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온 ‘청소년’ 이야기, 『귤의 맛』”
청소년 소설 『귤의 맛』펴내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란의 짧은 인생에도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있겠죠. 소란이 아닌 누구도 소란의 경험과 감정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020. 06. 12)
『귤의 맛』은 『82년생 김지영』으로 차이와 차별의 담론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키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조남주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이다. ‘누가 내 얘기를 여기에 쓴 거지 ’라고 할 만큼 한 개인에게서 공감의 서사를 예민하게 끌어내는 그가 이번엔 미열과 고열을 오가며 초록의 시간을 지나는 한 알 한 알의 존재에게 시선을 맞춘다. 숱한 햇볕과 바람을 들이고 맞으며 맛과 향을 채워 나가는 귤 같은 너와 나의 이야기. 사춘기나 과도기로 명명되는 시기를 쉽게 규정하지 않고, “어차피 지나갈 일, 별것 아닌 일, 누구나 겪는 과정으로 폄하하지 않고 그 자체의 무게와 의미로 바라보고 싶어 한” 작가의 다정한 응시가 담겨 있다.
첫 청소년소설 출간, 축하드립니다. 중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만난 네 친구의 이야기가 친밀하게 와 닿았습니다. 아이들을 둘러싼 학교와 가정, 조금씩 달라지는 관계의 지형도, 약속의 이면에 감춰진 아이들의 사연, 무엇보다 정말 약속이 지켜지는 건지 약간의 서스펜스까지 느끼며 내내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본인의 청소년 시절이 회상되어 공감이 됐다는 성인 독자의 리뷰도 꽤 눈에 띄었는데요, 특별히 청소년소설에 관심을 둔 계기가 있었나요?
청소년소설을 쓰겠다, 는 마음이 먼저는 아니었습니다. 딸이 자라면서 함께 청소년소설을 읽기도 했고, 주변의 아이들, 교육환경, 입시 같은 주제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어요.
제가 사는 곳에서 차로 10분쯤 거리에 소설 속 다난동처럼 교육열이 높고 학원 많은 동네가 있어요. 우리 동네 아이들은 셔틀을 타고 그곳으로 학원을 다니다가 학년이 올라가면 아예 이사를 가기도 합니다. 언젠가 같은 단지의 엄마에게서 중학생 아들딸이 ‘다 떠나는 곳에 남겨졌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동네든 다들 그들의 ‘다난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요.
그즈음 서울시교육청 자사고 재평가가 있었어요. 뉴스에서 학부모 연합회와 교장 연합회의 집회 장면을 보고 있는데 그 화면 안에 당사자인 학생들이 없다는 사실이 익숙하지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일로 인해 요즘 청소년들은 어떤 생활을 할까, 무슨 고민을 할까, 지금의 입시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졌습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청소년이 주인공이고 청소년 시기가 배경인 청소년소설이 되었고요.
소란, 다윤, 해인, 은지의 이야기가 시간과 시점을 달리하며 펼쳐집니다. 이렇게 네 인물을 설정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인물의 색깔, 인물이 처한 상황이 뚜렷해서 독자마다 이입하는 대상이 달라요. 모든 인물에게 애정이 있겠지만 특별히 마음 쓰이는 인물이 있나요?
뭔가를 함께 도모하기에 셋은 좀 적고 다섯 이상이면 너무 복잡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네 명 정도로 일단 잡아 두었고…….
평범한 친구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82년생 김지영』에 대해서도 평범의 기준이 뭐냐, 납작하다, 하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저는 여전히 그런 인물에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아주 천재적이거나 아주 열등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아주 풍요롭지도 심각하게 어렵지도 않고, 큰 행운과 행복이 찾아오지도 최악의 절망과 좌절에 빠지지도 않은 인물이요.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혹은 친한 친구와만 나누는 그늘이 하나씩은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 그늘을 만들다 보니까 처음 생각처럼 아주 평범하지만은 않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평범한 소란에게 마음이 가고 자꾸 대변해 주고 싶습니다. 소란이네는 전형적인 4인 가족에 구성원들도 무난합니다. 경제적으로도 크게 어렵지 않고요. 학교생활도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도 소란은 조금 우울하기도, 무기력하기도, 꼬여 있기도 합니다. 소란은 “대체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래?” “너 정도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하는 말과 시선들을 받아왔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란의 짧은 인생에도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있겠죠. 소란이 아닌 누구도 소란의 경험과 감정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작품들을 보면 취재를 철저히 한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귤의 맛』 역시 주인공 또래 청소년들과 얘기를 많이 나눠 보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엿들을 수 있을까요? 작품 속에 얼마큼 반영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직접 만나기 전에는 ‘공부가 너무 어렵고, 공부 양도 많고, 특목고나 자사고 때문에 중학교 때부터 입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힘들고, 고교지원제 때문에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는 것이 싫다!!’는 대답을 듣게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서 무척 당황했습니다. 힘들어하면서도 어느 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결과가 다른 것은 노력과 실력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친구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 시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우정은 우정이고 진학은 진학이더라고요.
