리고, 붙이며 나아간다. 내 글은 언제나 상처와 흠집의 기록이고, 내 문장은 여전히 흔들리지만, 거기서부터 회복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오늘의 마침표는 완전한 끝이 아니다. 내게는 늘 다음 문장이 남아 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쓰는 사람이 될 것이다.
*대니 샤피로 저, 한유주 역,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 마티,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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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오래된 극장을 돌아다니며 언어를 배웠다. 산문집 『열다섯 번의 낮』, 『열다섯 번의 밤』,『몽 카페』를 썼고, 아니 에르노의 소설 등을 번역했다.
<대니 샤피로> 저/<한유주> 역16,200원(10% + 1%)
미국의 베스트셀러 소설가 대니 샤피로가 작가로 살아가는 일, 밤마다 이불 밑에서 손전등을 켜고 상상으로 가득한 편지를 끄적거리면서 시작된 글 쓰는 생활에 대해 썼다. 『계속 쓰기』는 글쓰기의 효험을 팔거나 작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무언가를 쓰고자 하는 사람, 자신의 재능과 끈기를 의심하며 여전히, 계속 쓰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