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란 “엄마와 ‘존엄하게’ 이별하는 법”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저자 인터뷰
우리들도 가야 할 요양원 같은 시설들이, 남은 생을 도움을 받으면서도 개인의 자존과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바뀌어갔으면 좋겠어요. 어르신들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능동적으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바꾸는 공간으로 내 스스로 들어간다는 마음이 될 수 있도록. (2020.03.26)
누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타인의 손길에 목숨을 맡겨야 살 수 있는 존재, 애기와 노인. 여기, “귀엽지도 않은 애기”가 되어버린 구순 엄마의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저자가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의 전 편집장이자,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글을 써온 권혁란 작가는 무의미한 고통에 시달리다 느리게 죽어간 엄마의 날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온몸은 보랏빛 반점으로 뒤덮이고 깡마른 뼈와 피부 사이의 한 점 경계 없는 몸으로, 제 발로, 제 손으로 용변조차 볼 수 없어 도우미의 손을 빌려야 했던 엄마의 모습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가 여타의 책들과 다른 점은 단지 사모곡이나 애도의 말들만 담은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여섯 자식이나 두었던 엄마가 왜 요양원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늙은 부모’를 모시는 ‘늙은 자식’들이 현실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는지를 꼬집는다. 백세 시대?장수 시대는 과연 축복인지 재앙인지, 노인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는 이 시대에 노인 부양의 책임이 오롯이 한 가족에게만 있는지 되묻는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의 도움을 받는 자식들에게 ‘부모를 버리고 패륜을 저지른 자식’이라며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시선을 이제는 거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부모가 자식들 집에서 ‘징역살이’ 하듯 사는 것보다 요양 전문 기관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사는 것이 자식과 부모 모두에게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 부모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겠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부분을 바라보고 책을 쓰신 작가분은 없었던 것 같아요. 먼저 이 책을 쓰시게 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엄마의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에 다다르는 과정은 딱 그때의 ‘나의 일’이었어요. 부모의 와병, 치매, 간병, 요양원, 죽음과 작별 같은 것들이 ‘남의 일’로 끝나진 않았으니까. 부모 계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병원비 걱정하고 효도란 무엇인가, 죄의식에 시달리고 장례식 준비하고 이별하면서 애면글면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같은 트랙에 올라선 시간이었어요. 부모를 보러 노심초사 병원과 요양원을 방문하는 나이 든 자식이 되어 아픈 엄마를 앞에 놓게 되었지요.
세상에선 부지런히 백세시대 장수 시대를 소리 높여 얘기하는데 속수무책, 엄마의 생로병사의 과정 중 마지막 ‘사’의 과정을 참혹하게 맞닥뜨렸어요. 엄마의 마지막을 목도하면서 매달리듯 그 과정의 하루하루를 썼어요. 처음에는 혼자 보기로 맺힌 것들을 풀어보다가 나중엔 칼럼으로 썼어요. 장수 시대의 지옥, 백세시대의 연옥 같은 그 풍경을. 부고를 수없이 받으면서 죽음의 방식, 죽음의 의미, 죽는 나이, 죽음의 장소, 케어의 방식이 정녕 많이 변했다는 것을 사무치게 깨달으면서. 무학의 한 여자, 90세의 내 엄마가 죽어가는 이야기가 나의 일, 남의 일을 떠나 내남없이 겪는 일이었으니까.
작년 1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셨으니 이제 1주기가 지났겠군요. 그간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의 죽음에 관해 생각이 달라지신 부분이 있을까요?
나이 들고 쓰러지고 부러지고 병들어 앓다가 의식도 없는 상태에서 고통받으면서 뜻대로 세상을 떠나지도 못하는 엄마를 보며 죽는 게 이렇게도 힘들다니. 가엾었어요. 엄마는 다정도 병이라 할 만큼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엄마를 부탁해』 속 엄마 같지는 않았어요. 못 배웠어도 엄마로선 못할 게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 동구 밖에서 목 빼고 자식을 기다리고, 애면글면 ‘정화수’ 떠 놓고 안녕을 기도하는 그런 존재는 아녔어요. 눈물로 할 말을 대신하는 힘없는 사람이었어요.
‘초년고생’을 한다는 사주를 보고 엄마 복이 없다며 미워한 적도 있었어요. 마지막 생의 과정을 힘들게 통과하는, 내 엄마이기 전 한 여자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꽤 많이 울었어요. 고아로 90년을 일만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편히 떠나지도 못하고 앓는 것이 참으로 복도 없다, 안타까웠어요. 남긴 것이라곤 요양원에서 입다 두고 간 옷가지 두어 박스. 그 옷들을 입고 1년을 살다 보니 엄마에게 가졌던 섭섭함과 미움이 얼마나 부질없게 느껴졌는지. 평생을 땅에 엎드려 살다가 간 사람이니 이 세상 가장 무해한 사람이었다는 따스한 인정을 하게 되었지만.
