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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유연하게 언어보다 중요한 진심을 전한다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 정다혜 저자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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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은 스킬이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하고 갈고 닦지 않으면 금세 감이 무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언어 실력과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통역 스킬 자체도 연습하는 것을 게을리할 수 없어요.(2020.08.27)


내한한 외국 스타의 옆, 각국 대표들이 모인 외교 현장 등 두 개 이상의 언어가 오가는 자리에는 통역사가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매력적인 직업 같지만 대외적인 모습일 뿐, 현실은 단 하루 이뤄지는 통역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 모든 감각을 곤두세운다. 사전 준비는 물론, 현장에서 대화의 맥락을 읽고 화자의 의도를 온전히 전달하며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도 중재하여 무마한다.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변수에도 대처한다.

무엇보다 내용을 놓치지 않고 그 진심을 온전히 전하는 것이 통역사의 몫이다. 작은 통역 부스 안에서 주인공을 위해 그림자와 같이 움직인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완벽을 기해야 한다. 서로 다른 문화적 장벽을 허물어주는 통역사. 그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정다혜 저자에게 들어본다.




최근 매체에 자주 노출된 영향인지 통역사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통역사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나요?

통역사가 하는 일은 너무나 다양해서 한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요, 최근 봉준호 감독 옆에서 인터뷰를 통역하던 통역사의 모습을 많이들 떠올리실 것 같습니다. 저는 법률 분야의 통역 일을 주로 해왔습니다. 청와대 정상회담이나 기자회견, 그리고 해외 스타들의 인터뷰처럼 TV나 라디오로 방송이 되는 현장에서 통역하기도 하고, 정부 기관이나 기업 내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회의에서 순차 통역을 하기도 합니다. 또, 보통 호텔의 큰 행사장에서 개최되는 국제회의나 세미나에서 동시통역을 하기도 하고, 저는 법원에서 재판 통역을 하거나 미국 로펌의 데포지션 통역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연사가 말하는 동안 노트 테이킹을 하면서(머릿속으로 기억하며 통역하기엔 한계가 있어 노트에 메모해가며 통역을 한다) 내용을 기억했다가 연사의 말이 끝난 후 바로 이어서 통역하는 것이 순차 통역이고, 회의장 한쪽에 설치된 통역 부스 안에서 연사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통역을 하고 청중들은 리시버를 끼고 듣는 것이 동시통역입니다.

* 데포지션: 미국법상의 제도. 법정에서 증인이 선서하고 증언하는 것을 대신해 법정 외 다른 곳에서 양측 변호사, 법정 속기사, 비디오 촬영기사, 통역사, 그리고 증인이 모여 증인신문을 하고 증언을 녹취하는 과정이다.

‘영어 하나만 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던 때가 있어서 그런지, 통역사는 외국어 실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외국어 실력은 통역사가 갖추어야 하는 여러 자질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외국어 실력 못지않게 모국어, 그러니까 저의 경우에는 한국어 실력도 중요합니다. 그 외에도 이해력, 논리력, 순발력, 분석력 등이 동시에 요구되는 꽤 어려운 프로세스입니다. 금융, IT, 법률, 문화, 예술, 정치, 외교 등 분야를 불문하고 어떤 내용이든 정확히 이해하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배경지식도 필수입니다. 단순히 기계처럼 단어나 표현을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해서 정확하게 그 메시지를 도착언어(외국어)로 통역해야 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요즘엔 통역사에게 요구되는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의 정도가 굉장히 높아졌습니다. 내가 통역을 맡은 분야의 전문가 못지않게 해당 분야에 대해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좋은 통역을 하기가 어렵죠. 그래서 통역을 준비하는 과정은 자료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전에 가능한 한 많은 자료를 빠른 시간 내에 숙지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도 각자 자신만의 전문분야가 있듯이, 통역사도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통역사들이 유리한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또한, 통역은 스킬이기 때문에 꾸준히 연습하고 갈고 닦지 않으면 금세 감이 무뎌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언어 실력과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통역 스킬 자체도 연습하는 것을 게을리할 수 없어요.

2019년에 남북미 정상 판문점회동 동시통역을 맡았는데, 중대한 행사에 참여할 때는 긴장하는 정도가 다를 것 같아요. 어떻게 준비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쉬운 통역은 없지만, 정상회담이나 기자회견처럼 방송으로 생중계가 되는 통역은 특히나 긴장됩니다. 혹여 작은 실수라도 있으면 자칫 외교 문제로 불거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몇 배로 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죠. 최근 몇년 간 양국 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기사와 보도자료 등 다양한 자료들을 최대한 많이 조사하고 공부했어요. 그리고 뉴스 등 영상자료를 많이 찾아보면서 각 정상의 언어 습관이나 악센트에도 익숙해지려고 했고요.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나 단어도 확인해두었습니다.

