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존재하는 '감정의 틈'을 마주해본 적 있나요?
『저녁에 당신에게』 김미라 저자 인터뷰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조금 다르게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음을 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저녁에 당신에게_ⓒ 이민경
밝은 어두움과 어두운 밝음이 교차하는 시간, 아름다운 착각의 시간이자 또 다른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 『저녁에 당신에게』는 불꽃처럼 사라져버리는 그 매일 저녁의 특별함을 차곡차곡 쌓아 보여주는 책이다. 세상의 일들에 양보하느라 잠시 소홀했던 나에게 미처 묻지 못했던 질문들, 건네고 싶었던 안부, 꼭 들려주고 싶었던 말들이 하나둘 떠오르게 한다.
『저녁에 당신에게』의 저자 김미라 작가는 늘 사람들을 관찰하며 사람들이 머물렀던 공감에 남은 여운을 수집하고, 그것을 매일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이다. 시간을 들여야 이루어지는 일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오랜 시간을 한결같이 라디오 방송작가로 살았다. 심야방송의 대명사 <별이 빛나는 밤에>로 시작해서 KBS 클래식 FM의 <노래의 날개 위에>, <당신의 밤과 음악>의 원고를 썼고, 현재 <세상의 모든 음악>을 집필 중이다.
글쓴이 소개에는 ‘매일 글 쓰는 사람’으로 소개되어 있는데요. 라디오 대본용 원고를 일기 쓰듯이 매일 쓰시는 건가요? ‘라디오 작가’라는 말 대신 이렇게 본인을 소개하신 이유가 있나요?
예전에 잡지 연재를 할 때, 편집장이었던 ㅇ시인이 물었어요. 어떻게 매일 적지 않은 분량의 방송 원고를 써낼 수 있느냐고. ‘매일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매일 글 쓰는 일의 의미를 자주 마음에 새겼습니다. 사실 매일 하는 일이 가장 강하고 무서운 일이죠. 매일 나눔을 생각하는 사람과 매일 화를 내는 사람의 삶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라디오 프로그램 원고를 쓰는 일은 매일 밥상을 차리는 일 같아서 소박하게, 오래, 균일한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파티용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매일 차리는 건강하고 정갈한 밥상이 필요한 거죠. 소림사의 제자가 매일 물 긷고 청소하듯 매일 씁니다. 매일 쓰면서 좌절도 하고, 매일 쓰면서 조금씩 나아졌기 때문에 ‘매일 글 쓰는 사람’이라고 저를 소개했습니다.
도서 『저녁에 당신에게』는 라디오 방송 <세상의 모든 음악> 속 같은 이름의 코너의 원고를 모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계기에서 만들어진 코너인지 설명 부탁드려요.
라디오 방송원고를 쓰는 건 마치 카운슬러가 되는 일과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자격증 있는 카운슬러가 되어보지 않았으니 정확한 과정은 모르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살피는 일이라는 건 공통점이 아닐까 싶어요. 같은 시간에 귀 기울여주시는 수많은 청취자들의 공통점은 ‘사람, 그리고 음악’이겠죠. 저는 ‘사람’의 영역을 원고로 전한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뉴스’와는 정반대되는 지점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전혀 새롭지 않은 사람 이야기, 그러나 우리가 조금씩 놓치고 있던 무언가가 담긴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조금 다르게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 마음을 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코너에 소개된 많은 원고 중 어떤 기준으로 글을 선별했나요?
2년 동안 방송되었던 원고 중에서 청취자들의 호응이 많았던 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글을 우선 선택했습니다. 원고를 취합해보니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최초의 상처도 가족으로부터 나오고, 최후의 안식도 가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가족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야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족 이야기 중에 상당 분량을 덜어냈습니다. 책에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담고 싶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예의’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긴 가족 이야기든 연애 이야기든 모두 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겠지만 말이죠.