책 제목에서처럼 언젠가 부모가 돌아가실 걸 알고는 있지만, 막상 부모의 죽음이 처음 닥쳐오면 몹시 당황하고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자식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부모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존엄하고 아름답게’ 준비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부모의 죽음 앞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 자식이 있을까요. 공부하고 준비했던들, 사랑했던 사랑하지 않았던들 관계의 상실과 소멸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부모 세대 사람들도 몰랐을 거예요. 당신 자신이 그렇게 오래 살줄은, 긴 시간 누워 있게 될 줄은. 생명 연장의 의술이 이다지도 발달할 줄은, 죽고 싶어도 안 끊어지는 목숨을 연명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70세 사망법안, 가결』 이라는 책이 있어요. ‘70세 사망법안이 가결되었다’는 주제로 ‘이에 따라 이 나라 국적을 지닌 자는 누구나 70세가 되는 생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더불어 정부는 안락사 방법을 몇 종류 준비할 방침이다. 대상자가 그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한다.’는 이야기예요.
영화 <미드소마>에서는 72세가 된 사람은 축제의 첫날 죽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18년을 한 주기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살고 난 후 72세가 된 사람은 새 생명을 위해서 이름과 얼굴을 남겨주고 삶을 마감해야 해요. 일정 나이가 되면 기꺼이 죽어야 하는 규정이 인간의 존엄과 생명 순환의 방법으로 나오는 것이 일견 놀랍고 납득이 되기도 하니 서글퍼요. 노인은 정말 쓸모가 없을까. 건강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나. 오래 사는 게 사회악인가, 존엄하고 아름다운 죽음이란 게 과연 가능할까, 생각이 많아져요.
아직도 우리 사회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부모를 모시는 일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도 책에서 부모는 ‘버려진다’는 생각이 크고 자식들은 죄의식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어떻게 하면 서로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재 나이 들고 아프고 혼자 생활할 수 없는 몸으로 대책 없이 덜렁 남겨진 부모들에겐 어떻게 한들 상처가 되겠지요. 혼자 살게 한들, 모시고 산들, 요양원에 보낸들. 각자 자신의 집에서 24시간 전담케어를 자식에게 받으면서 생을 마감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나는 당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를 쓴 요양사님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노후를 보낼 요양원을 우리 스스로 감옥이라거나 어떤 나쁜 곳으로 규정지어서 한계를 짓기보다는 좀 더 사람이 살아가는 방, 집, 마을의 개념으로 다가가야 좋은 아이디어, 양질의 돌봄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부모 돌봄으로 고립되고 소외되어 가는 가족에게도 ‘장기요양보험 제도’를 이용하길 적극 권합니다. 데이케어센터나 재가 돌봄은 반나절만이라도 온전히 자신을 위해 운동이나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돌봄에 지치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일상생활을 유지하면 좋겠습니다.”라고 이은주 작가가 권하거든요. 어쩌면 우리들도 가야 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 실버타운 같은 시설들이, 남은 생을 도움을 받으면서도 개인의 자존과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바뀌어갔으면 좋겠고, 그런 시설들의 상태를 알리는 매체도 섬세하게 다루어줬으면 좋겠어요. 어르신들 마음이 불안하지 않게, 시설에서 사는 것이 나쁜 삶의 마감이지 않을 수 있게. 쫓겨 가거나 버림받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삶의 마지막 시간을 바꾸는 공간으로 내 스스로 들어간다는 마음이 될 수 있도록.
책을 읽다 보면, 어릴 적에는 막내딸로서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고 계셨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또 어느 시점부터는 애틋함이 공존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각각의 감정 변화에 어떤 계기가 있으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공간’의 변화에서 마음이 달라졌어요. 시골 작은 동네에서 같이 살던 어린 시절에는 넓고 푸른 땅이 주는 평화 속에서 그저 엄마와 딸로 자연처럼 잘 살았던 것 같아요. 평화롭던 관계는 ‘이동’을 하면서 달라졌어요. 도시로 나와 혼자 따로 살면서 보살핌의 손길이 닿지 않으니까 엄마는 미안해했고 나는 서운해하며 멀어져갔어요.
어느 자식인들 부모가 다 좋기만 할까요. 어느 부모인들 자식이 다 흡족할까요. 돌이켜보면 엄마와 막내딸인 제가 제일 성격이 닮은 것 같아요. 다정하고 눈물 많고 청승맞고 그런 것. 그래서 좋아했지만 그 이유로 밀쳐낸 것 같기도 해요. 엄마를 다소 냉랭하게 보게 된 까닭은 마지막으로 ‘관계’에서 왔어요. 내가 결혼하고 며느리가 되고부터, 내 엄마가 새언니(엄마의 며느리)에게 하는 많은 행동이 불합리하고 부당하게 보였어요. 아무리 착해도 누군가에겐 그저 시어머니가 된 실망스런 모습에 심정적으로 새언니 편에 서게 되면서 친정엄마라는 불변의 자리를 지운 것 같아요.
