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특집] 장르라는 달콤한 중독 – 엘릭시르 편집주간 임지호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월호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소설 전문 브랜드의 수장이 강조점을 찍은 단어를 발라내면, ‘즐거움’ ‘달콤한 행복감’ ‘공유와 확장’. (2021.01.14)
“제일 중요한 일들은 말하기도 제일 어렵다. 그런 일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말로 표현하면 줄어들기 때문이다. 머릿속에서는 무한히 커 보였는데 막상 끄집어내면 한낱 실물 크기로 축소되고 만다.”
-『스탠 바이 미』, 스티븐 킹
“순수한 즐거움을 목적으로 하는 책은 여전히 배움을 목적으로 하는 책에 밀려나기 일쑤죠. 책은 아이스크림과 같아서, 먹지 않아도 살 수는 있지만 일단 맛을 보면 달콤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 감정을 서로 공유하고 확장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입문자를 위한 장르소설의 고전을 꼽아달라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임지호 엘릭시르 편집주간의 답이다. 질문은 “이 책들을 읽게 될 2021년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장르소설 전문 브랜드의 수장이 강조점을 찍은 단어를 발라내면, ‘즐거움’ ‘달콤한 행복감’ ‘공유와 확장’. 네 권의 작품을 정할 때, 거두절미 ‘대중성’과 ‘재미’를 기준 삼은 것 역시 독자들에게 그런 독후감을 안겨주고 싶어서였다. “많은 장르소설이 각 장르의 코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재미를 느끼게 마련인데, 해당 장르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읽어도 무조건 재미있는, 그래서 더 읽고 싶어지는 작품을 골랐어요.” 이런 과정은 장르를 넘나들며 ‘파게’ 된 임지호 주간의 실제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니 네 권의 작품에 굳이 독서 순서를 정해 달라고 했을 때 돌아온 답변의 일관성이란! “어느 책이든 100쪽까지 읽었는데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곧장 집어 던지고 다음 책을 펼치세요.”
미스터리 소설사에 남을 첫 문장으로 “밤은 젊고 그 역시 젊었다”를 꼽고, 판타지 장르의 정의를 새롭게 생각하게 한 문장으로 “거기엔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꼭 필요해서 사용하는 것이라야 해. 촛불 하나를 켜는 건 곧 하나의 그림자를 던지는 거란 말이다”를 줄줄 꺼내는 장르의 백과사전 같은 그에게 추천 리스트를 더해달라고 청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추가된 리스트. 애거사 크리스티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 엘러리 퀸 『Y의 비극』, 존 딕슨 카 『황제의 코담뱃갑』, 히가시노 게이고 『악의』.
‘영웅문’ 3부작, 김용 지음
내 중학생 시절을 점령한 작품. 구입한 책을 교환하러 갔다가 서점 형이 추천해 의도치 않게 읽게 됐다. 당시 역사소설을 많이 읽어서 비슷한 작품인가 했는데, 도입부터 심상치 않더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1부 『사조영웅전』 여섯 권을 정신없이 독파하고, 2부 『신조협려』, 3부 『의천도룡기』까지 연달아 밤을 새우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들을 시작으로 중학생 시절 독서 경험의 많은 부분이 무협지로 채워졌다.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라 영상으로 더 익숙한 분들이 계실지 모르나, 이 책은 ‘무조건’ 소설로 읽어야 한다.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읽었는데, 책 제목을 보신 부모님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벌써 그런 책을 읽을 나이가 되었구나’ 하는. 셜록 홈스와 뤼팽밖에 모르던 내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추리소설이라니, 뭔가 이상했지만 세상에는 홈스와 뤼팽 말고도 정말 많은 추리소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책이 입문자에게도 딱인 것은, 추리소설이라는 인식이 없어도 누구나 몰입해서 끝까지 읽게 만드는 스토리 때문이다.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스티븐 킹 지음
스티븐 킹 이전의 공포소설은 흔히 말하는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런데 킹이 전하는 공포는 사뭇 다른 종류였다.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갖고 있는 어둠, 한 번쯤 품었던 두려움을 끄집어내 공감을 최대로 불러일으킨다. 단순히 무섭다기보다 저 아래 침전되어 있는 무언가를 휘저어 각성시키는 느낌이랄까.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 행동은 기억하지만 그때 품었던 감정이나 생각은 잊기 마련인데, 킹은 이 작품들에서 그것들을 되새기도록 부추기고 떠민다. 킹의 신작들도 좋지만 이런 특징이 잘 살아 있는 초기작들을 그래서 더 좋아한다. ‘스티븐 킹의 사계’라는 부제를 달고 계절처럼 다른 색깔의 중편 넷을 모아놓은 이 책은 킹의 작품에서도 손에 꼽을 만하다.
’어스시’ 시리즈, 어슐러 르 귄 지음
『반지의 제왕』이 『반지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주목받을 무렵(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소수의 독자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작품이 있었다. 바로 『어스시의 마법사』. 지금의 어슐러 르 귄은 SF 작가, 페미니즘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인 ‘어스시’ 연대기의 작가로 더 유명했다. 『어스시의 마법사』를 읽기 전까지 판타지란 기본적으로 절대악을 물리치며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 싸워야 할 사람은 오직 주인공 자신뿐이라는 것, 내적인 성찰과 시련을 통해 자아를 극복하는 것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설정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침 신화에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터라 작품 안에 깔려 있는 은유와 상징들이 더더욱 깊숙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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