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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을 기다립니다] 이유리 소설가에게 - 박서련 소설가

<월간 채널예스> 202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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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한 적 있던가요? 오래 누적되어온 피로와 좌절을 건너 결국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에 이르는 『브로콜리 펀치』의 인물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2022.01.03)


유리 씨에게, 하고 시작했다가 지우고 다른 제목을 썼습니다. 조금 느끼하더라고요. 그렇지만 계속 유리 씨, 하고 불러보려고 해요. 유리 씨의 단편 「손톱 그림자」에서 인물들이 서로 수정 씨, 용준 씨 하고 부르는 걸 흉내내서요. 미련없이 깨끗한 듯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정다움이 있는 그 부름과 대화들이 좋았거든요. 쑥스러움과 느끼함을 무릅쓰고 따라하고 싶을 만큼. 우리가 말을 놓은 지도 어언 2년이 되어가지만 자리도 자리니까, 공개서한을 띄우는 참이니까, 잠깐 그런 것은 모른 척하고 유리 씨를 흠모하는 동료로서의 마음만 남겨 이렇듯 불러봅니다. 

어떻게 지내요? 유리 씨.

알 만큼 알면서도 안부를 묻자니 민망해서 코 밑이 근질근질 하네요. (코쓱.) 저는 그럭저럭 지내고 있어요. 감사하게도 저를 좋게 보아 주신 분들이 많고, 사양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있는 대로 일을 받아버렸는데,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못하다 보니 늘 일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어쩐지 끝이 보이지 않는…… 정신없는 연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힘에 부친다 느낄 때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런 바쁨을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을 떠올려요. 그러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기운이 생기기는 하는데, 어떨 때는 그 한가하던 시절의 저하고 일을 좀 나눠서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첫 책의 출간을 축하해요.

제게도 첫 책의 출간은 그리 멀지 않은 사건이어서, 지금 유리 씨의 마음 무늬가 어떤 모양일지 조금은 짐작이 가요. 예를 들어 체크무늬라고 하면 글렌체크와 타탄체크가 다르듯, 똑같지는 않지만 체크무늬끼리의 공통분모는 어쨌든 있어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기쁨과 설렘과 약간의 불안, 안도와 긍지와 얼마간의 피로, 아마도 그런 것들이 씨실과 날실을 이루며 유리 씨만의 오묘한 무늬를 만들고 있겠지요.

그렇게 짜낸 첫 책의 마음을 담요처럼 두르고 다니는 유리 씨를 상상해 봅니다. 멋진 첫 책은 튼튼하고 근사한 담요를 만들어내지 않을까요. 마음이 추워지거나 위태롭게 느껴질 때마다 언제든 꺼내 두를 수 있는 방탄 담요.

마음의 담요라니, 손 가는 대로 써 본 비유인데 어쩐지 유리 씨 소설에 나올 법한 아이템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에 유리 씨의 소설에는, 세상에 그런 게 있겠어? 싶은 물건이나 사건이, 왜 없겠어? 되묻기라도 하듯 태연히 등장하니까.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어도 유리 씨 소설에 나오고 보면 아 참 그렇지, 이런 게 있었지 하고 저도 모르게 납득하게 되고 말아요.



푹 빠져 읽다가 유리 씨 소설 속의 인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할 때도 있어요. 내가 이유리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작가가 상큼하고 기발한 사건을 만들어 내 일상의 막막함을 걷어내 주지 않을까. 그러면 나도 씩씩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제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오래 누적되어온 피로와 좌절을 건너 결국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에 이르는 『브로콜리 펀치』의 인물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골치를 싸매고 끙끙대는 동안까지도 다들 귀엽게 느껴져서 못내 미안할 지경이라니까요. 그건 아무래도 작가가 다름 아닌 유리 씨라서겠지요, 유리 씨의 손길을 거쳐 나온 인물들이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나는 왜 이유리 소설에 나오지 못하는가가 진지하게 슬퍼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건 조금 뻔하고도 무례한 말 같기도 하지만, 사실 저는 유리 씨가 지금 쓰고 있을, 아직 제가 만나지 못한 그 원고가 더욱 기대됩니다.

처음 만나던 날을 떠올려 봤어요. 유리 씨가 첫 소설집의 원고를 절반 정도 모은 때였던가요. 이런 저런 작업과 계약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요. 이제서야 고백합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표가 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만, 유리 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저는 묘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지면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한 시간이 몇 년 되거든요. 그와 다르게 차곡차곡 작품을 발표하고 있고 앞으로도 써내야 할 글 약속이 많다는 유리 씨를 보면서 이런 사람도 있군, 당연히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 즈음에는 저도 이미 약속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기에 시기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말이지요.

