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의도
빅데이터 시대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 제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이래, 감시사회의 가능성은 지식인들이 미래를 상상할 때 언제나 고려하는 상수常數가 되었다. 어디서 무얼 하든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빅브라더’의 존재는 정보사회의 전개와 함께 더욱더 개연성 있는 서사로 자리매김했다. 2014년 ‘카카오톡 사찰’은 그러한 서사의 최신 버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 상에서 출현한 최초의 빅브라더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21세기의 빅브라더 치고 너무 투박한 모습 아닌가? 카톡 사찰의 주체는 어설프고 원시적인 20세기형 빅브라더에 가깝다. 우리의 눈이 이 어설픈 권력에 향해 있는 사이, 그보다 세련되고 은밀한 눈이 일망一望 감시체제를 착실히 쌓아나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빅데이터 기술로 정교해진 정보자본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정보자본주의는 지식과 인지가 새로운 부의 원천이자 중심이 되는 경제구조를 뜻한다. 지식과 감정을 포함해 인간의 인지 능력과 결과가 자본화하면서 ‘인간’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시시각각 온갖 정보를 송수신하는 이 시대의 인간은 체제의 운영체계 안에서 탁월하게 통제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했다. 이 책은 정보자본주의의 탈인간적 변이 과정을 비판하고 인지적, 능동적, 창조적, 미적, 윤리적 능력을 생생하게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과 기획을 구상한다.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공통의 자율을 추구할 방법을 함께 고민한다.
특히 이 책은 정보통신 기술뿐만 아니라 건축, 의료, 음악, 패션, 사진, 기억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변화상을 전방위로 분석한다. 기존의 미디어 담론은 기업의 마케팅 언어를 변주하는 수준에 그칠 뿐, 변화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정보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격변에 대응해 이 시대가 어떤 질문을 준비해야 하는지 명확히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감시체제와는 사뭇 다른 ‘서버server에 의한 감시’의 가공할 힘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양산될 ‘호모 익스펙트롤’, 즉 예측 가능한 인간이라는 핍진한 인간형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인간 실존의 기본 축인 시공간에 대해서까지 뻗어나간다. 이러한 촘촘한 성찰 아래 리듬과 소리, 사운드스케이프라는 대안적 상상력의 공간을 마련한다. 저자는 이처럼 사유의 지평을 확장해가면서, 철학과 사회학은 물론 신경생리학, 건축공학, 에스에프를 넘나드는 ‘인문과학’적 사유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빅데이터 시대의 인간
호모 익스펙트롤Homo Expectrol. 임태훈은 정보자본주의가 길러낼 인간 주체를 그렇게 이름 붙인다. 기대expect 가능하고 조정control 가능한 이 존재는 정보자본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알려진 패턴과 루트를 따라 슬픈 실존을 영위한다. 오늘날 우리는 각종 인터넷 사이트의 맞춤형 제품 추천 서비스에서 그 미래를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지만, 실제 미래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격적일 것이다. 사물인터넷, 이른바 ‘입는wearable 기기’의 트렌드는 데이터의 축적을 메가급수적으로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지認知 수준이 아니라 신체身體가 빅데이터에 포박되는 것이다. 임태훈은 특히 ‘디지털 헬스케어’라는 트렌드를 고찰하면서 이러한 사물인터넷의 전면화가 야기할 미래를 가늠해본다. 인간 실존의 가장 직접적인 실체인 몸이 정보화되어 장악되는 현실은 어쩌면 이미 가까이 와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해부학자 군터 폰 하겐스가 전시한 인체 조각들로부터 ‘프랙털화된 소비자’라는 선홍빛 미래를 예지한다.
