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 “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
장편소설 『100개의 리드』
저희는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가 아니에요. 하지만 분단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세대의 거대한 상실감과 고독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죠. (2020.10.13)
‘사랑’이라는 사건으로 바라본 분단은 정치와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처와 그리움의 문제다. 분단의 역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품고 살아가는 내상의 역사가 된다. 분단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삶의 배경으로 짊어지고 가는 청춘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그리워하는 이야기. 잠자는 우리의 감각을 깨워주는 아픈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오랜만에 장편소설을 발표한 이홍 작가에게 『100개의 리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다.
북한의 남학생과 남한의 여학생이 제3국에서 만나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9년 전 장편 연재를 마치고 자연인과 작가로서 고갈된 느낌이었어요. 그때까지 발표했던 소설들과 다른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 갈망이 깊어지던 시기와 맞물렸죠. 재충전이 필요했어요. 친한 친구와 싱가포르 여행을 갔어요. 친구가 다녔던 고등학교 구경을 갔고 그날 밤새도록 동급생이었던 북한 남학생 이야기를 들었어요. 걷잡을 수 없이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죠. 그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 싶었고, 배경인 싱가포르에서 집필을 결심했습니다. 싱가포르에 도착한 후로는 자료들을 읽으며 미지의 북한 남학생을 어떻게 잘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요. 사랑과 이별이란 정서적으로 한 인간이 가장 풍만해지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잖아요. 그래서 북한 남학생과 남한 여학생이 첫사랑에 빠지는 설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라는 공간이 이들의 사랑이 이루어진 제3국인데요, 싱가포르에서 직접 작품을 집필아셨다고 들었어요. 그 공간의 이야기를 그 공간에 가서 직접 쓴다는 것은 어떤 감각을 동반한 경험일지 궁금합니다.
인물들 내면의 감정이 특정 공간 고유의 빛, 온도, 소리, 냄새를 통해 발화되는 순간을 좀 더 디테일하게 표현할 수 있었어요. 한편으로는 저에게조차 낯선 공간이 일종의 프리즘이 되어 저와 인물 사이에서 섞인 감정의 결들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발산하는 감각을 할 수 있었고요. 그게 낯설고 어색해서 아마도 집필기간이 오래 걸린 것 같아요. 값진 경험이었죠.
오랜 시간 동안 소설을 쓰고 퇴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 쓰는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참고자료로 읽고 시청한 것들을 제 안에서 갈무리하고 체화하던 시점이었어요. 다카시마야 백화점 지하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김정남 씨를 만났어요. 연어코너 앞에 서서 인터뷰를 했죠. 몇 년 후 말레이시아 공항에서 김정남 씨가 피살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후로 연어를 보면 간혹 수퍼마켓 연어 냉장고에서 뿜어져 나와 살갗에 닿았던 냉기가 되살아나곤 해요. 뜨거운 열정으로 이 소설을 시작했지만 결국 그 냉기의 감각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분단이라는 배경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 중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선택한 데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저희는 분단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세대가 아니에요. 하지만 분단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세대의 거대한 상실감과 고독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죠. 제가 12살 때였어요.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북한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고백하셨어요. 분단 후 새로이 얻은 가족들에게 수십 년 동안 비밀로 하신 거죠. 조용하고 점잖은 분이셨는데 밤마다 홀로 소주 반 병을 드시고 잠자리에 드셨던 기억이 나요. 더도 덜도 말고 딱 반병이었어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서 추억이 많은데, 할아버지를 회상할 때마다 유독하게 당신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숨겨둔 비밀이 제 안에서 떠올라요. 소주처럼 날카롭고 투명했을 비밀이요. 이제는 온전히 할아버지의 비밀이라고만 할 수 없고, 디테일을 보탠 저의 상상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그 비밀의 감각을 소설로 추적해 보고 싶었죠.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무수한 관련 글들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과연 권력자들에게 분단이란 정지척 이용도구나 경제적 이익창출을 위한 블루오션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분단으로 인해 직접적인 내상을 입고 일평생 그 내상과 함께 분투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분단은 전혀 다른 의미잖아요. 그렇다면 누가 이 깊은 상처들을 기억하고 보듬을 수 있을까. 이제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 그 내상들을 들여다보고 쓰는 건 소설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분단으로 인한 상처들의 원인은 이별, 그리고 잔인하리만치 기나긴 그리움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이유로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사건인 동시에 자신의 통제 밖으로 벗어나는 낯선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영역 안에서 분단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슬픔을 잃어버린 슬픔을 가진 세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사소하고 낮은 언어의 몸짓으로요.