물론 한편으로는 그럴 만한 사람이야, 그러고도 남는 사람이야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는 유리 씨의 첫 발표 작품 『빨간 열매』를 보고 나서 유리 씨를 만났으니까요. 세상에 이렇게 감각적인 상상력을 이렇게도 천연덕스럽고 세련되게 풀어내는 작가가 있네. 이런 사람이 이제야 데뷔를 했네. 이게 제가 2020년 1월 1일에 한 생각들 중 하나였어요. 사실은 발표작과 함께 실린 사진을 보면서 이렇게 소설을 재미있게 쓰는 사람이 심지어 미인이라니 세상 불공평하다 진짜 라는 생각도 했고요.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을 외모 평가부터 해 버리고, 제가 생각해도 저질스럽고 미안하지만 이 또한 그때 했던 솔직한 생각이니 털어놓습니다. 

아무려나 제 의식 속의 뛰어난 신인 소설가를 실제로 만나보니, 데뷔한 첫 해에 제가 했던 고민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못나게도 질투하는 마음이 자꾸 솟았고…… 그렇게 딴생각에 잠겨 있는 제게 유리 씨가 그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나요.

“장편소설은 어떻게 쓰는 거죠?”

사실 그건 소설가들이 입에 아예 물고 살다시피 하는 물음이잖아요. 저도 새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마다 소설 어떻게 쓰는 건지 까먹은 것 같다고 느끼곤 하는데요. 단편을 쓰다 보면 장편을 쓰는 법이, 장편을 쓰다 보면 단편을 쓰는 법이 잊혀서 곤혹스럽기도 하고요. 당연히 그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는 얼른 떠오르지 않았는데, 그보다도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생각이 있었어요.

당신, 장편소설을 쓸 거군요!

그 순간 제가 품고 있던 별로인 마음들이 다 온데간데없어졌다면 그야 거짓말이겠지만, 유리 씨가 장편소설을 쓸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대감이 쑥 자라서 다른 마음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쓴 장편소설이라니 분명히 엄청나게 재미있겠지. 보고 나면 또 질투하게 될 지도 모르지만 아아 그런 건 모르겠고, 어서 보고 싶다.

조금 전까지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여기며 선을 그으려던 마음이, 그렇게 태세를 전환한 것이었습니다…….

유리 씨의 소설은 가독성이 무척 좋아서 쓰는 사람도 신나고 즐겁게 쓰겠구나 상상하게 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 반대겠지요. 먹기 좋고 부드러워 술술 넘어가는 요리를 만드는 데에 더 많은 공과 품이 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리 씨의 소설은 보기 드물면서도 싱싱한 재료를 낯설지도 뻔하지도 않게 다듬어낸 요리 같아요. 이 말이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유리 씨를 기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힘이 나서, 제가 애타게 기다리는 장편소설을 얼른 완성해 주었으면.

싱싱하다는 말이 났으니 말인데, 그러고 보면 유리 씨의 소설들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이유에는 특유의 ‘식물성 상상력’도 있지 않을까 해요. 식물의 역할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이 한 몫씩을 보태지만, 꼭 식물이 나오는 작품이 아니어도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령 죽음과 죽음 너머를 그려내는 상상력이 그래요. 계절과 기후를 따라 잎을 다 떨구고 죽은 것처럼 보였다가도 어느덧 새순을 틔우며 먼저 새 계절 소식을 전해오는 식물들이 그렇듯, 유리 씨의 소설들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를 다채롭게도 담아냅니다. 그래서 또 느끼한 말을 해 버리게 되는데……. 유리 씨의 세계에서라면,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서사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떠올리면, 쓰는 유리 씨에게 조금 감사한 마음까지도 듭니다.

바쁘게 지내는 것 같아 뿌듯하면서도 걱정이 되어요.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충분히 자고, 많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훌륭한 첫 책을 만드느라 많이 고생했으니 한동안은 푹 쉬고…… 그래도 다음 책 빨리 시작해 주고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아주 힘이 세지는 않지만 유리 씨가 소설을 써야 할 수많은 이유 가운데 이것이 있기를, 그리고 그 중에 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를.

쑥스럽고 느끼한 편지를 후다닥 맺습니다. 안녕!


추신 : 올겨울에는 저도 첫 정규(?) 소설집을 내고, 첫 산문집도 냅니다. 둘 다 표지 디자인이 아직까지도 고민이지만, 표지 시안이 나올 정도면 출간이 초읽기 단계라는 의미기도 하지요. 책이 나오면 또 소식을 전할게요.



브로콜리 펀치
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저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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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서련(소설가)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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