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읽고 나면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거예요”
『복자에게』
우리 삶에서 실패는 무시로 일어나잖아요. “실패하는 건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고, 우리 모두에게 찾아 드는 순간이야. 그러니 괜찮아.” 소설이 그 정도의 말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2020.10.13)
아름답기만 할 줄 알았던 제주가 문득 애틋하게 느껴졌다. 소설가 김금희의 두 번째 장편 『복자에게』를 읽고 든 생각이다. 제주 ‘고고리섬’에서 유년을 함께 보낸 주인공 이영초롱과 고복자는 사소한 이유로 우정을 등졌다가, 제주의 한 의료원 산재 사건을 계기로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 다시 이어질 것 같았던 인연의 끈은 놓쳐 버렸지만, 그럼에도 슬프지만은 않은 건 실패를 긍정하는 작가의 시선 덕분. “쓸 수 없을 듯했던 소설”이 이야기를 품은 지 2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제주 속담에 ‘속상한 일이 있으면 친정에 가느니 바다로 간다’는 말이 있다. 복자네 할망에게 들었지.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 되지 않겠니?’ -189쪽
두 번째 장편이 출간됐어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예정된 마감들이 있었는데,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면서 카페를 거의 못 나갔어요. 저는 주로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 편이라 반 강제로 쉬었는데요. 쉬니까 좋더라고요. 일을 안 하니까 사람이 너무 맑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하는 거예요.(웃음) 『복자에게』를 끝내고는 한동안 계속 휴식을 취했어요.
2018년, 제주에서 머물며 구상한 소설이라고요. 가파도 문화예술창작공간 ‘가파도 에어’에서 지냈던 걸로 알아요.
맞아요. 오래 전부터 제주도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을 해왔거든요. 그래서 인터뷰 등을 통해 “다음 소설은 제주를 배경으로 쓰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는데, 가파도 에어에서 제안이 왔어요. 너무 좋아서 당장 간다고 했죠.(웃음) 3개월간 머물면서 본섬 스케치도 하고, 이야깃거리를 찾는 시간을 보냈어요. 본격적으로 집필을 시작한 건 올해 1월부터예요. 이야기를 제 안에 담고 있었던 기간은 길지만, 집필은 올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저의 현재가 들어가 있는 작품이 되었어요.
올해 1월은 이상문학상 수상 거부로 힘든 시간을 보냈을 때잖아요. 작업은 괜찮으셨어요?
괜찮지 않았어요.(웃음) 한동안 일에 환멸이 찾아와서 힘들었죠. 심지어 그때 단편 마감도 있었거든요. 부산비엔날레에 발표한 「크리스마스에는」이라는 소설인데 제가 쓴 것 중 가장 웃긴 단편이 나왔어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나 봐요.(웃음)
『복자에게』가 나오고 나서, 저희 아빠는 “한동안 네가 글을 못 쓸 줄 알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려운 일을 겪고도 작품을 완성했다는 데 안도하시는 모습이었어요. 사실 저는 이 작업이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요. 작업하는 동안에는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으니까, 오히려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복자에게』는 저를 살린 소설이에요.
책이 출간되기 전, 오디오북으로 먼저 연재가 되었는데요. 새로운 연재 방식이 어땠나요?
오디오북 녹음은 처음이었는데, 무척 어려웠어요. 생각보다 신체적으로 많은 기능을 써야 하더라고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글을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온 몸에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졌어요. 녹음을 마치고 나면 몸이 아플 정도로요. 또 감정의 과잉이 되어도 안 되고, 또 너무 기계적으로 읽어도 안 되잖아요. 하지만 제가 쓴 텍스트이다 보니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울컥할 때가 있는데, 그 감정을 눌러야 해서 어려웠어요. 녹음을 할 때마다 어느 정도의 감정으로 읽어야 할지 늘 고민했던 것 같아요.
자신의 소설을 소리내 읽어본 경험은 어땠을 지 궁금해요.
사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굉장히 여러 번 고치고, 묵독을 하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가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데요. 독자는 처음 보는 글을 읽는 것이니까, 마치 제가 소리내서 읽는 정도의 에너지를 써서 제 글을 읽어주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제 소설의 온전한 독자가 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오디오북 녹음하며 반성을 많이 했어요. ‘문장을 이렇게 쓰면 안 되는구나’ 싶어서요.(웃음) 읽는 사람을 위해서는, 호흡을 그렇게까지 가져가면 안 되겠더라고요.