애틋함이야, 그 모든 시간들에, 그 모든 공간에서, 그 모든 관계의 변화 속에서도 지속된 감정이었어요. 낯선 이도 애틋하고 짠한데 열 달 품에 있다가 태를 찢고 나온 자식이니 아니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엄마라는 그 거푸집. 밀쳐낼 수도 다시 들어갈 수도 없는 텅 비고 딱딱한 그 존재의 소멸에 대해선 내가 죽는 날까지 애틋하리라고 생각해요.
작가님께서는 아직 우리나라에 ‘존엄사’나 ‘안락사’에 관한 논의가 시작도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논의들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좋을지 듣고 싶습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개인의 결정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로 등록할 수 있게 된 것이 2018년 2월이에요. 최근까지도 연명치료를 위한 심폐소생술 금지, 호흡기부착 거부, 투석, 영양제 투여 거부는 당사자도 보호자도 의사조차도 할 수 없었던 거죠.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선과 죽을 권리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생각들이 명확히 합의되지 않았으니 존엄사와 안락사까지 논의되려면 아직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요. 용어 자체도 확실하게 모르고요.
존엄사는 환자의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일로서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면서 죽을 수 있게 하는 행위이고, 안락사는 회생 가능성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의 요청에 따라 약물을 투입해 죽음을 맞게 하는 일이란 것을 저도 최근에야 알았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안락사는 동물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시행할 수 있어도 사람에게 해주면 불법이고요. “자신의 인생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지어야 한다”라며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안락사와 존엄사에 대한 생각들이 좀 더 진지하게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존엄하게, 아름답게, 주체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한 ‘존엄사’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화 <청원>, <씨 인사이드>, <미 비포 유>, <스틸 앨리스>, <타임 투 리브>,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아무르> 같은 것들이 있어요. 최근에는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 라는 책도 나왔고요.
끝으로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작가님 스스로도 죽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거 같아요. 작가님은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신지, 죽음을 맞기 전까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한 해에 두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1월에 엄마가, 11월에 시어머니가. 삶의 역사야 당연히 두 분이 다르고 애정의 크기나 삶의 진폭도 다르지만 두 분의 죽음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어요.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결정하는 모든 과정에서 한 분은(엄마) 전혀 아무것도 결정하거나 개입하지 못했고 한 분은(시어머니) 정확하게 미리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었어요. 죽음의 방식이 배우고 못 배운 것, 돈이 있고 없고의 문제, 준비한 사람과 무방비한 상태로 맞을 때 얼마나 크게 차이 나는지를 확연하게 보고 느꼈어요. 어디서 살 것인가, 병원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요양원은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연명치료는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장례식은 어디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나 자신을 케어할 돈은 어디에 어떻게 얼마를 남겨두어야 하는가.
할 수만 있다면 시어머니처럼 생의 마지막을 깔끔하고 풍족하게 맞고 싶지만, 내 엄마처럼 죽고 싶진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어찌 계획대로 될 수 있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여전해요. 할 말은 지금 다 한다, 사랑할 건 지금 다 사랑한다, 담담하게 잘 죽고 싶다가 나름 소원이 되었고요. 고맙게도 일단 욕심이 줄었어요. 물욕, 명예욕, 관계욕, 애정갈구 같은 것. 화가 나다가도 부질없이 느껴져서 화도 좀 줄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하루, 일단 하루만 잘 살자, 그것밖에.
* 권혁란
충북과 경기의 도계 산골에서 태어난 지 꽤 오래되었다. 시 쓰고 소설을 쓰려고 문학을 전공했으나 이름 뒤에 직업명으로 쓸 만큼 성공하진 않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서 오래 일하며 잡지와 책을 만들었다. 심장의 속도로 걸어온 천 일간의 치유 여행 『트래블 테라피』를 펴냈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엄마 없어서 슬펐니?』, 『나는 일하는 엄마다』를 썼다. 스리랑카에서 2년간 한국어교사로 일하며 살았던 덕에 EBS 세계테마기행 <인생찬가! 스리랑카> 편 큐레이터가 되었다. 남에게 나를 소개할 때 ‘하도 이리저리 여러 일을 해서 뭐라고 해야 할까’ 싶어 종종 우스운데, 앞으로도 뭐가 될지 전혀 몰라 더 재미있다. 평생 읽고, 쓰고, 보고, 노래하고 싶어 했던 엄마 대신, 무학의 엄마 대신 내가 읽고, 쓰고, 보고, 노래하고 있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권혁란 저 | 한겨레출판
무의미한 고통에 시달리다 느리게 죽어간 엄마의 날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온몸은 보랏빛 반점으로 뒤덮이고 깡마른 뼈와 피부 사이의 한 점 경계 없는 몸으로, 제 발로, 제 손으로 용변조차 볼 수 없어 도우미의 손을 빌려야 했던 엄마의 모습을 진솔하게 써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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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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