그렇게 파편화된 인간, 호모 익스펙트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이란 어떤 것일까? 빅데이터는 우리의 시간 감각, 혹은 삶의 속도를 하나의 가능성 차원으로 압축한다. 즉 속도가 빠른 것을 넘어서 그것을 아예 0으로 수렴시켜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팟에 내장된 16기가 저장 장치에 5분짜리 엠피 스리 파일을 채워넣으면 3,200곡가량의 재생 목록이 생성된다. 배터리 재생시간을 최대 40시간까지 늘려 잡는다고 해도 한 번에 다 들을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또 그럴 만큼 편집증적으로 음악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엘피나 시디 시대에도 흔치 않았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는 선택’의 경우라면 청취에 할당될 시간은 0으로 압축될 수 있다. 가능성을 오로지 가능성으로 남겨두었을 때 ‘선택하지 않는 선택’의 차원에 삶의 실제적 순간들은 무엇이든 0으로 압축된다. (223쪽)
빅데이터는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시간의 한계를 이미 초월해서, 이제 감상은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는다. 즉 제로 타임에 모든 것이 압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검색→다운로드→저장→망각’의 고리를 순환한다. 이 고리에서 주체는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며, 단지 무언가를 언제든 경험할 수 있다는 망상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빅데이터 기술이 바꿀 공간의 논리 또한 가공할 만하다. 최근 건축계를 주도하는 흐름 하나는 BIM 공법이다. 이것은 정보를 모든 단계에서 데이터베이스화해 최적의 건축 효율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공법을 적용한 카타르 월드컵경기장 건설 현장에서 수십 명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BIM에 구조, 지반, 도로, 수자원 등은 데이터로서 기입되지만, 노동자의 인권이나 그들 삶의 구체적 상황들은 단지 노이즈일 뿐이다. 즉 빅데이터가 상상하는 공간에서 인간은 배제된다. 저자는 그 사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이하 DDP)를 든다. BIM 건축의 성공 사례로 평가되는 DDP는 곳곳에서 인간적 배려의 결함이 발견된다. 저자는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며, 그 상징으로 DDP의 ‘옥상 없는 건축’에 주목한다. 옥상은 용산참사의 순교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옥상 없는 건축은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빅데이터 사회에서 인간은 단지 기대되는 각본일 뿐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정보자본주의를 넘어서
저자 임태훈은 기술사와 미디어 이론 및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해온 인문학자로, 한국에서 기술과 과학을 사유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사실 인문학의 내용적 쇄신은 시대의 첨단 과학기술과 맞물려야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플라톤과 칸트의 철학이 다분히 상상력의 산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 그들은 최신 과학이론을 바탕에 두고 자신을 사상을 전개했다. 그랬기 때문에 동시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논할 수 있었고, 파급력 역시 컸던 것이다.
최신 과학이론을 흡수한 오늘의 인문학은 정보자본주의를 넘어설 뾰족한 답이라도 있는 걸까? 저자는 소리, 이른바 ‘울림’이라고 하는 것에서 빅데이터의 바깥으로 신중하게 접근한다. 이때 소리는 단순히 인체의 청각 시스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몸 전체의 울림과 관련된다. 시각 중심주의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기존의 소리 체계에서 이탈하는 노이즈를 만들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어쩌면 빅데이터의 포위를 돌파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리듬의 변화, 혹은 대안적 리듬의 회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해결책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희망적 미래를 그리는 넉넉한 시작점이 된다. 저자는 춘천지역의 지역화폐에서 대안시간 체제라는 새로운 삶의 리듬을 기획해보기도 하고, 스냅챗이나 SNS ‘하루’에서 시한부 데이터의 가능성을 엿보기도 한다. 특히 시한부 데이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데이터가 지워지도록 프로그램화된 기술로서, 데이터를 생生과 사死의 고리로 순환시킨다. 그것은 빅데이터의 마이닝mining, 즉 검색의 시도를 근본적으로 무력화한다. 즉 데이터를 자연의 유기적 질서의 체계로 통합시키는 시도인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빅브라더의 눈도, 우리의 몸을 샅샅이 파고드는 사물인터넷도 시간의 쓸려 제한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빅데이터 시대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일지, 도래할 미래가 어떨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아직 변화는 진행 중이며, 앞으로 점점 더 새로운 도전들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은연중에 검색/생성하는 데이터가 더이상 족쇄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며,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자유 목록에 반드시 기입되어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프롤로그 - 양계장의 바깥, 디지털의 민낯
