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 “시인의 집을 향한 여행, 결국 나를 찾아 떠난 길”
『시인의 집』 출간 기념 가을 낭독회 시時 원하는 밤
지난 9월 10일 저녁, 상수동에 위치한 이리카페에서 책 『시인의 집』 출간을 기념해 낭독회가 열렸다. ‘시時 원하는 밤’이라는 이름으로 꾸며진 이번 낭독회는 선선해진 가을 날씨와 잘 어우러져 독자들의 감수성을 한껏 불러일으켰다.
문학평론가이자 작가인 정여울의 사회로 낭독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시인의 집』은 평생 독일문학을 연구해온 저자 전영애가 그 동안 시인들의 흔적을 찾아 떠났던 날들을 기록한 책이다. 정여울은 먼저 전영애 교수에게 이번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책이 나오기까지
정여울: 이 책이 나오는데 거의 10년 정도 걸렸다고 들었어요.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전영애: 쓰기 시작한 건 10년이 넘었지만, 오래 썼다기보다 제 망설임이 커서 늦게 나오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저는 문단에서 활동도 하지 않았고, 여러 가지로 책이 상품이 된 시대에 적응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그게 아마 가장 큰 원인일 거예요. 제가 올해에는 학문적인 글이나 시 모두 독일어로만 썼어요. 아무래도 한글로 쓰는 경우는 문단이나 출판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염려가 되었고, 독일어로는 제가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동안 독일어로만 글을 쓰다가, 이제 다시 제 언어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이번 책은 그런 결과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여울: 그런 과정을 들으니까 독자로서 책에 대해 더 애정이 생기는 것 같은데요. 이번 책을 읽으면서 시인이나 작가의 집을 찾아가는 여행에는 쉬운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대부분 후미진 곳이거나 교통이 불편하니까요. 많은 작가들은 살면서 여행도 많이 하고, 태어난 곳과 죽은 곳이 다른 경우가 많잖아요. 이렇게 작가를 찾아가는 여행은 쉽지만은 않지만 갔다 오면 굉장히 많은 것들을 얻고 돌아오는 것 같아요.
전영애: 저는 지금 말씀하신 어려운 길과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있었어요. 찾아가는 길이 어려워서 신체적으로 고생을 한 건 없지만, 제가 들고 갔던 질문의 무게가 커서 스스로 답을 내려야만 하는 부담이 컸어요.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 이틀이 된 날도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하루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으로 유럽을 왔다 갔다 할 만큼 절박했으니까요. 시를 찾아갔던 것이지만 동시에 저를 찾아간 길이기도 했습니다.
정여울: 선생님이 굉장히 많은 일을 하고 계셔서 시인으로서의 삶은 조명이 덜 된 것 같아요. 학자로서의 길과 시인으로서의 길을 동시에 걸으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전영애: 간단히 말씀 드리면, 저는 공부할 때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독학에 가깝게 공부했기 때문에 제가 언젠가 대학에서 가르치리라고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제 삶이 많이 황량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나 못 배웠기 때문에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도둑질하듯이 공부했어요. 상황이 안 따라줬기 때문에 제가 줄일 수 있는 건 저의 안락함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공부도 해야 했고, 학생들도 너무 귀한 보석 같았고, 그래서 제 글을 들고 왔다 갔다 할 틈도 염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글을 썼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지탱이 된 것 같습니다.
