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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특집] 온 우주만큼 부캐가 되어라

<월간 채널예스> 202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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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예술, 혹은 캐릭터의 예술은 진즉부터 작가들의 세계에 소란스럽게 있었다. 본캐가 그것까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은밀하거나 위대한 방식으로 말이다. (2020.10.13)



아버지들의 세계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유지된다. 성을 물려주고,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대답하도록 가르친다. 그 대답들은 자꾸 자라서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몫을 빼앗아 스스로 이름을 짓는 일은 위대함의 속성을 갖는다. ‘살부(殺父)’에 가장 근접한 문화적 반항이고, 이제 곧 갖게 될 예술적 성취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포르투갈의 천재 시인이라는 레테르만큼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António Nogueira Pessoa)를 축소하는 말이 없다. 그에게는 최소 70개에서 최대 120개까지의 다른 이름들이 있었다. 페소아는 자기 이름들을 필명이라거나 가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명(heteronym)이라고 불렀다. 글을 쓸 때만 필요했거나, 진짜 이름 위에 덧칠하기 위해서 그 많은 이름이 필요했던 게 아니라는 뜻이다. 페소아는 다만 여럿의 이름들로 살기를 바랐다. 알베르투 카에이루(Alberto Caeiro), 리카르두 레이스(Ricardo Reis), 알바루 드 캄푸스(Albaro de Campos), 그들이 모두 페소아들이었다. 나이와 외모와 직업과 개성이 모두 달랐으므로, 그들에게는 각기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모두 페소아의 운명들이었다. ‘온 우주만큼 복수(複數)가 되어라’는 자기 명령을 수행하는 부캐릭터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부캐’의 시대에 이르러 페소아의 생은 가장 긴요한 레퍼런스가 된다.


부캐의 이름으로 살았던, 페르난두 페소아와 루이스 캐럴 

부캐의 시대에 소환할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름은 빅토리아 시대의 수학자 찰스 럿위지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이른바 ‘고장 난 시계의 역설’을 만든 인물로, 부캐의 활약이 본캐를 잡아먹은 대표적인 케이스다. 그의 부캐는 Charles에서 Carroll, Lutwidge에서 Lewis를 이끌어내면 되는데, 그가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이다. 두 작품에서 추론의 규칙과 공리, 수학적 원리 등을 눈치채고, 그 위트에 감탄했다면, 찰스 도지슨-루이스 캐럴의 썩 괜찮은 신도라 할 만하다. 그에겐 중도 포기한 캐릭터도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수줍은 탓에 성공회 성직자 서품을 받고도 포기한 남자였다. 

루이스 캐럴 이야기가 나온 김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도 호명하고 가자.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나보코프는 루이스 캐럴의 열혈 독자였다. 그리고 주목할 만한 부캐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른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다른 정체성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그는 누구보다 정통한 나비 연구가로 살았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 있는 『나보코프 블루스』라는 책에서 그 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아쉽게도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다. 

이와 달리, 자기의 이름으로 성취해놓은 것들을 굴레로 인식했던 어떤 작가들은 부캐를 놀이로 변형시킨다. 이런 놀이에는 신적인 요소가 있다. 이를테면, 리처드 바크먼(Richard Bachman)의 생애가 그렇다. 그는 해양경비대, 선원, 목장 운영 같은 일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가로 데뷔해서는 대중과 평론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아 라이벌 스티븐 킹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남자다. 그럼에도 그는 불운한 생의 주인공이었는데, 여섯 살 아들은 우물에 빠져 죽고 곧이어 자신은 희귀 암에 걸려 죽고 만다. 바크먼의 병명은, ‘cancer of the pseudonym’, 그러니까 필명암이었다. 바크먼의 모든 운명을 관장했던 것은 바로 본캐 스티븐 킹(Stephen King)이었다. 스티븐 킹은 그럴싸한 부캐를 창조한 뒤에 영광과 상처를 주었고, 어이없이 죽게 만들었다. 시침 뚝 떼고 “리처드 바크먼 같은 작가가 죽어 속이 다 시원하다”는 악의적 조사를 남긴 건 유명한 일화다. 스티븐 킹은 리처드 바크먼의 생애를 통해 자기를 깔본 평론가들에겐 고약하고, 독자와 스스로에겐 통쾌한 신의 게임 한판을 벌였다. 