독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항상 라이브 방송 중인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웃음) 연재가 되는 동안은 하루도 안 빼놓고 파일이 업로드되자마자 다 들었어요. 그리고 독자들이 댓글을 남겨주면 안심하고 잠들었죠. 사실 처음에는 소통을 할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되니까 못 하겠더라고요. 감상을 흐트러뜨릴 것 같아서요. 독자들이 소설의 인물들을 너무 좋아해 주시는데, 뒷장에는 슬픈 이야기도 등장하니까 마치 제가 잔인한 창조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웃음) 그래서 답글을 하나도 못 달았죠. 소설이 연재되는 중간에 독자와 소통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해녀, 의사, 판사, 간호사, 기자 등 다양한 일하는 여성들이 등장해요. 여성의 이야기로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있나요?
내가 쓸 수 있는 제주의 이야기를 찾아야 했거든요. 역사적인 맥락의 이야기는 선배 작가들이 많이 했으니, 나는 현재 제주에서 일어나는 일들, 우리 세대가 하는 고민을 담겠다는 생각으로 취재를 시작했어요. 저는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쓰길 좋아하는데요. 사실 제주도 그런 공간이 되어줄 거라고 예상하진 못했는데, 지내다 보니 일하는 여성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앞서 해녀 세대가 있었다면, 그 아래 세대의 아이들은 도시에 나가기도 할 것이고 돌아오기도 할 텐데 그들의 고민과 문제를 다루면 좋겠다는 생각을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많이 했었죠.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189쪽).”이라는 문장이 생각나요.
실제로 여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해녀들은 당연히 여성이고, 마을을 구성하는 일의 주체가 대부분 여성이었어요. 그분들의 강한 생활력과 당당함 같은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았어요. 꼭 ‘여성이 중심이 된 소설을 써야지’라는 생각을 했던 건 아닌데, 제주에 있으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보건소에도 여자 의사가 있었거든요. 제주라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소설로 옮겨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여자들의 연대, 우정 같은 게 생생히 느껴졌어요.
여자 친구들의 관계는 모세혈관 같은 만남이잖아요. (양손을 깍지 끼며) 이렇게 만나잖아요.(웃음) 덕분에 전달받을 수 있는 좋은 느낌이 많지만, 반대로 너무 여려서 상처를 받기도 해요. 그렇기에 더 진정성 있는 관계라고 느껴져요. 저는 자매만 있는 집에서 자랐고 여중, 여고를 나왔어요. 남자보다 여자인 친구들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요. 여자 친구들과는 마음을 헤아리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훨씬 많은 공을 들이게 되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 어렵지만 반대로 그래서 참 좋아요.
이 책을 읽는 여성 독자라면 누구나 생각나는 친구가 한 명쯤 있을 거예요.
맞아요. 저도 사소한 오해들을 이기지 못하고 멀어진 친구가 많아요. 아마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니까 작은 밀침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없는 거죠. 소설의 구조를 짜면서 그 친구들을 많이 생각했어요.
『복자에게』에는 수많은 ‘엄마’가 등장해요. 의료원 산재 사건의 피해자인 주인공 복자 또한 엄마죠. 전작 『경애의 마음』에서도 경애의 엄마가 건네는 말들이 인상깊었는데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엄마란 어떤 존재일지 궁금해요.
엄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허리를 완전히 펴고 선 사람이 떠올라요. 아주 튼튼하고, 꼿꼿하죠. 세상의 어느 한 부분도 엄마라는 존재의 손이 가 닿지 않는 곳이 없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면서, 이제 엄마들이 사회의 한 직업인으로도 서 있게 되었어요. 그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중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직장에 다닐 때, 엄마인 동료들이 많았거든요. 회사 휴게실이 잘 갖춰지지 않아서 화장실에 유축하러 가는 모습을 종종 봤어요. 당시 제가 20대 초반이었는데요. ‘저렇게 힘든 걸 감내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게 엄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저희 엄마도 평생 일을 하셨거든요. 사실 어릴 땐 저와 놀아주지 않는다고 원망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직장에서 만난 동료들 덕분에 가려져 있던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엄마도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살았겠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한 마디로 말하면 엄마는 ‘세상을 핸들링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주에서 만난 수많은 엄마들도 그랬죠. 아이를 위해 법적 투쟁을 하신 제주의료원 간호사 분들도 실제로 승소를 하셨잖아요.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고, 핸들링하는 사람이 엄마인 거죠. 저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그리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경애의 마음』에서도 그렇고, 『복자에게』에 나오는 엄마들도 그렇게 꼿꼿이 허리를 펴고 서있어요.