정여울: 저도 평소 글이 없다면 과연 나라는 사람은 뭘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주변 사람들이 왜 이렇게 계속 글을 쓰면서 여행을 다니냐고 묻는데 글을 쓰지 않으면 여행을 하는 이유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여행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언어의 힘, 그리고 시의 힘
평소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에 부담을 느꼈다고 전한 전 교수는, 글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그 누구보다 감사해하는 사람이었다. 책이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이어서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 속 프롤로그 부분을 낭독했다. 그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온 에스토니아 문인의 집 이야기는, 듣는 사람들까지 함께 그곳에 방문한 것만 같은 기분에 젖어 들게 했다.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은 마담 몽튀페가 불쑥 “나의 탈린!”이라고 말한다. 내가 얼른 대꾸한다. “저의 탈린이기도 한데요.” 이런 말들이 저절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공항에 마중을 나와주고 한나절 시내 구경을 시켜준 플롬 교수 덕분이다. (중략) 다른 거리 쪽으로 난 문을 나서며 나는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바로 나의 ‘부동산’이 있는 거리가 아닌가! 내가 하룻밤을 묵은 집은 바로 ‘에스토니아 문인의 집’이었던 것이다. 놀라서 다시 뛰어들어간 나는 사무원에게 얀 크로스의 책을 사들고 온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얀 크로스도 이 집에 살고 있는데요”라고 그가 대답했다! (『시인의 집』 23~24쪽)
이날 낭독회에서 전영애 교수는 한국어 낭독과 함께 유창한 독일어로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흔히 강하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독일어가 전 교수의 입을 통해 나오니 너무나도 부드럽게 들렸다. 정여울은 “언어의 힘이 이런 것 같아요. 그 언어를 몰라도 울림이 좋다는 것은 느낄 수 있잖아요. 텍스트를 둘러싼 수많은 맥락, 사연들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어는 수많은 표정, 몸짓, 목소리를 다 실어 나르는 것 같아요.”라며 낭독 후 소감을 밝혔다. 평소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언어를 알면 세계가 하나 열린다고 이야기한다는 전 교수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일화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번은 이탈리아 토리노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이탈리아 청중 앞에서 독일문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버거워서 강연이 끝나고 굉장히 지친 상태로 강가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할아버지가 와서 자꾸 말을 거는 거예요. 저는 너무 피곤하고 귀찮은데 자꾸만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해서, 이탈리아어를 잘 못하는 저도 다 알아 들을 정도였어요. 하늘은 푸르고 이 세상은 빛나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였어요. 그러다 나중에는 제가 조금 싫은 내색을 하니까 이 할아버지가 떠나면서 저에게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고 다시 왼손으로 악수하고 이런 식으로 여섯 번이나 악수를 하더라고요. 강변이 굉장히 길었는데, 그분이 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말만 알아듣고 뜻은 하나도 못 알아 들었더군요. 생각을 해보니까 그 할아버지는 강가에 기운 없이 앉아있는 내가 투신을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거였는데, 제가 그 뜻을 못 알아들었던 것이죠.”
저자와 사회자의 낭독이 있었던 1부가 끝나고 2부에서는 독자들의 낭독 시간이 이어졌다. 낭독을 맡은 사람들은 각자 책 속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골라 조금은 떨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갔다. 정여울은 낭독회를 마무리하면서 “시를 사랑한다는 것은 시인의 모국어, 시인이 처한 상황, 시인을 둘러싼 모든 것을 같이 걱정하고 공감하는 일인 것 같아요. 시인들의 삶,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아름답게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만 해도 알게 된 시가 열 편이 넘을 텐데 집에 돌아가서 소중한 사람에게 낭독해주신다면 많은 밤들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늘과 잘 어울리는 시를 한 편 읽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라이너 쿤체 「한잔 재스민차에의 초대」, 『시인의 집』 166쪽)
시인의 집 전영애 저 | 문학동네
삶은 어쩌면 평생에 걸쳐 안주할 단 하나의 집을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힘겨운 대낮의 일상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길들을 지나서, 마침내 돌아가 곤한 몸을 누일 장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다. 집이 없는 자에게는 휴식이 없다. 주변을 온통 경계하느라 잠조차 편하게 잘 수가 없다.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자라 할지라도, 그날 밤의 거처를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곳. 든든한 식사와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실 수 있는 곳. 그리고 마침내 구원받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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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누일 방 한 칸을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 삶은 어쩌면 평생에 걸쳐 안주할 단 하나의 집을 찾기 위한 여정일지도 모른다. 힘겨운 대낮의 일상을 마치고 어둑해지는 길들을 지나서, 마침내 돌아가 곤한 몸을 누일 장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고 부른다. 집이 없는 자에게는 휴식이 없다. 주변을 온통 경계하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