오늘날 한국사회의 빅데이터는 차라리 문학 비평이 필요한 픽션입니다. ICT 전문가들에게만 맡겨둘 게 아니라 인문학이 개입해야 합니다. 속지 않기 위해 질문하는 일, 더 나은 생각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묻고 궁금해하는 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고민할 수 있도록 유효한 질문 목록을 준비하는 일이 인문학의 역할일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를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7~8쪽)
한국사회의 빅데이터 담론은 크게 세 차원으로 분리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데이터 사이언스의 영역에서 빅데이터가 실제 어떻게 연구되고 있고, 어떤 성과를 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체 없는 거품덩어리 담론에서 무엇을 떼어놓아야 할지 기준을 정할 수 있습니다. 또 한 차원은 세계 ICT 업계의 최강자들이 빅데이터 기술력을 바탕으로 어떤 권력을 갖게 되었는지 직시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들 기업이 주도하는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컴퓨터wearable computer, 디지털 헬스케어digital healthcare 등의 사업이 지구화된 네트워크 자본의 증식과 확장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문제는 이 책의 거의 모든 장에 걸쳐 다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리되어야 할 것은 창조경제론입니다. 창조경제론의 ‘빅데이터’는 탁월한 소실점입니다. 보여야 할 것은 흐릿하고 엉뚱한 것만 또렷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14~15쪽)
제국주의 열강의 흑선黑船이 출몰하던 구한말의 바다와 2010년대 한국사회의 디지털 네트워크는 꼭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때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글로벌 자본으로부터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후의 마지노선은 국가나 민족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이라는 것입니다. (19쪽)
시시각각 온갖 정보를 송수신하는 이 시대의 인간이란 체제의 운영 시스템 안에서 탁월하게 통제 가능한 자원으로 전락했습니다. 비트의 접속점마다 마케팅의 정밀한 성좌가 작성됩니다. 돈이 움직이는 길을 인간의 몸뚱이도 좇아 움직입니다. 돈과 데이터가 풍성하게 모여드는 자리마다 행동 패턴은 또렷하게 노출되고 단순해집니다. (22쪽)
그들은 걸어다니는 ATM 기계나 마찬가지입니다. 매번 어떤 선택을 할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빅데이터 비즈니스는 소비자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 하는지 알려 합니다. 남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돈이 필연처럼 자기 손에 건네지길 바라는 일은 모든 장사꾼의 꿈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소비자는 매 시, 분, 초마다 모든 행동을 남김없이 디지털화하는 사람들입니다. (22쪽)
디지털 환경에선 숫자로 바뀔 수 있는 것만이 정보로 선택됩니다. 인간의 삶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의 인간됨을 결정하는 삶의 불투명성, 불확실성, 예측 불가능성은 정보화될 수 없는 노이즈로 취급합니다. 이 노이즈가 아주 낮은 존재들이 경제동물의 다음 버전입니다. (24쪽)
비트들의 접속점은 모든 사물을 점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피부와 몸속 장기에까지 침투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네트워크에서는 인간의 몸뚱이 전체가 전자화된 화폐의 네트워크를 끌고 다니는 모바일 컴퓨팅 장치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스마트폰이 미래의 인간을 미리 정의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 많은 장치를 네트워크에 연결할수록 우리 삶에는 ICT의 인클로저enclosure가 촘촘히 내리꽂히게 될 것입니다. (32쪽)
1장 호모 익스펙트롤: 빅데이터 시대의 인간형
그가 앱을 통해 시시각각 전송하는 정보는 허공에 휘발되지 않고 어딘가의 서버에 저장된다. 스마트폰에서 처리되고 있다고 전혀 의식조차 못 했던 정보를 누군가 또는 어떤 기계들이 공유한다. 이를테면 오사마 빈 라덴이 은신처를 들켜 미 해병대에 사살된 원인이, 새로 산 아이폰에 앱을 깔면서 위치 이동 정보 제공에 동의한다는 확인 버튼을 눌렀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있다. (43~44쪽)
사람들의 소비 정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카드회사 서버에 쌓이고 있다. 어쩌면 카드회사 서버야말로 유사 이래 인류가 이뤄낸 가장 거대한 역사 아카이브일지 모른다. 그 속엔 시대의 영웅과 악당이 어디에서 얼마짜리 식사를 했다는 결제 기록에서부터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갑남을녀가 어느 날 어느 역에서 지하철에 탑승했는지에 이르는 온갖 정보가 담겨 있다. 하지만 데이터베이스의 규모에 대칭될 만한 질문 목록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무엇을 물어야 할까? 이 괴물 같은 혼돈의 아카이브는 우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너와 나를 경유했던 리비도의 흐름도 이곳에 모여 바다를 이루고 있다. (46~47쪽)
