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의 출항, 우리가 알아야 할 ‘아바(ABBA)’의 열 가지 키워드
이즘 특집
아바는 여러 작품과 매체를 통해 후에도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팀이다. (2021.11.12)
“모든 10년마다 아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팝이 항상 곁에 있으리라는 증거죠”
밴드 아메리카의 멤버 제리 벡클리(Gerry Beckley)의 말처럼, 아바(ABBA)만큼 팝 역사 전반에 걸쳐 골고루 존재감을 드러낸 밴드는 손에 꼽는다. 1972년 결성 직후 공전의 히트곡을 남기며 세계 시장을 호령한 스웨덴 출신의 4인조 혼성 그룹은 불과 10년의 짧은 활동을 끝으로 해체의 길을 걸었지만, 여러 작품과 매체를 통해 후에도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구가하며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팀이다.
11월 5일, 10개의 신곡이 담긴 아바의 정규 9집 <Voyage>가 발매되었다. 좋은 음악으로 선한 영향력을 전파해온 그들의 새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맞이하여, IZM 필자들이 모여 그들의 일대기를 10가지 키워드로 간략하게 요약했다. 이미 아바의 이름이 익숙한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에 젖어들 매개체로, 그리고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입문서가 될 것이다.
아바를 대표하는 수식어 중 하나는 바로 '스웨덴의 국민가수'다. 정보의 접근이 어려웠던 1970년대의 경우, 그들을 통해 스웨덴을 알게 되는 현상이 적잖아 생길 만큼 자국을 세계에 알린 일등공신이었기에 붙은 칭호다. 더군다나 비(非)영어권 아티스트가 세계로 진출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 스웨덴에서는 무려 국가의 주력 상품이었던 볼보 자동차의 매출보다도 아바 한 팀이 창출한 수익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국가와 세대 간의 대통합을 일궈낸 것은 전쟁도 국력도 아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수려한 멜로디였던 셈이다. 물론 지금의 스웨덴만큼 명실상부한 '댄스' 강국이 있을까.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 스웨디시 팝의 명맥을 이은 록시트와 에이스 오브 베이스, 현시대 일렉트로팝의 최고 디바 로빈(Robyn)과 프로듀서 계의 베테랑 맥스 마틴, 그리고 스웨디시 하우스 마피아, 악스웰 등 EDM 사단들이 아바의 자리를 단단히 채워냈다. 아바라는 대선배의 역사가 후배들에게 남긴 교훈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멜로디'의 중요성이 아닐까 싶다.
MTV 개국 이전인 1970년대부터 영상과 음악의 시너지를 적극적으로 일궈낸 아바는 팝 뮤직비디오의 선구자였다. 1974년 'Waterloo'와 'Ring ring'을 시작으로 싱글 커트한 모든 곡들을 스토리와 퍼포먼스로 채운 영상으로 구현해 순회공연 없이도 미디어를 통해 세계를 접수했다. 예술성을 부각하며 아티스트에게 신비감을 부여하고자 했던 시류와 달리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 장면부터 비욘과 아그네사의 자택 거실 등 그들의 생활을 담아낸 영상들은 대중적인 댄스 음악과 아바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매끄럽게 결합시켰고, 이는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영민하게 뮤직 프로모션 필름을 제작했던 아바의 방송 진출은 수월했다. 이들의 감각적인 뮤직비디오는 TV 방송국으로부터 환영받으며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호주의 <The Best of ABBA>와 같은 단독 쇼 프로그램을 제작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아바의 비디오그래피를 전담해온 라세 할스트룀(Lasse Hallström) 감독의 주도 하에 <ABBA: The Movie>로 영화 산업까지 진출했다. 스크린을 통해 비친 그룹의 화려한 헤어스타일과 키치적인 의상을 필두로 비주얼적인 면모도 덩달아 주목받았고, 이렇듯 비디오 매체의 중요성을 발굴한 아바의 영향력은 마돈나, 프린스, 마이클 잭슨과 같은 후대 아이콘들에게로 이어졌다.
