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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2-10] 47화 : 고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마터 2-10』 연재
일제 경찰의 간부들은 사이토 총독 이전의 헌병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보통경찰제가 된 이후에도 조선인 체포자에 대한 고문과 악형은 그대로 되물림 되었다. (2019. 09. 18)
팥은 첫줄에만 넣고 둘째 줄은 건너 뛰어 셋째 줄에 또 넣는다. 팥 넣기가 끝나면 둘째 줄의 익은 절반 빵을 쇠꼬챙이로 찍어내어 첫째 줄의 팥소 넣은 절반 빵 위에 뚜껑처럼 씌운다. 이렇게 차례로 하는데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시간 간격을 잘 맞추는지 마지막 것을 다 씌우고 나면 다시 첫 번째 것으로 돌아가 온전한 하나의 국화빵을 차례로 찍어내어 쟁반에 던진다.
최달영과 세 사람의 순사 보조로 이루어진 야마시타 정탐조는 양평동 사거리 입구에 벌인 국화빵 노점을 근거로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여공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노점으로 찾아와서 빵틀 앞에 서서 국화빵을 사먹거나 방금 빵틀에서 구워져 나오는 것을 한 봉지씩 사들고 숙소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재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여공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듣는 것이 밀정들의 일차적인 임무였다. 간혹 중요하다고 생각되면 노점의 조력꾼처럼 대기하던 보조가 그녀들의 뒤를 미행하여 숙소를 알아내고 밤늦게 그녀들의 방 창문가로 찾아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 소리를 엿듣기도 했다.
그들은 독서회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독서회 구성원들을 내사하여 어느 공장의 무슨 직급인가도 알아내고 제사공장을 중심으로 독서회가 적어도 셋은 된다고 탐문해 냈다. 한 달 만에 야마시타 정탐조는 최초에 찾아냈던 독서회에 집중하면 그들에 연결된 다른 모임들은 수사에 의하여 적발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영등포 경찰서 고등계의 마쓰다 경부는 다시 최달영의 직속상관으로 진급하여 순사장이 된 모리를 반장으로 하여 제사공장 여공들의 독서회를 검거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잠복근무 기간에 독서회 모임이 있는 장소와 요일 시간 등을 파악해 놓고 있었다. 토요일 저녁 일곱 시경에 그들이 모이는 양평동의 한 가정집을 노리고 모리 최달영 세 사람의 순사보조가 각자 자리를 잡았다.
제사공장 독서회는 이일철의 선과는 다른 조직이었는데 김형신이 국내에 들어와서 문건과 격문 기관지 등을 살포하고 그것을 기초로 급조했던 공장 조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이일철 등의 방적공장 파업 당시에 우연히 중복되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조영춘 방우창 등과 연결이 있던 국제선의 다른 조직들이 벌인 세포 조직이었다. 독서회는 아직 중심에 닿는 오르그가 아니라 하부 세포인 야체이카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직이 방만하고 느슨하게 되어 있다면 그야말로 감자 캐기처럼 줄기를 잡아당기면 줄줄이 땅 속의 열매들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정탐들은 각자 떨어져서 그 집 골목으로 들어섰고 모리는 골목 입구에 누군가 기다리는 것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시계를 보며 서있고 보조 한 사람은 골목의 뒤로 돌아가 이웃집 담장 앞을 지켰다. 누군가 탈출하여 그 담을 넘어올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최달영이 길가로 난 창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여 들으니 누군가가 무엇을 읽는 듯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한 사람이 읽고 방안의 사람들은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달영이 턱짓을 하자 보조는 대문 앞으로 다가섰다. 최달영과 다른 보조는 대문 양 옆으로 비켜 서있고 보조원이 대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낭독 소리가 끊기고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여자 목소리가 물어왔다.
“누구세요?”
“전보 왔습니다.”
다시 조용하더니 대문 앞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빗장을 빼고 대문이 조금 열리는 순간 그들은 와락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모리는 어느 틈에 대문 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최달영과 두 사람의 보조 세 사람이 일시에 문간방의 미닫이를 열고 신발 신은 채로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방안에는 모두 여섯 명의 여공들이 있었는데 첫눈에 살펴보기로는 문간의 미닫이 문 외에는 길가로 난 작은 창문이 유일한 것이어서 탈출구는 없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안채 마당으로 들어가 집 뒤편의 이웃집과 사이에 있는 담장을 넘어 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그야말로 독 안의 쥐가 되어 일망타진 되었던 것이다. 방안에 숨길 데도 없는지라 그들이 갖고 있던 문건과 책들은 압수 되었고 모두에게 수갑을 채우고 포승으로 연달아 결박했다. 모리가 안채로 들어가 집 주인을 찾으니 오십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벌벌 떨면서 사정을 했다.
“우리네야 다른 집처럼 여공들에게 월세 방 빌려준 죄밖에 없습니다요.”
“불온분자에게 방을 빌려 주었으니 조사를 받아야 한다.”
