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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이행기에 관하여

모든 사물의 시간에는 이행의 시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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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있는 나의 타자에 대해, 우리가 우리의 타자에 대해 성난 얼굴을 부드럽게 바꾸고, 노여운 마음을 누그러뜨릴 때, ‘인간의 시간’으로의 존재 이행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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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9월 초는 8월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한낮의 햇볕은 쨍쨍하고 사람들의 옷은 여전히 짧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남자들, 반바지를 입은 아가씨들이 아직은 대세다. 그러나 쨍쨍한 햇볕은 한여름의 그것과 달리 ‘따갑게’ 살갗에 닿는다. 이 따가운 햇볕은 여름과 달리 몸을 타들어가게 하지 않으며, 갈증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땀을 흘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땀을 말리는 햇볕이 9월의 햇볕이다.


달력이 9월로 넘어갔다고 해서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별로 없다. 가로수로 서 있는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산천이 단풍으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표면의 얼굴에서 9월의 초입은 여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살갗에 닿는 햇볕의 따가운 감촉이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햇볕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고 깨운다. 반팔을 입고 반바지를 입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한 계절, 한때의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으로 이행하고 있다는 걸 직감한다. 거슬러 갈 수 없는 엔트로피의 흐름을 느낀다. 고개를 들어보라. 하늘은 한껏 높아지고, 하늘색은 좀 더 에머럴드빛에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낮의 시간과 달리 밤이 오면 바람은 듀얼 시즌을 선사한다. 몸에 닿아도 피부를 스치고 지나며 몸 바깥에서 겉돌던 여름 공기는, 이제 몸 내부로 스며들어 온다. 달라진 공기를 느끼는 것은 피부가 아니라 몸의 장기들이다. 감각의 각성은 표면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몸 내부로 스며들어온 다른 시간의 공기 같은 것에서 이루어진다.


모든 사물의 시간에는 이행의 시기가 있다. 이행기의 상당 기간 세계의 표면은 바뀌지 않는다. 도시의 9월 초처럼 세계는 여전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과거는 지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민감한 더듬이를 가진 소수를 제외하고, 그 시간 속에서 생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시간을 ‘이행기’로 느끼기 어렵다. 하지만 이행기는 9월의 초입과 같아서 어느새 다음 계절의 기미들을 잔뜩 그 안에 내재하고 있다. ‘변화’에 대한 인식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온다. 얼굴의 변화는 시간의 축적을 통해 완만한 그래프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이미 내재된 가을을 어느 순간 표면화하면서 시간의 이전과 이후를 단절시킨다. 표면의 기미들은 기미가 아니라 실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불연속적 단층면이다.  

        

***

 

여름철에 우리는 모두가 싸우는 짐승들이었다
태양과 싸우고 바람과 싸우고 스스로와 싸우고
이웃들과 싸우는 성난 짐승들이었다

 

사람들뿐만 그런 게 아니라
풀이나 나무나 새들이나 곤충도 하늘이나 산맥이나 강물까지도
서로 으르렁거렸고 다투며 불화를 일삼았다

 

이제금 하늘은 개이고 맑고 높은 바람은 시원하여 9월
9월은 자성의 계절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은 몸을 돌려 제 발자국을 돌아다본다


9월은 치유의 계절
제가끔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며 미소 짓는다

 

할 수만 있다면 부드러운 영혼의 혓바닥을 내밀어 스스로의
쓰린 상처를 핥아줄 일이다
상처받은 서로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줄 일이다

 

- <9월의 시> 부분, 나태주


지난 여름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는가.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은 ‘단독자’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정체성에 대한 이 단도직입적 질문은 내가, 우리가, 나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질문은 더 깊숙하게는 표면의 ‘나’가 인식하지 못하는 내 안에 깊이 존재하는 ‘나’의 타자들과 맺는 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도 있겠다. 나는 너에게, 우리는 우리 주변에게, 나는 나의 타자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여름에 우리는 이 질문을 잊는다. 우리 자신이 노여운 싸움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성난 짐승들’이 되어 있으므로 ‘인간의 말’ ‘사람의 얼굴’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의 햇볕은 따갑지만, 망각하고 있는 이 질문을 되돌려준다. “여름철”에 우리는 “태양과 싸우고 바람과 싸우고 스스로와 싸우고/이웃들과 싸우는 성난 짐승들”이 아니었는가. “서로 으르렁거렸고 다투며 불화를 일삼”지 않았는가. 어느새 한껏 높아진 하늘과 몸속으로 스미는 바람이 우리의 여름철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라고 촉구한다. “몸을 돌려 제 발자국을 돌아다”보라고 촉구한다. “모든 생명 가진 것들”이 그 스스로 생명의 원리에 의지해 살고 있는지, “자신의 상처”와 “상처받은 서로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아”주라고 다독인다. 우리가 우리의 타자에 대해 하는 그 실천이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다. 목숨 가진 것들에 죽음의 논리를 들이댈 때, 죽는 것은 우리의 타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생명의 원리로 우리의 타자를 보살필 때, ‘살아 있는 존재’는 우리 자신이다. 죽음의 원리와 죽음의 경계에서 사는 존재가 죽음을 내면화하며, 생명의 영토에 거주하는 존재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떻게 성난 짐승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로 이행할 것인가.


시인은 9월을 “치유의 계절”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9월의 얼굴에 치유의 열매가 표면화되어 맺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죽음의 시간에서 생명의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이행기로 만드는 일이다. 내 안에 있는 나의 타자에 대해, 우리가 우리의 타자에 대해 성난 얼굴을 부드럽게 바꾸고, 노여운 마음을 누그러뜨릴 때, ‘인간의 시간’으로의 존재 이행기는 시작된다. 한 시인은 이 계절에 피는 꽃에 비유하며, 이런 이행기를 가능하게 하는 우리의 마음을 “누구도 핍박해 본 적이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김사인, <코스모스>)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 ‘사람의 얼굴’도, ‘인간의 시간’도 저 코스모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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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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