제주의 여러 풍경 중 소설에 꼭 담고 싶었던 모습이 있나요?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 좋았어요. 예를 들면 해녀분들이 물질하는 도구를 유모차에 넣고 다니시거든요. 아침 해안가에 유모차가 일렬로 쫙 서있으면 물질을 나가신 거예요.(웃음) 도시로 치면 60~70대는 왕성하게 일할 나이가 아닌데, 해녀 분들이 어려운 일을 끊임없이 해 나가는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또 가파도에서는 담장을 뿔소라 껍데기로 장식해 놓은 걸 볼 수 있어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걸 생활에 옮겨온 감성이랄까. 또 주민들의 집은 물론이고 섬도 정말 깨끗하거든요. 제가 풍경 묘사를 할 때 ‘폐비닐’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폐비닐 없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섬 곳곳이 깔끔 그 자체였어요. 공간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이 많을 때,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가파도에 지내면서 많이 느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가파도는 평지 섬이라서 빛이 그대로 떨어지거든요. 그럼 풍경의 색이 너무 선명해요. 처음 갔을 때 마치 세트장에 있는 줄 알았어요. 빛이 달라지니까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죠. 그런 느낌을 풍경에 많이 녹이고 싶었어요.
딱 표지 같은 색감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편집자께서 이 사진을 발견하고, 표지로 하면 좋겠다고 보여주셨는데, 저도 너무 마음에 들어서 단번에 정해졌어요. 다른 걸 더 볼 필요도 없겠더라고요.(웃음)
제주어를 공부하는 건 어땠나요?
재밌었어요. 제주어 사전이나 문법책 등을 보며 작업을 했는데요. 제주어가 얼마나 생활과 밀접하냐면 해녀가 일을 하다가 낳은 갓난아기를 부르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예요. 섬에 있는 모든 걸 하나하나 다 지시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의 분화가 정말 잘 돼 있어요. 그래서 정말 재밌더라고요.
일단 제가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대사를 쓰면, 편집부에 계신 제주 출신 직원들이 알맞게 쓰였는지 체크를 해주셨어요. 오디오북 녹음을 하기 전에는 문학동네 사무실에 가서 실제 억양을 배우고 연습도 했죠.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억양을 실제로 들으니 정말 좋더라고요. 긴 대사는 한 번에 내뱉을 자신이 없어서, 배운 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현장에서 계속 들으면서 오디오북 녹음을 했어요. 한 마디씩 녹음한 걸, 후에 다 이어서 붙인 거예요.(웃음)
작가의 말에서 “본섬에서의 취재를 다 마치고 나서도 나는 내가 여기서 본 것들을 쓸 날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쓰지 않겠다기보다는 쓸 수 없을 듯 했다.”라고 했어요.
소설을 쓰려면 그 이야기가 내가 하는 고민과 맞닿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2018년 당시에는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제주의 풍광은 분명 특별하지만, 나와의 연관점을 발견하기가 어려웠거든요. 같이 가슴 아파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지점이 뭐가 있을지 찾지 못한 채 돌아왔죠. 그런데 다음 해에 영초롱의 직업을 판사로 정하고 나니까 모든 궤가 맞춰지더라고요. 노동하는 인간으로 살고 싶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만 살면 일을 그르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을 설정하니까 그간 했던 고민이 모두 해결되는 느낌이었어요.
영초롱의 직업이 판사가 된 건, 법원에서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 계기가 되었다고요.
질의응답 시간에 강연에 참여한 판사들의 고민을 들을 수 있었어요. 그때 직업으로 인해 인간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죠. 판사는 제시된 증거나 문서로 사건을 판단하는 사람인데, 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잖아요. 아무리 안타까운 사정이 있어도 그분들에게 법률적인 도움이나 조언의 말을 해줄 수 없다는 데서 괴로움을 느끼시더라고요.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아 맴돌고, 화가 난다는 거예요. 그때 그 말씀을 하시는 판사님 표정에 실제로 화가 나 있었어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일반적으로 비춰지는 판사의 이미지와 질의응답 시간에 “괴롭다”고 토로하는 한 사람의 얼굴은 많이 달랐거든요. 그런 고민을 안고 있는 주인공을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은 어떻게 정하셨어요?
