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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라, ‘4’를 읽는 몇 가지 방법

키라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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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라는 분명 진실로 향하는 실마리를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올려둔 채 차분히 숨을 죽이고 있다. (2022.01.26)


'키라라는 이쁘고 강합니다 /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  _(키라라 中)

<Moves>부터 키라라의 지향은 명확했다. '이쁘고 강한' 수식어가 내비치는 긍정 에너지와 듣는 이를 '춤추게' 하기 위한 유희의 음악. 성소수자인 친구의 죽음 이후의 심정을 그린 <Sarah>가 의도적인 밝은 색채와 태도를 내건 것은 그런 뚜렷한 신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러나 <4>의 현장은 조금 다르다. 컴컴한 어둠 속 일체 미사여구는 생략한 채, 멋쩍은 당부로 시작하는 작품은 오로지 역동을 향한 비장한 예고만을 남길 뿐이다.

'그냥 댄스 음악이니까, 재밌게 들어주세요' (4 中)

본인의 제일 부정적인 감정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소개만큼 정제를 거치지 않은 신시사이저의 진동과 타격음이 과격하게 충돌하고 폭렬한다. 소리의 강도는 즐기기 위한 춤사위보다 괴로움을 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앨범의 초반부만 본다면 언뜻 설명에 의아함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적막한 플루트 위로 여러 사운드가 잰 듯이 포개지는 'Bearded lady juggling show'와 건전한 일렉트릭 기타에 살가운 팝 사운드를 접목한 'Stargaze'는 쓸쓸함이 얕게 가미된, 비교적 온순한 댄스곡이기 때문이다.

다만 'Pulling off the stars'부터 어딘가 초조하다. 동영상 녹화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참변'을 기점으로 작품은 점차 강한 강박과 소음을 탐닉하며 본론으로 파고든다. 심연의 중심에는 또 다른 심연이 존재한다. 이디오테잎의 아우라가 드리우는 드럼 소스의 '공천'과 복잡다단한 브레이크코어 사이 묘한 독백을 흘려보내는 '규탄'이 차례로 흘러나오고, 이러한 모든 요소의 집합체이자 균형점인 '폭발'이 나타난다. 애리의 산뜻한 보컬과 우악스러운 빅 비트 스타일을 번갈아 배치한 뒤, 분열적인 가사를 울부짖는 곡은 효율적인 방식으로 혼란과 분노를 표출한다.

작품의 매력 요인으로 공격적인 콘셉트에 따른 성공적인 스타일 변화를 지목할 수도, 혹은 여전히 빼어난 악기 운용과 신시사이저의 능란한 활용도를 언급할 수도 있다. 하나 <4>의 진정한 의의는 접근 방향에 따라 듣는 방식과 해석이 달라질 용의를 둔다는 점이다. 그가 지시한 대로 전자음에 집중하며 '그냥 재밌게 들었'다면 순수한 정규 '사(四)'집의 의미가 될테지만, 점층적인 분노에 초점을 두면 그 숫자는 '사(死)'로 보일 것이며, 그가 의도하고자 한 메시지적 측면에 주목했다면 '사(史)'로 읽히게 될 것이다.

파헤칠수록 내밀한 정교함이 드러난다. 발매 전부터 내림차순으로 세어 온 EP로 카운트다운 효과를 기획한 것은 물론, 정확하게 대칭되는 16개의 수록곡 사이 대화 음성을 강제로 삽입한 '4 중간'과 '4 끝'으로 드롭 구간을 형성하고 정량적 구획을 가져오기도 한다. 반전의 키워드를 뜻하는 앨범 커버는 기존 상징색의 보색이다. 성전환 치료에 이용되는 호르몬 대체 요법(Hormone Repleacement Therapy)의 줄임말에서 따온 'Hrt'의 경우 급격한 작풍 변화를 넘나들며 또 다른 유사어인 'Heart'의 박동과 'Hurt'의 폭력을 자연스레 연상케 하는 지점이다.

가볍고 발랄한 정서의 피처링 진은 일견 강한 일렉트로니카의 보완책을 담당하는 친절한 안내 음성처럼 보이지만, 청취를 반복하며 시선을 두면 둘수록 내면의 상처를 비추며 나약함을 드러낸다. 막연한 작별을 암시하는 '넌 지금 별을 보지만 / 난 이제 별이 되려 해('Stargaze')'나, '별 헤는 밤'을 인용해 주마등을 시사하는 '하나하나 생각하면 한 명 한 명 떠오르고 / 나를 찌르는 조각이 터져가고 있어('폭발')'의 가사도. 그리고 '참변', '손실', '규탄', '사별' 등 일련의 사건을 고발하는 듯한 의미심장한 곡 제목들도.

이제 선택은 온전히 청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4>는 명시적으로는 즐길 거리가 다분한 일렉트로니카 앨범일 뿐이다. 하지만 키라라는 분명 진실로 향하는 실마리를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목에 올려둔 채 차분히 숨을 죽이고 있다. 비록 사회가 그들의 존재를 알아주지 못했더라도, 누군가 그 간절한 함의와 구조 요청을 알아차리고 구원의 손길을 건네주기를 기다리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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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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