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 박맹호 회장이 남긴 책 자취
고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한국 출판에 남긴 역사 다시 만나서 책을 이야기할 때까지
“내가 출판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출판에 불황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인간은 책 없이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야말로 사람들은 책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어."
고 박맹호 민음사 회장
당신과 함께한 세월이 스물두 해, 오랜 지병에 예정된 부고였는데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 탓인지, 할 말이 아직 목을 잘 넘지 못하네요. 마음의 등불이 꺼진 것 같은 막막한 어둠에 감싸여 있을 뿐입니다. 반딧불이처럼 드문드문 당신이 남긴 말들이 반짝거릴 뿐이네요.
소질에 맞는 일을 찾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업적을 쌓는 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당신은 ‘출판의 신’과 같았죠. 당신이 책을 만드는 일은 누에가 실을 뽑아 비단을 잣는 일과 별 다를 게 없었어요. 모든 게 더없이 자연스러운데, 결과는 눈부신 경우가 아주 많았죠. 젊은 날 당신이 위대한 작품을 쓰는 작가가 되는 대신에 위대한 작품과 작가를 발굴하는 출판인이 되기로 한 것은 한국출판의 역사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요.
당신은 작가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흥미로운 대목이 나오면 불쑥 말을 꺼내곤 했죠. “그거 참 재밌네요. 한 번 해 보세요.” 편집자들과도 별 다르지 않았죠. 당신과 일하는 동안 기획서 같은 것을 쓴 적이 없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언제나 방으로 찾아가거나 자주 있었던 식사 자리에서 기회를 잡아 말하면 되었죠. “이런 책을 내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당신은 흔쾌히 이렇게 이야기해 주셨죠. “그 책 새로운 거야. 그러면 한 번 해 봐.” 어쩌면 당신 머릿속에는 책들의 하늘지도가 들어 있어서, 장차 별이 될 책들로 채워지기를 항상 기다리는 듯이 보였죠.
사람은 배움에서 씨앗을 이루고, 활동에서 자기를 이루는 법입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사람들이 자주 겪듯, 당신과 함께 편집자로 일하는 것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죠. 편집이란 이토록 힘차고 아름다운 일이로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죠. 당신은 작은 성취에 안락해하는 편집자를 독려하고, 실의에 빠진 편집자를 부지런히 격려했죠. 파우스트는 이 지상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말했는데, 당신은 과연 그 화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때때로 회사가 성장의 어려움에 주춤거리고, 모두가 불황을 핑계 삼을 때 당신은 단호히 말했죠.
“내가 출판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출판에 불황이 아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인간은 책 없이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야말로 사람들은 책의 도움을 절실히 바라고 있어. 그러니 과감하게 새로운 작가를 찾아 새로운 책을 기획하게. 자금이 부족하면, 내가 사재를 털어서라도 마련해 놓을 테니.”
1966년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당신은 단 한 차례도 멈추지 않고 책의 전위를 향해 움직였죠. 당신이 기획하고 출판한 민음사의 책들은, 근대화와 함께 시대의 주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민들의 지적 토대를 이룩해 주었습니다. 한국경제의 발전 과정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지식과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높아진 생활수준에 걸맞게 문화적 세련에 대한 갈증이 부풀어 오를 때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죠. 세계시인선, 오늘의시인총서, 오늘의작가총서, 이데아총서, 대우학술총서, 김수영문학상, 오늘의작가상 등 당신이 만들어낸 수많은 책들은 그대로 한국의 교양을 구축했고, 우리의 정신에 질적인 깊이를 마련해주었죠.