작가님께 ‘저녁’이라는 시간은 굉장히 특별한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저녁 시간은 어떤 의미인가요? 하루 중 특별히 좋아하는 시간대가 있으신지, 그리고 글은 주로 언제 쓰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녁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하죠. 칼릴 지브란의 ‘그대, 황혼이면 돌아오듯이’라는 문장처럼 저녁은 돌아오는 시간, 반성의 시간이고, 몽매에서 깨어나는 시간이고, 아름다운 착각의 시간이고, 또 다른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며, 불꽃놀이 같은 시간이죠. 매일 ‘환절기 같은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똑같은 음악도, 똑같은 이야기도 저녁에 들으면 다르게 다가옵니다. 저녁에 존재하는 바로 그 ‘감정의 틈’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도 저녁이죠. 밝은 어두움과 어두운 밝음이 교차하는 시간.
글은 주로 오전에 쓰지만, 매일 쓰는 원고의 자료를 챙기는 과정이 길기 때문에 언제 쓴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퇴근이 없는 직업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늘 쓸 원고를 놓는 순간 내일 원고를 고민해야 하니까요. 녹음 일정이 있을 때에는 시간을 가리지 않고 씁니다. 방송 원고는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에 맞춰 쓰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아무리 잘 쓴 원고라도 방송 시간이 지난 뒤에 도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수요에 맞춰 글 쓰는 시간을 조정합니다.
매일 글을 쓰시려면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도 있을 것 같은데요, 보통 대본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시나요?
역시 사람이죠. 제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관찰력이 필요한 직업이죠. 예전에 제가 쓴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 『세상에 빛나지 않는 별은 없어』에 ‘여운을 수집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저도 사람들이 머물렀던 공간에 남는 여운을 수집합니다. 물론 책과 영화와 여행과 일상이 제게는 온통 도서관이자 아카이브죠. 저 혼자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청취자들에게로 다가가서 공감을 이끌어내야 하는 방송 원고를 쓰는 일이니까요. 그 밖에도 가끔 다양한 인물들의 인터뷰 기사를 챙겨봅니다. 인터뷰 기사에 담긴 사람 이야기가 소설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때가 있거든요.
책 속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꼭 주변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내용이라 읽으면서 더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글의 에피소드 중에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신 것도 있으신가요? 일기처럼 매일 기록을 남기시는 편인가요?
실제 경험이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제 주변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죠. 실화인데도 너무 작위적으로 들릴까봐 고민되었던 글도 있었습니다. 우리 주변엔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죠. 조금씩 상황이나 인물을 수정하긴 했지만 책 속에는 제 딸과 아들의 이야기, 고마운 이웃들 이야기, 제 마음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매일 기록을 남기지는 않습니다. 매일 원고 쓰는 일만으로도 버겁죠. 하지만 길을 가다가, 음악을 듣다가, 영화를 보다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나가, 차를 타고 가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번개처럼 메모하고 기록합니다.
‘저녁에 당신에게’를 앞으로도 라디오에서 계속 만날 수 있을까요? 앞으로의 계획과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할 수 있는 한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은 ‘저녁에 당신에게’는 시작된 지 6개월 만에 그만둘 뻔했던 코너였습니다. 더 이상 쓸 이야기가 없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함께하는 스태프들이 용기를 주었고, 간간히 보내주시는 청취자들의 지지가 저를 다시 힘내게 했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어느 작가가 ‘오후의 진통제’라는 응원을 보내줬을 때에도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사람들을 자세히 바라보면서,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럴 만한 사정’을 헤아리면서 그 순간을 넘겼습니다. 앞으로도 또 그런 순간이 오겠지만 잘 넘어가야죠. 하지만 방송에선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이 책을 쓰기 전에는 ‘작가’로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들 무렵에는 ‘나는 ‘방송작가다’라는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와 방송작가의 차이를 명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어쩐지 초심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고, 제가 설 지점을 명확히 한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든 운동의 기본이 힘 빼는 일이라는데, 이번 책이야말로 쓸데없이 힘주지 않고 편안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독자들께는 무조건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죠. 서점의 그 많은 서가를 채우고 있는 책 중에 이 책을 선택해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선택해주신 책인데 무엇이든 작은 씨앗 하나 독자들의 마음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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