그래서 초반에는 인터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좀 헤맸어요. 나중에는 준비한 질문지에 연연하지 않고 대답을 들으면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질문을 하고 흘러가는 대로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제야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실관계에 굉장히 집중했습니다. 지금 현재 청소년들의 모습을 똑같이! 생생하게! 그려 내겠다! 생각했고, 취재한 정보들을 조각조각 많이 넣으려고 애썼어요. 그러다가 편집부와 의견 주고받으면서 이야기의 흐름과 인물의 성격을 더 살피게 됐습니다. 취재에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얻었다기보다는 그 또래들의 감정, 정서,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초록의 시간은 어땠나요? 그때도 지금처럼 책을 읽거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나요?
또래에 비해 미숙하고 정신연령도 조금 낮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나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어려웠는데 사실 별로 기억이 안 남아 있습니다. 물건도 잘 버리고 기억도 잘 버리는 편이에요.
중학교 때는 서태지를 엄청 좋아해서 교복 재킷 주머니에 파나소닉 미니카세트를 넣고 다니며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서태지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어폰 한쪽 끝을 소매 안쪽으로 빼서 턱을 괴는 척 귀에 꽂고 수업 시간에도 몰래 듣곤 했어요.
책은, 집에도 거의 없고 공공도서관도 잘 되어있을 때가 아니어서 별로 읽지 못했어요.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가 모으는 『하이센스』 『르네상스』 『댕기』 같은 순정만화 잡지를 많이 봤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윙크』 『이슈』 『화이트』를 봤고요.
제주도로 떠난 네 아이들이 한 가지 약속을 한 뒤 타임캡슐에 넣어 숟가락으로 묻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혹시 타임캡슐에 무언가를 보관해 보신 경험이 있나요? 지금 작가님 앞에 타임캡슐이 있다면 어떤 말을 적어 넣고 싶은가요? 약속을 한다면 누구와 어떤 약속을 하고 싶은지 궁금해집니다.
타임캡슐은 아니지만 새해 첫날, 친구와 편지를 교환하고 그해 마지막 날에 열어 보기로 하거나 일 년 후 도착하는 ‘느리게 가는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 본 적은 있습니다. 두 번 다 약속을 잘 지켜 일 년 만에 편지를 읽을 수 있었어요.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작 편지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나요. 메시지보다는 상대와의 관계가 계속 유지될지가 궁금하고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아이들처럼요. 지금 타임캡슐이 있다면 제가 듣고 싶은 말들을 가득 써서 담아 두고 싶습니다. 생각만 해도 위로가 될 것 같아요.
이 소설은 고등학교 입학식으로 시작해서 고등학교 입학식으로 끝이 납니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아이들의 현재를 구성해온 과거의 시간들을 조각조각 엿볼 수 있었는데, 본격적인 고등학교 생활은 보지 못해 아쉬워요. 맨날 붙어 다니는 이 아이들, 고등학교에 가서 어떻게 지낼까요? 어떻게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나요?
고등학생들은 당장 입시나 취업을 앞두어서인지 순식간에 어른이 되는 것 같아요. 몸과 마음의 급성장기를 지나 감정도 관계도 차분해지고. 그렇다고 마냥 평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보다 훨씬 더 성적에 예민할 거고, 경쟁도 할 테고, 누군가는 지난 선택을 후회하거나 원망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네 아이가 다시 한번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될 텐데, 그때 뭔가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 벌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럼 저는 그 얘기를 소설로 잘 써 보고 싶네요.
‘작가’ 조남주가 지금 관심을 두고 있는, ‘작가’ 조남주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것 역시 책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노년의 삶, 특히 노년 여성의 삶이 궁금합니다. 몸도 정신도 쇠약해진, 어쩌면 다시 돌봄이 필요할, 하지만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지나온 삶이 아쉽거나 후련하거나 고통스럽거나 행복할 할머니들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조금씩 쓰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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