베트남 전쟁과 흑인 인권운동의 영향으로 1960년대 젊은이들은 기존 체제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거친 저항보단 자연스런 이탈을 택한 '히피즘'은 사회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기 위해 많은 부부들이 각자의 길로 갈라섰다. 그럼에도 음악이 매개체가 된 아바 멤버들의 결속은 강력했다. 무대에서 이뤄진 첫 만남은 음악적 교감을 넘어 또 하나의 가정으로 발전했고 사랑과 함께 불타오른 두 부부의 멜로디는 독신주의로 물든 1970년대의 시대상을 거스르며 아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너무 뜨겁게 타오른 탓인지 식는 속도도 빨랐다. 경쾌한 사운드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갔던 'Knowing me, knowing you'는 정작 현실에서 마주한 부부 관계의 벽을 노래하고 있었고 이별의 암시는 끝내 비욘과 아그네사의 결별로 이어졌다. 여파는 혼인을 치른 지 얼마되지 않았던 베니, 프리다 부부에게도 미쳤고 이들 역시 3년이 되지 않는 기간을 끝으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스웨덴 출신의 네 남녀는 시대가 짜놓은 각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The winner takes it all'의 역설처럼 그 끝엔 승자도 패자도 없었지만, 부부애와 이혼이란 상반된 사회 풍조가 완벽히 동고하는 가슴 아린 추억은 지금까지도 심금을 울리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혼란해져 있던 1976년 호주. 국민들은 아바 음악을 듣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는 듯 보였다. 모두가 이 스웨덴 밴드의 말랑하고 유쾌한 멜로디에 미쳐 있었다. 히트곡 발굴의 귀재였던 몰리 멜드럼(Molly Meldrum)이 이끄는 텔레비전 음악 프로그램 <카운트다운>에서 진원이 발생하더니 아이들은 1969년 닐 암스트롱의 달 착륙보다 아바 영상을 더 애청했다. 이들의 히트 공세는 무려 이랬다. 'Fernando' 14주 1위, 'Mamma mia' 10주 1위, 'Dancing queen' 8주 1위, 'Money, money, money' 6주 1위. 그리고 1977년 2월, 이 컬트적인 움직임은 순회공연에서 마침내 폭발을 맞는다.
그것은 광기였다. 너무 멀어 가수들이 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조국에 장시간 비행의 제약을 뚫고 무려 열 한 편의 무대를 기획하며 달려와 준 아바에 시드니 공항에서는 2,000명의 팬이 모여 아우성으로 응답했다. 3월 3일 첫 공연이 있던 날, 몰아치는 폭우 속에서 물기 젖은 무대 위로 프리다(Frida)가 미끄러지며 노래했다. 정신을 놓은 관중은 진흙을 뒤집어쓰는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도 표정만큼은 밝은 채 열광했다. 그들 서로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다. 격변의 시기로 나라가 힘들던 때 정성과 위로를 선물한 아바는 그렇게 호주인들에게 단순 인기 가수를 넘어 한 시대의 조각으로 각인됐다.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가수와 팬 사이의 각별한 사랑도 있는 법이다.
그들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과 영화의 대흥행은 아바를 '영원한' 팝의 아이콘으로 등극시켰다. 시작은 1977년 공개된 영화 <ABBA : The Movie>였다. 호주 투어 다큐멘터리에 약간의 설정을 섞은 이 작품은 당시 큰 흥행을 하진 못했지만 2가지만은 확실히 새겼다. 비슷한 시기 본인이 직접 자신의 영화에 출연한 건 비틀스, 티렉스 정도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즉, 그만큼 인기가 뛰어났다. 둘째 넘쳐나는 히트곡. 영화에 사용된 많은 인기곡은 이후 <The Album>이란 이름으로 이들의 5번째 스튜디오 음반이 됐다.