자고 일어났는데 문득 생각났어요.(웃음) ‘다음 장편 제목은 복자에게다!’라고요. 복자라는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있잖아요. 종교에서 ‘복자’라는 명칭은 현재적인 어려움을 무릅쓴 자들에 대한 존중과 경외가 담겨 있어요. 실제로 주변에 이런 이름을 가진 분들이 한 두 명은 있고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첫 장편 『경애의 마음』에도 주인공 이름이 들어가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 외에 다른 제목은 떠오르지가 않더라고요. 결국 ‘이번까지만 이렇게 가자’고 생각했죠.(웃음)
작가님이 생각하는 소설 속 명장면을 뽑는다면요?
영초롱과 영웅이가 아빠가 관리하는 자판기에서 돈을 꺼내러 갔다가 만난 청년에게 욕을 한 마디 하고 돌아서서 올 때가 기억나요. 영웅이는 자기가 누나를 돕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괜히 “아까 그 새끼 좀 때려줄 걸 그랬나?”라며 허세를 부리는데, 영초롱은 현실적으로 “때리면 치료비 나간다”고 대꾸하잖아요. 무심한 듯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영초롱은 영웅이가 든 가방에서 동전이 차락차락하는 소리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세상을 산다는 건, 많은 감정을 넘어야 하는 거구나’라고요.
또 하나는 영초롱의 고모가 친구 규정의 면회를 갔다가, 면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냥 돌아내려오면서 고등어를 사는 장면이요. 삶이라는 건 때때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고, 그냥 빠져나오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견디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걸, 파리떼가 생선에 달라붙었다 다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느끼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에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한 문장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라는 말을 선택하고 싶다”고 했어요. 작가님도 실패를 미워했던 시절이 있나요?
실패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20대 초반에 임용고시를 봤다가 떨어진 적이 있어요. 임용고시 응시생은 합격을 하지 못해도 자기 점수를 확인할 수가 있는데, 확인하지 않았어요. 저는 그게 제가 한 인생의 실수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비록 합격을 못했더라도, 커트라인에서 몇 점이 부족해서 떨어진 건지 궁금해야 하잖아요. 저는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서 결과를 대면하지 않고 바로 취직했어요. 세월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인생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까지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독자를 위로하고 싶은 걸까요? “끊이지 않고 흐르는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는 문장이 힘이 되더라고요.
우리 삶에서 실패는 무시로 일어나잖아요. 저의 20대 때를 돌아보면, 사실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용기내서 살 수가 없어요. 실패는 언제든 예고 없이 들이 닥칠 테니까요. “실패하는 건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고, 우리 모두에게 찾아 드는 순간이야. 그러니 괜찮아.” 소설이 그 정도의 말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이 소설의 문장을 하나 고른다면 “복자야. 우체통은 시청역 4번출구 앞에 정말 있어. 거기에 그게 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사실이야.”(237쪽)를 택하고 싶어요.
저도 쓰면서 울컥했던 문장이에요. 복자와 영초롱의 관계가 비록 현실에서는 멈췄지만,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영초롱이 그 여지를 남기는 말이자, 영초롱의 성장이 담긴 말이라고 생각해요.
마감 후에도 소설에서 오래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들었어요. 『복자에게』는 어떤가요?
지난주까지는 심각했는데,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요. 장편을 마치고 나면 소설의 어떤 장면이나 대사가 머리에 계속 맴돌아서 갑자기 울기도 하고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거든요. 마지막까지 생각났던 건 고모의 “규정아 건강하니?”라는 대사였어요. 버스를 타도, 길을 걸어도 그 말이 계속 맴도는 거예요. 안 되겠다 싶어서, 마감이 잡혀 있던 에세이 하나를 얼른 쓰고 나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빨리 새로운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장편은 후유증이 정말 심각해요.(웃음)
장편을 쓰는 것과 단편을 쓰는 건, 여러 의미에서 정말 다른 작업일 것 같아요.
맞아요. 저는 장편을 쓰는 게 더 재밌어요. 단편을 쓸 땐 압축해야 한다는 압박을 많이 받아서, 다 쓰고 나면 너무 힘들거든요. 하지만 장편은 분량적으로도 자유롭고, 어떤 미적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보다 인물들이 가진 사연을 잘 전달해야겠다는 느낌이 더 강해요. 단편은 짧은 분량 안에도 선명한 주제가 있고, 그걸 잘 담아야 하니 뇌를 많이 쓰게 돼요. 단편 너무 어려워요. 이제 많이 안 쓰려고요.