오보에의 소리에 대한 묘사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이 소설의 중심 감각이 청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로 음악 묘사도 많았고요. 오보에라는 악기를 배워 보신 적이 있나요? 음악이 이 소설을 쓰는 데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궁금해요.
항상 문장의 리듬에 대해서 고민해요. 미문가가 아니다보니 소설가로서는 제 문장에 대해 일종의 컴플렉스가 있어요. 감각적이고 유려한 문장을 잘 쓰지 못하니까요. 이 부분은 노력과 훈련을 통해 개선되기도 하지만 아주 미미하죠. 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문장의 리듬과 호흡에 주력해요. 글을 쓰기 전 이른 아침에 그날 제가 써야 할 문장의 리듬과 닮은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얻어요. 워밍업을 하며 제 호흡을 고르는 거죠. 저는 단문을 선호하고 제 문장은 속도감이 빠른 편이거든요. 그런데 『100개의 리드』에서 과거 시점은 기존의 속도감에서 한 템포 이상 늦출 필요성이 있었어요. 서사와 호흡이 비슷한, 서정적이고 느린 여러 음악들을 듣다가 가브리엘스 오보에를 발견했고요.
영화 미션을 보았어요. 고립된 채 죽음을 목전에 둔 선교사가 두려움 속에서 간신히 용기를 내어 목관악기를 꺼내어 연주하잖아요. 한 인간의 고독과 두려움이 그윽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가는 장면이 아이러니하면서 인상적이었죠. 그 소리를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어요. 두려움을 느낄 법한 공간이나 상황에서 오보에 연주를 해 보면 어떨까? 오보에에 대해 지식이 없어서 중고 오보에를 구입하여 기초 연주법을 배웠어요. 오보에와 호흡을 연결해 주는 리드는 흥미로운 도구였죠. 살짝 스치기만 해도 부서질 정도로 예민하고 매우 얇은 틈새로 내 안의 호흡이 스며들어 그런 멋진 소리를 낸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어요. 서사 속 관계들에서 리드는 그런 상징적 의미를 내포해요. 사랑의 영역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되잖아요. 얇디얇은 리드의 틈이 마치 화자와 타자 사이의 좁은 이해의 폭처럼 느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좁은 틈 사이에는 아름다운 오보에 소리와 같은 사랑이 잠재해 있다고, 『100개의 리드』를 쓰며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면요? 혹은 쓰고 나서 만족하셨던 문장이어도 좋아요.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한 개인의 힘으로는 넘어서지 못하는 상처도 있다. 상처가 무너지는 순간도 있다. 철조망에 박힌 가시들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뒤엉켜 자라난 상처들이 박재희와 첫키스를 하고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순간 가시들을 벗어냈다. 후드득. 선선한 초여름 밤바람. 드미트리의 두번째 왈츠. 풍선껌 향 입김. 어설프게, 인생의 두번째 왈츠를 추기 시작한 어린 연인의 발자국 아래서 가시들이 곱게 으스러졌다. 가시들이 사라진 철조망이라면 넘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님에게 생긴 변화도 있을 것 같아요.
강유나라는 인물과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내왔습니다. 저의 30대를 함께 통과했죠. 배운 게 많아요. 강유나를 만나기 전의 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내가 쓰고 싶은 글이 무엇인지 모른 채 타자화된 나로 살았어요. 표면적으로 의무도 다하고 무엇인가는 얻기도 했는데 삶의 만족도는 그와 반비례했죠. 이 소설을 쓰고 내 안의 가치관이 바뀌었어요. 어렴풋이나마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요. 강유나가 제게 준 선물이죠. 당장 얻는 건 없어도 내가 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이요. 그 확신이 주는 자유감이요.
*이홍 O형 쌍둥이자리인 그녀는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친구들을 대신해 써 주었던 연애편지는 그녀가 문학을 하게 된 발단이었다. 글을 쓰고 싶은 열정에 안양예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갔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2007년 장편소설 『걸프렌즈』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10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부문 차세대 예술가(AYAF)로 선정되었다. 현재 『100개의 리드』의 주요 배경인 싱가포르에 살며 이 소설의 2권을 집필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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