유명세, 히트곡, 인기 등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며 197~80년대를 주름잡은 이들은 199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뮤지컬 <맘마 미아>로 도래하는 2000년대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23개의 노래로 짜인 주크박스 극은 '어머나'란 의미를 지닌 이탈리아 원어 뜻 그대로 돌풍이 되어 세계를 휘감았다. 명맥은 2008년 영화화된 <맘마 미아!>로 이어진다. 자그마치 6억 3백만 달러의 수익. 10년 뒤인 2018년 <맘마 미아! 2>의 개봉은 당연한 절차였다. 이처럼 아바의 곡으로 재창작한 이차 가공물들의 대성공은 아바를 영원히 살게 했다.
아바 음악은 매우 또렷하게 들린다. 이는 작곡 편곡의 걸출한 퀄리티와 호각을 이루는 두 여성 멤버의 기가 막힌 보컬에 기인한다. 일찍이 팀에 합류하기 전부터 각각 유망한 가수로서 주가를 올렸던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서로 대조되는,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목소리를 지녔다. 메조소프라노 톤에 선명도를 입힌 고음을 영합해 치밀하게 쌓아 올린 하모니는 스웨덴에서 바라본 오로라처럼 청명했다. 북유럽형의 수려한 외모가 대중을 유인했고 리드미컬한 곡조 위 자유롭게 유영하는 이들의 화음이 출구를 닫았다.
아바의 나머지 한 축을 담당하던 작곡 콤비 비욘과 베니는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Wall Of Sound)'를 그룹사운드에 이식하고자 악기들과 보컬을 겹겹이 레이어링해 차별성을 부여했다. 그렇게 탄생한 히트곡들로 아바는 공고한 성처럼 서 있는 듯 했지만 이면엔 모든 음을 한 옥타브 높게 요구했던 남편들의 혹사로 녹초가 된 보컬 라인들이 하중을 떠맡고 있었다. 당시 여느 록 보컬리스트들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넓은 음역대를 보유했던 아그네사와 프리다는 고역을 거치면서도 찬란한 코러스를 일궈냈다.
아바를 향한 오해 중 하나는 '두 여성이 메인이고 나머지 두 명은 병풍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틀린 말이며 그룹을 견인한 실질적 리더는 키보드의 베니와 기타의 비욘이다. 이 둘이 직조해낸 대표 곡들은 '아바 돌풍'을 불러일으켰고 존 레논-폴 매카트니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물론 처음부터 환영받은 것은 아니다. 단순하고 귀에 맴도는 멜로디는 당대 비평가들에게 '매우 상업적이고 영미의 눈칫밥을 먹은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모국 스웨덴은 이들의 흥행에 더 각박하게 굴었다.
이에 베니는 아바 음악의 뿌리는 유럽에 위치한다고 받아쳤다. 가장 신나는 곡에서도 깊숙한 저편에 북유럽의 우울한 정서가 자리 잡고 있고 사실 아바의 노래는 그렇게 행복하지만은 않다면서 말이다. 이처럼 마냥 간단하고 경쾌한 듯해도 그룹의 곡은 수많은 오버 더빙과 겹겹이 쌓이고 확장된 멜로디의 배치로 이뤄져 있다. 즉, 복잡한 내부와 직관적인 포장이라는 치밀한 결과물을 내놓게 되었다. 더 놀라운 점은 두 콤비는 악보를 읽고 쓸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개입을 최소화한 자급자족 시스템을 그룹 초기부터 유지했다는 것이다.
배철수는 방송에서 아바를 언급할 때면 곧잘 회고 조가 된다. 혈기왕성의 시절 경시했던 아바의 음악이 세월이 지날수록 그 진가가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굳이 프로그레시브 록과 재즈의 엘리티즘을 거론하지 않아도 1970~1980년대의 대중음악 마니아와 평론가들이 아바를 상대적으로 저평가했음은 익히 들어왔다.
