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보이지만 아무도 볼 수 없는 맨 끝줄에서 - 연극 <맨 끝줄 소년>
모두 관망하기를 선택하면서 클라우디오의 이야기는 점점 위험해진다
맨 끝줄에서 존재감 없이 앉아 있던 소년 클라우디오는 지난 주말에 한 일을 글로 쓰기 시작한다. (2019. 11. 06)
문학 교사 헤르만은 아이들의 작문 실력을 보며 절망한다. 지난 주말에 한 일에 관해 쓰라고 했더니 “토요일에는 TV를 봤다. 일요일에는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가 전부인 아이들과 또 1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신경질적으로 작문 숙제를 넘기고 있는 헤르만 뒤로 후아나가 들어선다. 후아나는 현대미술 갤러리의 큐레이터이자 헤르만의 아내다. 지난해에도 똑같은 한탄을 했다는 후아나의 면박에도 불구하고 올해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며 절망하던 헤르만에게 제법 잘 쓴 작문 숙제 한 편이 눈에 들어온다.
클라우디오가 쓰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클라우디오는 같은 반 친구인 라파의 집에 간다. 라파의 집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 클라우디오가 라파의 집에 간 것은 계획적이었다. 라파와 라파의 가족, 그 집이 궁금했다. 클라우디오는 라파에게 수학 공부를 도와줄 테니 철학 공부를 도와달라고 제안한다.
라파는 함께 공부하기 위해 클라우디오를 집으로 초대한다. 클라우디오는 라파의 방을 관찰한 후 방 밖으로 나온다. 거실을 둘러보다 ‘중산층 여자의 향기’를 맡는다. 향기가 나는 곳에는 라파의 엄마가 있다. 소파와 같은 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 부엌에서 그가 건네준 콜라를 들고 클라우디오는 다시 라파의 방으로 돌아온다. 클라우디오는 꽤 오랫동안 라파의 수학 공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끝에는 마침표와 함께 ‘계속’이라는 글자가 딸려 있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작문 숙제에 7점을 준다. 후아나는 헤르만의 글이 불쾌하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 몰입해 글을 읽었고, 후아나는 관찰당하는 가족과 라파의 엄마 입장에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헤르만은 ‘교장에게 가지고 가거나 부모와 상담이 필요하다’는 후아나의 이야기에 충고하려고 시늉한다. 그러나 이미 헤르만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클라우디오의 표현과 관찰력, 이야기를 이끄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헤르만에게 라파 가족은 등장인물일 뿐이다. 클라우디오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도, 라파의 가족이 알게 된다면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것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의 이야기 맨 끝줄에 앉기를 선택한 것이다. 연극에서 맨 끝줄은 교실에서 늘 클라우디오가 앉는 자리이자 ‘거기 앉으면 모든 것이 보이지만,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는 곳’으로 표현된다.
맨 끝줄에서 이야기의 중심으로
연극 <맨 끝줄 소년> 은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극작가인 후안 마요르가의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초연되었고, 2017년에 이어 세 번째 상연이다. 후안 마요르가는 한국어로 번역된 희곡집 『맨 끝줄 소년』 의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말에 “이 작품은 중ㆍ고등학교 교육 현장에 있었던 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밝힌다. 마드리드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중 한 학생이 시험지에 ‘공부를 하지 않아서 문제를 풀 수 없었지만, 테니스를 잘 쳐서 대회에 나갈 것이며,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쓴 것을 모티프로 했다. 시험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무대는 학교와 집을 배경으로 한다. 네 개의 책상과 녹색 스탠드가 공간을 분리한다. 딸깍 스탠드 조명을 끄면 무대 위에서 책상 위로 빛이 떨어진다. 그곳은 교실이거나 헤르만, 라파의 집이 된다. 무대 위 조명이 사라지면 스탠드 조명이 켜진다.
무대 음악은 두 명의 코러스가 담당한다. 배우들의 목소리로 내는 음악은 무대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극적인 순간에 숨소리나 혀 차는 소리 등 구음으로 발화되는 리듬은 무대를 보며 느껴지는 기이한 감정과 묘하게 뒤섞인다.
클라우디오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 역시 맨 끝줄에 앉게 된다.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계속 듣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우디오가 ‘그럴듯하면서도 놀라운 결말’을 위해 색다른 선택을 했을 때 헤르만을 비롯한 모두가 맨 끝줄이 아닌 이야기의 중심으로 들어와 버린다.
이야기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그동안 보고 듣고 소비했던 수많은 예술 작품과 사람들,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욕망과 편안히 앉아 관망하던 것들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게 된다.
연극 <맨 끝줄 소년> 은 12월 1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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