정말요? 리뷰나 기사 댓글을 보면 “김금희 작가는 단편이 진짜 최고다”라는 내용이 정말 많은데요.(웃음)
그런가요?(웃음) 단편 너무 어려워요. 뇌가 막 트위스트 하는 느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꼭 단편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요. 단편을 쓰면 기량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거든요. 쓸 땐 너무 괴롭지만, 하나 쓰고 나면 제가 확 성장해 있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니 안 쓸 수도 없고, 쓰면 괴롭고, 어쩌죠. (웃음)
작가님 소설의 등장인물은 대체로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지만, 심지가 곧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요. 저절로 마음이 가는 유형의 사람이 있나요?
자기 세상이 있는 사람이요. 좋아하는 게 있고,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고, 지키고 싶은 기준이 있는 사람을 좋아해요. 예를 들면, 제가 며칠 전에 화원에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저를 보고 살짝 놀라시더니 “지금 음료수가 없다”면서 생수를 꺼내주시는 거예요.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갔다가 그런 대접을 받은 게 처음이라 너무 신선했어요.(웃음) 그런데 그 아저씨가 식물들을 막 설명하면서 “이건 바나나 나무예요. 아 근데 잎이 좀 상했네.” 이러시는 거예요. 사실 정말 상했더라도,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화분을 팔 수 있을 텐데, 자기가 가진 성격 그대로를 드러내는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그런 인물을 만나면 자극을 받고, 그 성격을 간직하고 싶어요. 사실 아저씨의 행동은 현실의 기준에서는 불필요한 것이지만, 가게의 주인을 떠나 한 사람으로 행동하면서, 저를 집에 온 손님처럼 대해주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렇게 자기 방식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좋아요.
정말 매력적인 분이네요.(웃음)
대반전은 그 아저씨가 화원 주인이 아니었어요.(웃음) 가족이 하는 가게에 잠깐 와 계신 거였죠. 계산하려고 카드를 내밀었더니 카드 리더기를 쓸 줄 모르시더라고요. 저한테 식물 이름을 하나하나 다 알려주셨는데, 그냥 식물 덕후였던 거예요.(웃음) 집에 오면서 정말 신선한 만남이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활기를 얻어요. ‘세상에 아직도 독특한 사람이 많아!’ 하면서요.
“예약 주문 오픈하자마자 샀는데 받고 보니 2쇄다”라는 리뷰를 봤어요.(웃음) 이제 ‘김금희’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을 사는 독자들이 정말 많아요.
첫 장편을 쓸 때는 작업 자체가 힘들어서 반응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이 됐어요. 저도 리뷰를 하나 봤는데요. 『경애의 마음』을 재미있게 읽고, 이번에 『복자에게』를 봤는데 괜찮아서 다행이었다는 내용이었어요. 독자가 안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작가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어요. 작품을 하나하나 펴내고,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게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 독자와 협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새 작품이 나왔을 때, 기쁨보다 안도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내가 누군가의 이런 마음을 받아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죠.
이외에도 인상적이었던 반응이 있을까요?
각자 마음 속에 있는 제주를 환기시키면서 ‘책을 읽고 나니까 제주도 가고 싶다’고 쓴 리뷰들을 보면 너무 좋아요. 잠시나마 그리운 공간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는 뜻이니까요. 제주라는 낯설고 감당하기 쉽지 않은 공간을 써낸 보람이 있어요.
제주는 ‘제주’라는 것만으로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공간뿐 아니라 제주 사람들에게도 힘이 느껴져요. 그리고 자부가 대단하죠. 제가 지낸 가파도 주민분들도 자부심이 정말 컸어요. 소설에도 썼지만 “본섬에서 잡은 물고기는 맛 없어서 못 먹는다”고 말씀하실 때의 표정이 생생해요. 가파도는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섬은 모래가 많아서 물고기가 모래를 먹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거예요.(웃음) 도시에서 만난 제주 친구들도 늘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제주에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아요. 풍요롭고요. 코로나19가 잦아들면 꼭 제주에 가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읽고 나면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거예요. 그 얼굴을 한없이 그리워하는 오후 정도를 보낼 수 있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쩌면 그런 그리움을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을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금희 1979년 부산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성장했다.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오직 한 사람의 차지』,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중편소설 『나의 사랑, 매기』, 짧은 소설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이 있다. 2015년, 2017년 젊은작가상, 2016년 젊은작가상 대상, 신동엽문학상, 현대문학상, 우현예술상, 2020년 김승옥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다. 애니멀호더에게 방치되어 사람과 멀어지고 야생화된 개 ‘코코’와 일대일 결연을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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