잘 팔리는 음악에 대한 질시 혹은 댄스 음악을 향한 편협한 시선이었을까? 감상용 음악과 안무를 동원한 퍼포먼스의 우와 열을 나눈 일종의 낙인. 허나 소리 하나로 본능적 신체 반응을 일으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1970년대의 말을 휩쓴 도나 섬머의 'Bad girls'나 비지스의 'Stayin' alive' 같은 댄스 넘버들엔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작·편곡, 프로듀싱으로 참여해 협공 전략을 펼쳤다.
아바의 음악이 스탠더드 팝 혹은 고전 음악의 댄스 버전 같다고 왕왕 생각했다. 저평가가 아니다. 스웨덴의 전통 음악과 클래식 선율의 자양분을 흡수해 이들의 댄스 뮤직은 소울과 블루스에 뿌리를 둔 펑크, 디스코와는 확연히 다른 질감의 토양을 다졌다. 비애와 환희가 오묘하게 교차하는 양가적 감정을 빈틈없는 선율과 편곡으로 낚아챈 이들의 사운드는 당대의 대중성과 시대 무관의 영속성을 동시 포획했다.
2005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가 50주년을 맞아 진행한 설문 조사에서 'Waterloo'가 역대 입상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노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아바가 처음부터 이 대회와 연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1973년 팀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Ring ring'을 들고 지역 예선에 참여한 그룹은 3위에 머물며 고배를 마셨다. 이듬해 재도전한 아바는 화려한 의상과 캐치한 멜로디, 간단한 안무로 구성한 'Waterloo'를 통해 유로비전의 '드라마틱 발라드' 전통을 뒤엎고 스웨덴 최초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아바가 우승의 영광을 얻은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영국의 브리튼에서 개최되었다. 나폴레옹이 영국의 웰링턴 공작에게 패한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남자의 구애에 항복하는 여자를 표현한 'Waterloo'의 가사와 지역적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실제 본선 무대에서도 지휘자가 나폴레옹 의상을 입고 나와 재치 있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유럽을 점령한 곡은 영국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에 이어 빌보드 싱글 차트의 6위에 올라 그룹의 성공적인 미국 진출을 견인했다. 관습을 허문 아바의 유로비전 무대는 전투의 주인공만큼 오래도록 대중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BTS가 지구를 호령하기 약 50년 전에도 비(非) 영미권 국가에서는 대중음악 본토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가 있었다. 스웨덴의 4인조는 1974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우승을 시작으로 유럽과 아시아,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국가 가릴 것 없이 레코드를 찍어냈지만 영국 4인조와는 다르게 미국에서만큼은 중박을 넘어 대박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기록상으로는 'Waterloo', 'Take a chance on me', 'The winner takes it all' 3곡이 빌보드 싱글 차트 TOP 10에 들었고, 'Dancing queen'만이 겨우 1위에 올랐다. 영화, 뮤지컬의 흥행과 팀의 인지도를 생각하면 당시의 성과는 아쉬운 수준이다.
1970년대 팝 또한 갓난아이의 발육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다. 록 진영에서는 비틀즈 해체 후 프로그레시브 록과 헤비메탈이 바통을 이어받았고(실로 다양한 장르가 뜨고 졌다), 반대 진영에서는 소울-펑크(Funk)-디스코의 흐름 위에서 댄스 뮤직이 새 판을 짜고 있었다. 가볍고 경쾌한 '버블검(Bubblegum)' 뮤직이 이 혼란한 틈을 파고들기란 쉽지 않았고, 미국의 성벽은 북유럽의 추위보다 견고했다. 유행의 기준인 매출과 순위가 음악의 모든 가치를 대변하지는 않는 것처럼 상업적으로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돌고 도는 시간 속에 재평가는 끝났고, 이유 있는 자신감으로 아바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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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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