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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14살 사춘기처럼 <프로듀사>
KBS <프로듀사>
능수능란하게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따라 직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대를 배려해서일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상처받을지 몰라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풋풋하게 한 발 한 발 담그기 시작한 이들의 사랑은 중2중2한 면이 넘쳐나지만 설렘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방송국은 맥거핀
또 다시 백지상태가 되었다. 사랑에 빠질 때마다 세상이 리셋 버튼을 눌러주는 기분이다. “13세부터 시작해서 14세의 질풍노도를 경험하세요.”라는 안내문을 받아 든 기분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 시기에 <프로듀사>를 보게 되었다. 김수현, 공효진, 아이유, 차태현이 주연이라는데 심지어 1회부터 초호화 게스트가 등장한다니 기대감 같은 게 꽤 부풀어있었나 보다. 그러나 ‘하여튼 방송국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책임전가와 미묘한 정치를 흥미롭게 담아내긴 했지만 그다지 현실적이지도 않았고, 재미있지도 않았다. 방송국의 사정을 다룬 <온에어>나 <그들이 사는 세상>와 비교해서 어떤 점이 새롭고 강세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우들이 아까운 연출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방송국의 세계를 그려낸다지만 KBS 자사 프로그램을 동원해 실감을 살리려고 하지만 어색하기만 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출연진의 코멘트 연출은 신선하지 못하고, 드라마의 긴밀함과도 전혀 관련 없고 등장인물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유머코드,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예상 가능한 에필로그를 다 참고 몇 주간 지켜본 뒤 역시 믿고 볼 수밖에 없는 그 배우들만이 제 몫을 다 해낸다고 느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4명의 주연배우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화학 작용이 제대로 발생했다. ‘야근은 일상, 밤샘은 옵션, 눈치와 체력으로 무장한 KBS 예능국 고스펙 허당들의 리얼 예능드라마’라는 소개 글을 ‘방송국은 정말이지 벽지 같은 배경일 뿐이고 거기서 복닥거리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 이리저리 얽히게 되면서 짐짓 모른 척 고요하게 내버려 두었던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야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사랑을 통한 성장
물론 등장 인물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첫사랑 때문에 방송국 PD로 진로를 결정했다는 사연에 신입이니까 당연히 순수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다는 설정으로는 백승찬(김수현 분)이 매력적으로 보일 리 없었다. 경험치가 낮은 사회초년생이라 모든 것이 낯선 상황에서 순발력이나 융통성이 부족하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과 그럼에도 신중한 말투와 목소리를 가졌다고 해서 순수로 치장될 순 없다. 백승찬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미숙한 것이다.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은 인물의 매력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해사하게 예쁜 소년이라도 어리버리한 상태로는 사랑을 얻어낼 수 없다. 백승찬은 미숙함 속에서도 성취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연상 취향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소년스러움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면모도 읽어진다. 그렇기에 자기 식의 영악함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걸 배우 김수현이 잘 살려내고 있다. 어떤 의지를 스쳐가는 표정에서도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특히 신디(아이유 분)와의 관계에서 더디지만 변화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도 자신만의 분명한 기준을 드러낸다. 그것이 완성되고 세련된 것이 아닐지라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어리기만 한 남자는 아니라는 점이 마음 쓰이게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도 인용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사랑의 힘을 참으로 놀랍다. 인기에 힘입어 제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이 보이던 초싸가지 신디는 백승찬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위악스러웠던 신디의 사연이 밝혀진 순간에도 연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연 자체는 기구하고 딱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연예인들이 매체에 나와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눈물 짓던 이야기들과 특별한 차별점이 없다. 오히려 그런 시련을 겪고 닫혀진 마음으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어떻게 지금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는 드러냈어야 했다. 술에 취해 13살에 데뷔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하지만 몰라도 될 것까지 다 알아 버린 차가운 아이. 그런 시점에서 신디가 백승찬을 만난 건 다른 세계로의 문을 마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매진해오고 매달려온 세상만이 다가 아니라는 것. 스물셋에 이미 안생에서 내려갈 일 밖에 남지 않는 연예인으로서의 삶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것. 사랑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의 길을 디뎌볼 기회를 주고 용기도 품게 한다. 신디도 『데미안』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제 드디어 한번 인생의 한 부분을 살아보기를, 나에게서 나온 무엇인가를 세상에 내놓고,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싸우게 되기를 열렬히 갈망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는 정말 나의 연인이 내게로 오고 있을 거라고. 다음 길모퉁이를 지나고 있을 거라고. 다음번 창문에서 나를 부를 거라고”
사랑은 고통
그러나 사랑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사랑한다는 마음 자체를 견딘다는 것 자체가 평소와는 달라진 자신을 감당해야 하고 요동치는 마음을 어떤 식으로 표출해야 하는지 그 정도를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번 사랑에선 어떻게 했지? 같은 노하우들이 쌓일 듯 쌓이지 않는 영역이랄까나. 게다가 성취된 사랑. 이어져 결실을 맺은 사랑도 유지해 나가기 어려운데 혼자서 들뜬 마음을 감당해야 하는 사랑은 사랑의 벅참과 모멸 사이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고 선망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를 가질 수 없는 신디의 마음, 갓 태어난 오리가 처음 본 생물체를 어미로 여기듯 연상의 첫사랑 자리가 비워지자 눈에 들어온 탁예진(공효진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 백승찬의 지고지순함 같은 것들은 당사자에게는 설렘보다는 고통이다. 14살 사춘기에 처음 사랑에 빠져 중이중이한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할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푹 빠져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몸만 크고 나이만 먹었지 ‘첫’사랑을 하게 된 이 둘에게는 『데미안』은 어쩔 수 없이 교과서 같은 책이 될 것 같다.
<프로듀사>의 신디와 백승찬 부분만이 나를 간질거리게 만들며 사랑 때문에 헤매고 있는 나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이제와 『데미안』을 다시 읽긴 그렇고 오늘밤엔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을 읽으며 다시 찾아온 나의 사춘기를 쓰다듬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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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애 그리고 섹스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몇 번의 사랑을 경험하며 제법 깊은 내상을 입었지만 그만큼 현명해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걸 수줍어하지 않게 되었다. 놀라운 재생능력으로 사랑할 때마다 소녀의 마음이 되곤 한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해내고 쉽게 두근거린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으며, 블로그 '생각보다 바람직한 현정씨'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