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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가끔은 좋은 일도 있다] 칭찬 스티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8월호
그때는 의지나 좋은 시도가 잘 통하지 않는다. 너무 힘을 주면 부러져버리는 나뭇가지와도 같다. 그럴 땐 강하지만 잘 구부러지는 식물처럼 살아야 한다. 훌렁훌렁, 이런 느낌으로. (2021.08.03)
칭찬 스티커 시스템을 도입했다. 오늘의 할 일을 세세하게 적고 성공을 했을 때 옆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다. 이 시스템을 가장 적극적으로 쓰는 시기인 유치원 시절엔 경험을 못 해 본 것 같다.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시스템이었는데 어느 날 트위터에서 뭘 또 봤다. 그곳엔 참 좋은 정보가 많고 특히 프리랜서들의 서바이벌 가이드가 많다. (오늘은 후두하근이란 근육을 왜 잘 풀어줘야 하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찾아보니 칭찬 스티커 시스템은 이미 수많은 성인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또 나만 몰랐지. 한 저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님께서 “저는 빨래 두 번 돌리면 스티커도 두 개 붙여요”라고 말해 주셔서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가끔은 아주 작은 일이 힘들다. 예를 들어 물 마시기, 이런 일이 정말 힘들다. 누군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 이해할 것이다. 그냥 그런 시기와 상태가 있다. 그때는 의지나 좋은 시도가 잘 통하지 않는다. 너무 힘을 주면 부러져버리는 나뭇가지와도 같다. 그럴 땐 강하지만 잘 구부러지는 식물처럼 살아야 한다. 훌렁훌렁, 이런 느낌으로.
나는 작은 수첩을 사서 그날의 소소한, 하지만 중요한 일들을 하나씩 적어 나가기 시작했다. 손톱깎기, 꼬마 (우리집 고양이) 화장실 모래 갈기, 영양제 먹기, 이메일 답장하기, 원고 시작하기 등등. 그리고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 나갔다. 아! 이 결심을 한 날 바로 스티커를 다량으로 장만했는데 나는 멋있는 어른이니까 단번에 멋진 라인업을 꾸릴 수 있었다. 펭귄, 고양이, 무지개, 사과, 별, 구름, 참고로 전부 홀로그램이다. 투명 보관함도 하나 샀다. 어디에든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나는 어른에 대한 환상이 이것저것 있었는데, 40대가 되면 단정하고 날렵한 고급 수첩에, 아주 좋은 펜, 예를 들어 만년필 같은 것으로 할 일을 적게 될 줄 알았다. 물론 그런 어른도 있다. 하지만 오지은, 41세, 그 길이 내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래도 수첩에 스티커를 붙이게 될 줄은 몰랐지. 인정하자.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건 시크한 수첩이 아닌 홀로그램 사과 스티커였던 것이다. 스티커를 받기 위해 할 일을 하는 유치원생과 내가 무엇이 다른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도 진지하고 나도 진지하다.
가끔은 내가 나라는 운동선수의 감독이나 트레이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능률 좋게 결과물을 뽑을 수 있을지 머리 한쪽에서 작전을 짠다. 혼내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는데 이제까지 내가 주로 썼던 방식은 칭찬이 아닌 불안을 증폭시키는 쪽이었다. 칭찬을 하면 내가 물러질 것 같았다. 너 이 걸론 안 돼, 너 이렇게 하면 망해, 다음 기회는 없어, 그런 말을 반복하는 트레이너가 내 안에 있었다. 효과는 있었다. 나는 기록을 깨는 느낌으로 작업에 임하곤 했는데 그럼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어디까지나 기분이다. 소비자들 입장에선 내가 뼈를 깎았는지, 아닌지 알게 뭔가. 게다가 뼈를 깎으면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마인드로 임하면) 가산점이 주어진다는 설정도 좀 이상하지 않은가. 건강하게 살살 오래 해. 장사 하루 이틀 할 겁니까?
최근에 ‘투두 메이트’라는 앱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흔한 일정 관리 앱인 줄 알았는데 아뿔싸, 친구들의 칭찬 기능이 있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시원한 보리차를 만들어두고, 이불을 널고, 작업에 착수할 때마다 온라인 친구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를 날려준다는 뜻이다. 물론 나도 환호를 보낼 수 있다! 경험해보니 상당히 신나는 시스템이었다. 랜덤으로 모르는 사람의 할 일 리스트도 볼 수 있는데 다들 참 열심히 사는구나 싶어 감동했다. 전공책을 보고, 그 사이에 홈트를 하고, 물 많이 마시고, 덕질하고! 가장 감동적이었던 누군가의 할 일은 ‘무례한 손님 패지 않기’와 ‘우리 선수 올스타전 보내기’였다. 두 분 다 성공 하셨는지….
험한 세상이다. 그리스 시대에도 이미 이랬을까? 하지만 21세기적 험함은, 현대 한국적 험함은 지금이 처음이니까 그리스 사람도 막상 살아보라고 하면 못 한다 할지도 모르지. 폭풍우 속에서 눈을 뜨고 있으려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진 못해도 적어도 쓰러지지는 않으려고, 열심히 뽀짝뽀짝 사는 사람들이 있다. 꼬물꼬물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XX이에게 좋은 말 해주기’를 오늘의 첫 번째 리스트로 적어두었다. 체크를 해둔 거 보니 이미 했나 보다. 부디 XX씨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교수님께 인건비 말씀드리기’도 이미 체크가 되어있다. 교수님 인상 안 찌푸리셨길 바란다. 아, 이 앱의 가장 좋은 점은 ‘일정 내일로 보내기’ 기능이 간편하다는 점. 나는 매번 오늘 못 한 일들을 내일로 보내고, 나의 오늘을 100점 만점으로 만든다. 중년의 지혜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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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음악가. 책 <익숙한 새벽 세시>, 앨범 <3>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