이런 부캐 놀이판에는 이 분야 톱 클래스들의 레전드 에피소드가 여럿 있다. 대표적인 예가 『죽은 자들의 포도주』라는 단 한 작품만 남긴 로만 카체프(Roman Kacew)다. 그는 『비둘기를 안은 남자』를 쓴 포스코 시니발디(Fosco Sinibaldi), 아니면 『스테파니의 얼굴들』의 샤탕 보가트(Shatan Bogat) 같은 부캐를 만들어냈는데, 잠시 잊어도 좋다. 이 모든 캐릭터를 압도한 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교육』『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쓴 로맹 가리(Romain Gary), 혹은 『자기 앞의 생』을 쓴 에밀 아자르(Emile Ajar)가 그 주인공이다. 한 작가에는 한 번의 상만 수여한다는 공쿠르상의 수상 원칙은, 부캐들의 화려한 활약 때문에 제대로 지켜졌다고 우겨볼 수 있을 법하다. 부캐들이 참전한 정체성 게임에서 평론가들의 승률은 처참한 편이고, 대중적 통쾌함도 이 대목에서 포인트를 얻는다. 

다른 예로는, 일본 작가 기바야시 신(Kibayashi Shin)이 있다. 『소년 탐정 김전일』을 그릴 때는 아마기 세이마루(Amagi Seimaru)였다가, 『도쿄80』으로는 안도 유마(Ando Yuma)였고, 아기 다다시(Agi Tadashi)가 되어서는 『신의 물방울』을 탄생시켰다. 심지어 아기 다다시라는 이름은 자신의 누나인 가바야시 유코와 공동소유였다. 특별히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면, 아기 다다시 A, 아기 다다시 B라고 썼다. 막대한 명성을 누리게 된 부캐릭터는 이쯤이면 거의 ‘왕관’이 되었을 법한데, 무게감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유쾌함이 기바야시 신에겐 있다. 그는 일곱 개의 필명을 가졌고, 각각의 이름에 따라 각각의 캐릭터로 ‘놀았다’.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새로운 이름으로 작품활동에 나섰던 로맹 가리와 조앤 롤링


이제 웬만한 부캐들로는 놀랄 일이 없다. 도리어 부캐들의 파티를 잘 즐기면 된다. 가령 『해리 포터』 시리즈를 쓴 조앤 롤링(Joanne K. Rowling) 은 로버트 갤브레이스(Robert Galbraith)라는 이름으로 『더 쿠쿠스 콜링』을 출판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재능을 알리려 했다. 그전에 벌써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가 스릴러 작품을 쓸 때는 댄 카바나(Dan Kavanagh)로 변신했으며, 존 크리시(John Creasey)는 서른 개의 필명을 자유로이 썼다. 자기의 이름이 자기의 정체성을 포박하도록 두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걸 하나의 캐릭터로 인식할 수 있다면, 캐릭터들이 두 개 이상의 자아로 분리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최근 현대 미국의 많은 중년 작가 사이에서는 여성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 브론테(Brontë) 자매들이 남자 이름으로 복면을 써야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현상이다. 그때 그녀들은 자기 시대의 한계와 굴레를 극복하기 위해 온 생을 걸고 본래 이름, 곧 아버지들의 세계로부터 전속력으로 달아나야 했다. 

이름에 갇히지 않는 일, 혹은 여럿의 캐릭터를 부리는 일에서 탄생하는 놀이 혹은 실험은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다. 이름의 예술, 혹은 캐릭터의 예술은 진즉부터 작가들의 세계에 소란스럽게 있었다. 본캐가 그것까지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은밀하거나 위대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페소아의 명령으로 돌아가, ‘온 우주만큼 복수가 되어라!’의 시대가 비로소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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