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공간 특집] 책의 물성을 지키는 방주 -D’Ark Room
<월간 채널예스> 11월호
닻프레스는 스몰 프레스 퍼블리싱을 통해 책이 지녀야 할 물성을 구현한다. 모두가 책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잊었을 때, 원형으로서의 책을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곳. 다크룸은 그때도 항해할 방주다. (2020.11.12)
닻프레스는 스몰 프레스 퍼블리싱을 통해 책이 지녀야 할 물성을 구현한다. 모두가 책이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잊었을 때, 원형으로서의 책을 만지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곳. 다크룸은 그때도 항해할 방주다.
“물질로서의 책을 보여주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주상연 닻프레스 대표의 말에는 많은 뜻이 함축돼 있다.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Notes』라는 타이틀의 이 책 저자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물을 찍는 사진가예요. 그의 사진은 찍은 지 한참 지난 폴라로이드처럼 보여요. 섬세한 시선으로 사진에 맞는 종이를 골라야 해요. 중간에 트레이싱페이퍼를 끼워 넣어 느낌을 증폭하기도 했죠. 이 한 권에 여섯 종의 종이가 들어가요.” 때때로 오리지널 프린트가 삽입되기도 하고, 100권의 한정판 전권에 암실 얼룩이 묻은 이미지를 일일이 손으로 붙이기도 한다. “그래서 단 한 권도 똑같지 않죠. 그뿐인 줄 아세요? 이미지를 들추면 텍스트가 나오는데 순서대로 읽으면 한 편의 시가 된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소설가로, 한 달 동안 극지방과 가까운 핀란드 외곽에 머물며 ‘한순간도 같지 않다’는 진리를 증명하는 사진을 찍는 프로젝트를 했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만들어줄 것을 닻프레스에 의뢰했다.
닻프레스는 10년 전 시각예술 전문 출판사로 출발했다. 책에 대한 특별한 철학 때문에 첫 책을 내기 전에 책을 만드는 방법을 결정했고, 그것이 닻프레스의 정체성이 됐다. 콘텐츠가 쉽게 소비되고 증발하는 세상에서 깊게 뿌리박힌 중심이 되고자 출판사 이름을 ‘닻’으로 삼았고, 한편으로는 영감을 널리 퍼트리는 존재가 필요할 것 같아 아티스트 인터뷰 매거진 『깃』을 발행했다. 다크룸은 4년 전 더 많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기획했다. 암실을 뜻하는 단어를 포획한 후 알파벳 ‘D’와 방주를 뜻하는 ‘Ark’를 분리해 역할을 분명히 했다. “다크룸은 가변 공간이에요. 지금처럼 전시 공간이 되기도 하고, 전시가 없을 때는 보다 전격적으로 시각예술 서점 역할을 하고요. 아티스트 토크, 다양한 워크숍도 이곳에서 열려요. 무엇보다 책들의 전시장이죠. 닻프레스가 만든 책과 저희가 보유한 아트북을 전시해요. 누구나 와서 책들을 보고 만지고 냄새 맡기를 바라죠.” 즉 다크룸은 닻과 깃과 이 둘의 자장을 따라 모여든 사람들이 만든 시간을 보존한 채 항해 중인 한 척의 배다.
책을 좋아하는 보통의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길 공간은 다크룸 가장 안쪽에 있다. 책 공방 ‘닻북스’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돋보기를 쓴 장인이 한 땀 한 땀 책을 엮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면 21세기로 돌아오길! 닻북스의 책임자는 명민한 두 눈이 매력적인 정주영 실장이다. 주상연 대표와 정주영 실장은 약 20년 전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그러다 주상연 대표가 흠모해온 사진가들이 있는 고장,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돌아와 함께 닻프레스와 닻북스를 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현재의 디지털 기술이라면 몇 가지 장비만으로 꿈꾸는 퀄리티의 책을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줬고, 두 사람은 겁도 없이 스몰 프레스 퍼블리싱이라는 모험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닻북스의 풍경은 간결하고 실용적이다. 프린트부터 제본, 다채로운 후가공까지 이루어지는 공간인 만큼 규모는 작지 않다. 70권에 달하는 닻프레스의 모든 책이 이곳에서 만들어졌으며, 개인이 소량으로 주문한 책들도 여기서 완성된다. “수제 책 공방은 닻프레스의 모태예요. 아티스트와의 협업으로 책을 만드는 게 저희 일이지만, 사실 작가의 기준이란 것 자체가 모호하죠.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으니까요. 다 하면 좋은데 인력에 한계가 있어서 그렇게는 못 하고요. 주문이 들어오면 저희가 잘 만들 수 있는 책, 주문한 분과 저희 생각이 맞는 경우에는 소량이라도 만들어요.” 닻북스의 수제 책 만들기 워크숍에 참여하는 방법도 있다. 이 희귀한 워크숍이 언제 열리는지는 닻프레스와 다크룸 인스타그램 계정(@datzpress, @d.ark.room)팔로어, 혹은 닻프레스 뉴스레터를 구독하는 자만 알 수 있다.
코로나 시대에 창립 10주년을 맞은 덕분에 닻프레스 구성원들은 생각할 기회를 얻었다. 잠시 멈춘 『깃』의 미래와 닻프레스의 다음, 사진을 비롯한 시각예술의 더 나은 항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여러 가지 밑작업을 하고 있다. 주상연 대표는 다시 처음을 생각한다. “닻프레스의 출발선은 ‘닻이 되자’는 마음이었어요. 신진 작가들에게는 책을 내고 전시를 열 기회가 너무 중요한데, 누군가 흔들림 없이 그 일을 해줘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하자였죠.” 다행히 애초의 결심은 점점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닻프레스는 지난 몇 년간 아트 북이 가장 발달한 미국에서 연이어 호평을 받았다. 스탠퍼드 스페셜 컬렉션이 저희 스페셜 에디션을 소장했고, 뉴욕공립도서관에서는 닻프레스가 출간한 전권을 소장하고 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LA에서 열리는 북 페어에도 해마다 참가했다.
그사이 북 페어 때마다 닻프레스 부스를 찾는 팬도 생겼다. “저희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있어요.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한 시간이 만든 가장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생각의 마지막 테마는 시각예술 소비자와의 접점이다. “저희 워크숍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시각예술 책을 보는 방법’이에요.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대신 이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씀드리죠. 그러고 나면 한 쪽 한 쪽 쓰다듬고 냄새를 맡으며 책을 보세요. 그것이 책의 물성을 잃지 않은 책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다크룸 초입에는 김수영의 시 「풀」을 수록한 책이 전시돼 있다. 표지를 넘기면 낱낱이 풀이된 종이가 숨결을 따라 눕거나 일어선다.
D’Ark Room위치 서울시 광진구 아차산로 471 CS Plaza 지하 1층 이용 정보 평일 10~18시, 예약 방문제로 운영하며 관람료는 무료. 아티스트 다큐멘터리와 1000여 권의 시각예술 서적이 비치된 아카이브룸은 하루 단위로 대관 가능하다. 멤버십 회원은 아카이브룸, 경기도 광주 닻미술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며, 전시와 행사 소식을 담은 뉴스레터를 받아볼 수 있다. 문의 d.arkroom@datzpress.com, 02-447-2581 |
관련태그: 닻프레스, 월간채널예스, Darkroom, 채널예스,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