집 주인까지 수갑을 채워서 일곱 명을 본서로 연행하는데 지원차량이 삼십 분 전에 와서 대기하고 있었으므로 두 차에 나누어 태우고 모리와 최달영이 동승했다. 보조 세 사람은 또 다른 불온문서를 숨긴 것이 없나 하여 안채까지 샅샅이 뒤졌다. 일제 경찰의 간부들은 사이토 총독 이전의 헌병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보통경찰제가 된 이후에도 조선인 체포자에 대한 고문과 악형은 그대로 되물림 되었다. 헌병이 현장에서 체포한 조선인에 대하여 재판이나 죄의 경중을 묻지 않고 태형에서부터 즉결 처형에 이르기까지 무법적 악행을 벌린 전통은 경찰제 이후에도 여전했고, 치안유지법이 선포된 다음에는 기소 이후에도 재판 중에 피고가 자백을 번복하거나 혐의 사실이 고문에 의하여 강제로 조서가 작성된 사실로 이의를 제기하면 다시 고문실로 데려다 악형을 가할 정도로 재판이나 사법정의란 애초부터 허울 좋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또한 치안유지법은 독립운동을 하던 피고의 최종 형량이 선고되어 복역을 마치고 나서도 치안유지를 위해서라는 구실로 구속을 연장하여 보호유치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경찰은 활동가나 불령선인을 체포하면 그 첫 날 이십사 시간이 가장 중요하고 급박한 시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개 검거자가 하루만 버티면 그의 동지들이 혐의 물증을 없애거나 도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연행되어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고문이 시작되는 것은 그 까닭이었다. 혐의가 위중할수록 고문은 급박하고 야만적이었으며 정보를 캐기 위해서만 목숨을 살려둘 뿐 고문후유증으로 불구가 되거나 옥사를 하게 되어도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더구나 사회주의 계열에 대한 처사는 ‘죽여도 좋다’는 처분이 대부분이어서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말이 오랜 수사관행이 되었다. 일본인은 주로 보고 받는 위치에 있었고 대개 피검자가 거물일 경우에만 몸소 나섰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문실 현장의 담당은 조선인 순사나 순사보조들이 자행했다. 그들은 같은 조선인으로 피고문자의 감정의 결을 잘 이해했고 그들의 내면을 파악하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말도 어해 다르고 아해 다르다는 조선어의 미묘한 차이도 같은 조선인이라야 분간할 수가 있었던 탓이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의 적이 되게 만드는 것은 일본으로서는 역으로 이로운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의 소단위 독서회 회원들이 연행되어 오자 경찰서 안은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먹이를 사냥해온 야수들의 소굴처럼 흥겨운 잔치판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여성이 잡혀오면 제일 먼저 옷을 발가벗겨 버렸다. 남성의 경우에도 옷을 벗기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여성으로서는 벌거벗은 몸 자체가 견딜 수 없는 수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악형을 각오할 정신력이 없다면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고문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여러 놈이 둘러서서 몽둥이로 정신 없이 두들겨 패는 것, 납덩이 달린 채찍으로 발가벗긴 몸을 때리는 것, 각목을 무릎 안쪽에 끼우고 꿇어앉힌 채 위에서 허벅지를 밟는 것, 팔과 다리를 뒤로 돌려서 봉에 묶어 매달고 때리거나 장시간 방치하는 통닭구이, 책상과 책상 사이에 묶은 몸을 걸치고 위에서 누르거나 때리는 한강철교, 고춧가루 탄 물을 주전자에 넣어 거꾸로 매단 자의 코에 들이붓는 매운탕, 의자에 묶어 뒤로 젖히고 얼굴에는 젖은 헝겊조각을 덮고 물을 들이붓는 물귀신, 손톱 밑에 대나무 침을 박아 넣기, 전극이나 몽둥이를 남녀 성기에 넣기, 인두로 지지기, 활동가들의 회고록에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고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가장 가벼운 고문 정도가 수동전화기의 전선을 물 뿌린 젖은 손가락에 감은 다음 발전 손잡이를 돌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문은 나라가 해방 된 뒤에도 정적들에게 수십 년 동안 자행되던 일제의 유산이었다.
그들이 캐려는 것은 우선 누구의 권유나 지시로 독서회 모임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며, 문건을 누구에게서 받았는가, 공장 내부 또는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의 연루 관계, 등이 가장 급히 알아내야 할 사항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유치되고 고문 받고 조사 받는다. 이른바 입 맞추기를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이다. 모임 안에는 어쨌든 주동자가 있기 마련이었다. 독서회 회원들도 그런 정도는 준비되어 있어서 주동자는 금방 취조의 초입에서 드러났다. 그에게 문초가 집중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입을 열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분리된 채로 사실 확인을 받는 문초를 당한다. 그는 이 문건을 누군가에게서 전해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전달만 하고 사라졌다가 예고 없이 공장을 찾아오곤 하여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성은 김이박 이름은 아무개이다. 어쨌든 그것도 가명일 것이다. 활동가가 자기의 거처와 이름을 곧이곧대로 대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니까.
회원들 누군가에게서 새로운 사실이 나온다. 그는 약해졌고 겁에 질려 무너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기는 그녀가 문건을 받아와서 독회를 가졌던 날 무심코 해주었던 말을 기억한다. 국제당의 선에서 전해준 문건이라고 그랬다. 다시 심한 고문이 시작된다. 국제당이라는 건 무슨 의미냐. 사실 경찰 측도 상해에서 발행하고 조선 전국에 우송된 ‘코뮤니스트’ 팸플릿을 파악하고 있던 차였다. 문건을 전해 준 사람이 국제당에서 보내왔다고 말했을 뿐 그 사람을 만나야 내막을 알게 될 것이라고 독서회의 주동자는 말한다. 고문은 이틀 동안 계속 되었고 세 사람이 기절하였지만 수사는 진전되지 않았다. 다만 공장 안의 일반 여공들 중에 이들이 포섭하려던 자들이 몇 명 있어서 그들에게 격문 몇 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이웃공장의 독서회 회원 이름이 나와서 경찰들은 바삐 나가 그들을 하나 둘씩 검거해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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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 「삼포 가는 길」 『무기의 그늘』 『장길산』… 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역사가 그려지는 한국의 대표 작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나 4.19와 5.18, 방북과 망명, 수감을 거쳐 한국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시대의 증인이다. 2000년대 이후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 『낯익은 세상』 『여울물 소리』 『해질 무렵』 등과 자전 『수인』을 잇달아 펴내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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