당신이 편집에 과감하게 가로쓰기를 도입하기 전에는 세로쓰기로 본문을 조판하는 일이 아주 흔했죠. 세계시인선을 세상에 내놓을 때 당신이 가로쓰기를 시도하고, 이 시집이 세상에 널리 퍼지면서, 비로소 단행본 출판의 역사에 한 분기점이 생겨났습니다. 한국출판이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옮겨간 일은 단지 본문 편집의 변화만을 뜻하는 게 아니죠. 이전까지 일본을 통해서 세계와 접촉했던 한국 출판의 한 시대가, 즉 일본어를 통한 이중번역으로 출판의 질을 담보하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해방 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되어 온 한국사회의 지적 역량이 폭발한 일대의 문화적 사건에 해당합니다.
세계시인선의 본문은 원래 시가 왼쪽 면에, 한국어 번역이 오른쪽 면에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습니다. 이 대면 편집은 이제 개화기 이래로 지속되어 온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우리 눈으로 직접 세계를 보겠다는 중대한 선언인 셈입니다. 민음사 편집자들이 지금까지 몇 차례 세계시인선을 개정해 출판하면서도 대면 편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이러한 문화적 상징의 무거움을 존중하고, 앞으로도 이 일을 잊지 않고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그에 걸맞은 일을 계속해 갈 것이라는 다짐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편집자는 편집으로 말하는 법이니까요.
“인간은 책으로 이루어진다. 책은 인간의 유전자에 해당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시대든 반 발짝만 앞서나가면서 시대를 선도하는 좋은 책을 출판하면 독자들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당신은 항상 이야기했죠. 제가 입사한 1993년 무렵, 책의 세계는 거대 담론 중심의 인문사회과학 시대는 저물고, 여가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일상의 의미를 발굴하고 문화의 다양성이 폭발하며 세계화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당신은 기민하게 시대를 감지한 후, 편집부에 세계문학전집을 기획하도록 주문했습니다. 여행자유화로 인해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고, 인터넷이 막 도입되어 전 세계 정보를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된 직후였죠. 한국과 세계를 갈라놓았던 장벽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세계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새로운 높이의 교양을 갖추는 것이 시급할 때였습니다. 그 후에 연이어서 어린이책의 ‘비룡소’, 장르픽션의 ‘황금가지’, 과학책의 ‘사이언스북스’ 등이 반 발짝 빠르게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모두 각 분야에서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브랜드 중 하나로 자랐죠.
“표지 좀 가져와 봐.” 당신이 가장 열렬하게 챙겼던 것은 언제나 책의 장정이었습니다. 주간 체제가 도입되어 편집 전체를 책임지고 맡긴 후에는 사전에 무슨 책을 내고 말지는 자잘하게 따지지 않았으나, 어떤 책이든 장정만큼은 언제나 아주 세밀하게 챙겼습니다.
당신은 말했죠. “서점에 가면 허접스러운 책 모양새가 거슬렸어. 언젠가는 이를 혁신하고 한국의 책을 명품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었지.” 이 때문에 당신은 항상 북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정병규 선생을 편집자의 길에서 디자이너의 길로 인도하고, 꾸준히 일을 맡겨 우리나라 북 디자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도 당신의 중요한 업적입니다. 당신 덕분에 민음사의 책들은 시대를 앞서가는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독자들 눈에 책이 하나의 예술품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하자는 의식을 당신이 한국출판에 만들어냈습니다. 정보화 시대가 깊어지면서 책의 물성은 더욱 소중해지고 있습니다. 정말 이를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네요.
오늘날 한국출판의 많은 지점이 당신에게 빚지고 있습니다. 책에 대해서라면 당신이 평생 한 순간도 치열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저승에도 출판이 있다면, 아마 당신은 거기에서도 분명히 작가를 발굴해 책을 만들고 계실 겁니다. 다시 만나서 책을 이야기할 때까지 오로지 영면하소서.
민음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시작해 민음사 대표를 지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한국문학번역원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박맹호> 저16,200원(10% + 5%)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문학과 인문학 출판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 낸 박맹호 회장이 '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답을 적은 책이다. 1966년 첫 책 『요가』를 펴내면서 시작해 지금까지 5000종이 넘는 양서를 출판한 그의 인생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