 또 청와대 조약서명식이나 지난해 맡았던 한-아세안 특별정상 회의처럼 의전이 중요한 행사는 통역사가 의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으면 행사장에서 실수하기가 쉽습니다. 보통 이런 행사에서는 통역할 때 사용해서는 안 되는 표현이나 단어도 있고, 또 반대로 정해진 표현이나 단어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상이 이동하는 발걸음 수까지 세어 치밀하게 계획하고 리허설을 하고, 본 행사에서는 조금의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죠. 통역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렇게 충분히 사전 준비를 해도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통역인 만큼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 경우는 지금껏 셀 수 없이 많았어요. 사전에 받은 자료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을 말하는 연사도 있고, 보안상 자료를 줄 수 없다고 했는데 정작 발표 때 한국어로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들을 잔뜩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래서 완벽한 준비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돌발 상황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판단을 내려서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을 일 년 앞두고 열린 평창국제음악제 오프닝 리셉션에서 영어 MC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연설을 하고 싶다는 분들이 하나둘씩 생겨 대본 귀퉁이에 겨우 노트 테이킹을 해가며 순차 통역을 했어요. 나중에는 노트 테이킹을 할 종이가 없었습니다. 통역 부스도 아니고,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진행자 포디움에 서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통역하고 있었던 터라 순간 눈앞이 캄캄했죠. 그때 옆에서 함께 진행을 하던 한국어 MC분이 얼른 자신의 대본을 찢어서 내밀어 주었어요. 그 덕분에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어요. 그때 당황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통역사를 꿈꾸는 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주로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어떤 것을 배우게 되나요? 통역사 일을 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요?

통번역대학원에서 영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탄탄한 영어 실력은 입학 요건에 불과하고, 입학 후에는 통역과 번역 스킬을 훈련합니다. 노트 테이킹을 하면서 하는 순차 통역과 통역 부스에 들어가서 통역을 하는 동시통역을 배우고, 다양한 분야, 그리고 여러 종류의 텍스트로 연습을 합니다. 수업과 수업 사이, 또는 수업이 끝난 오후에는 스터디 파트너와 통역 스터디를 하고, 집에 와서는 수업 과제를 하고, 그날 내가 한 통역 녹음을 들으며 자책하고 반성하기를 매일 반복하는 거죠.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하는 공부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 갈고 닦아야 하는 스킬이다 보니, 통역하기를 타고난 것 같은 친구들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실력이 잘 늘지 않아 좌절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졸업시험을 통과하는 순간까지 마인드컨트롤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순차 통역에서 쓰이는 노트 테이킹은 모든 내용을 빨리 받아적는 속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으로는 들은 내용을 모두 기억하되, 긴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메시지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노트의 도움을 받는 것이죠.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기호를 사용하는 등 통역사들 저마다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워낙 손글씨에 자신이 없어서 노트 테이킹을 처음 배울 때부터 글보다는 기호나 간단한 그림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어요. 

동시통역은 한쪽 귀로는 연사의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그 내용을 이해, 분석, 종합해서 입으로는 다른 언어로 통역을 하고, 나머지 귀로 내 입에서 나가는 통역을 듣고 모니터링을 하는 건데 이 모든 과정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동시에 뇌의 여러 부위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소위 ‘뇌 쪼개기’라는 것을 연습하죠. 통역사들이 멀티태스킹에 강한 이유가 이런 훈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시대가 변화하며 항간에서는 로봇이 통역을 대신 할 수 있다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AI가 통역사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요. 

외국 여행을 할 때 통역이나 번역 앱을 사용하는 것처럼 아주 단순한 구조의 짧은 문장은 지금도 충분히 기계가 통역을 잘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해서 나오는 매뉴얼 같은 문서들은 기계 번역을 한 다음 사람이 다시 한번 감수를 하는 방법으로 작업하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통번역 학계의 다수 의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통역사들이 통역하는 건 단순하고 짧은 문장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단순히 ‘단어 바꾸기’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뉘앙스와 맥락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통역하는 것은 아직 기계가 사람을 따라오지 못하는 분야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상대방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언어의 특성도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어떤 정부 기관의 프로젝트로 특정 법률을 번역 소프트웨어로 기계 번역을 한 것을 제가 감수한 적이 있었어요. 반복되는 짧은 문장들은 비교적 정확하게 번역이 되어 있지만 문장 구조가 조금만 복잡해지거나 수식 관계가 모호한 문장들은 엉터리로 번역이 되어 있었어요. 특정 단어들은 맥락과 상관없는 엉뚱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요. 아직은 사람의 손이 꼭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 책은 지난 10년간 통역사로 일을 해오면서 경험하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담은 기록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고군분투해야 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저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제 주위 선배들의 격려와 도움이었습니다. 누군가 “선배란 단지 그 길을 먼저 걸어와 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을 방송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알고 있거나, 난관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오다 보니 웅덩이도 있고, 돌부리도 있더라는 것을 먼저 겪어보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제겐 그 말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비단 통역사를 꿈꾸는 분들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고 있는 모든 분께 어떤 길 위에서든 시행착오를 겪고, 숱하게 흔들리고, 고민하고 있더라도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니 괜찮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도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로 지은 것이고요. 

흔히들 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힘들고 어려운 것은 견뎌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 후회 없이 노력하되, 내 꿈에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도 괴롭지 않고 행복한 기억들로 채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걸어와 보니 알겠더라고요. 독자 여러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어떤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힘내어 계속 걸어갈 수 있도록 이 책이 조그만 위안이 되어드릴 수 있길 바랍니다.


* 정다혜

국제회의 통역사. 영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후 중앙대학교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UN마약범죄사무소에서 주니어 연구원(Junior Researcher)으로, 외교부에서 인하우스 통번역사로 근무했다. 테크앤로 법률 사무소에서 전문 위원으로도 일했으며, 최근 남북미 정상 판문점 회동 생중계 동시통역을 비롯해 청와대 조약 서명식, 2019 아세안 특별 정상회의 등 다수의 국빈 행사에서 통역을 했다.

말 이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며 언어를 넘어 진심까지 전달하는 통역사를 꿈꿨다. 이제는 10 년간의 활동을 밑거름 삼아 국제법을 연구하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고려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
인생도 통역이 되나요
정다혜 저
지콜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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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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