2005년 무렵만 해도, 빅데이터는 기존 기술로는 분석이 어려워서 서버 용량만 차지하는 쓸모없는 정보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용량 정보 분석을 의미하는 ‘빅 인사이트Big Insights’를 제대로 구축할 수만 있다면, 소비자의 심리?행태까지 정밀히 파악할 수 있는 기업 경쟁력의 미래 열쇠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업이 그 열쇠를 얻었을 때 소비자에겐 무슨 일이 벌어질까? (…) 그들은 소비자의 리비도가 어디에서 모였다가 흩어지는지 분석해 마케팅의 정밀한 성좌를 그리려 한다. 소위 빅데이터 비즈니스는 마케팅과 감시가 분리되지 않는 세계, 인간 행위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탁월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회로의 재편을 지향한다. 인간은 이런 세계에 점차 길들고 있다. 새로운 종류의 인간형이 빅데이터의 시대에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48쪽)
빅데이터 기술은 선거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의 선거 캠프에서는 유권자 데이터베이스를 온라인으로 통합 관리하는 ‘보트빌더VoteBuilder.com’시스템을 사용했는데, 유권자 성향 분석, 미결정 유권자 선별, 유권자에 대한 예측을 바탕으로 ‘유권자 지도’를 작성했다. 오바마 캠프가 비용 대비 효과적인 선거를 치를 수 있었던 비결도 빅데이터 기술을 활용한 유권자 맞춤형 선거 전략 덕분이었다. 2012년 대선 패배의 원인을 분석한 강민 민주당 대의원의 독자적인 대선평가 보고서에서도 빅데이터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다. (52쪽)
체제의 운영 시스템 안에서 충분히 예상expectation 가능하며 탁월히 통제control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정보자본주의의 심화와 함께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인간형 호모 익스펙트롤이다. ‘익스펙트롤Expectrol’은 ‘expectation’과 ‘control’을 결합한 조어로, 지배 질서의 시스템 운영 원리에 자발적으로 순응할 뿐만 아니라, 빅데이터 분석에서도 선명하게 패턴이 추출되는 전형적 삶의 사본들이다. (55쪽)
시험 결과에 따라 유치원부터 대학, 직장에 이르기까지 등급을 결정받아야 하는 수험생의 일상은 일평생으로 확장됐다. 이 사회에서 만인은 죄수이자 간수이길 자처한다. 이들 수험생 주체에게 삶은 경영의 연속이며, 감정이나 욕망은 항상 관리되어야 할 리스크다. 합리적으로 통제해서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을 평생토록 연마해야 한다. 도대체 이런 현실에서 수집된 빅데이터가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우리의 소비 정보를 분석한들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시하는 동어반복은 부정되지 않는다.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은 빅데이터 분석에 알맞은 인간형의 일반화를 예고하고 있다. 맞춤형 마케팅이 아니라 마케팅에 맞춰 교정당하는 우리의 삶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67~68쪽)
2장 시간의 파편을 사고파는 경제: ‘디지털 헬스케어’에 관하여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소비’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소비’한다.” 라캉의 그 유명한 경구에서 ‘생각’을 ‘소비’로 바꿔 써보았다. 심장, 위, 폐, 십이지장, 대장, 소장, 췌장이 돈을 쓸 수 있게 하자. 무의식이 소비하고 의식은 그것을 합리화한다. 206개의 뼈도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소비자가 되게 하자. 피부, 백혈구, 적혈구, 뇌세포라고 예외가 될 순 없다. 한 인간의 세포 수는 무려 60조 개에 이른다. 세계 인구쯤은 가볍게 능가하는 소비 집단을 한 몸뚱이에서 헤쳐 모이게 할 수 있다면, 인구 감소에 따른 소비 지표 악화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상상 속의 일만은 아니다. 기업은 이미 한 명의 소비자인 ‘나’가 아니라 ‘나’ 안의 무수한 타자를 표적으로 하는 ‘무의식 마케팅’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76쪽)
몸에 전자 패치를 붙이는 것만으로 발병 이전과 똑같은 몸 상태를 자동으로 유지해줄 수 있다면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경쟁력 있는 몸’이라는 이데올로기에 강박된 대중들에게 피학적인 자기계발 없이 원하는 몸을 얻을 수 있는 기술을 보급한다면 마다할 사람들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학수고대하는 기술이고, 이 기술 자체는 나쁠 게 없다. 그러나 누가 이 기술로 돈을 벌려 하는가는 따져볼 문제다.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타자들의 장소인 몸을 무의식적인 소비의 장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거인의 쇼핑 목록을 훔쳐보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췌장의 과소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기업과 나 그리고 내 몸속 소비자들과의 관계를 묻는 일은 현대 의학의 이기利器를 누린다는 수준에서 다뤄질 주제가 아니다. (79~80쪽)
오늘날 통신사의 요금 체제는 이용자가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시간을 배급하는 사업이 되었다. 이용자가 접속 가능한 상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려면 금액이 많든 적든 통신사에서 제시하는 요금제를 택하고 매 순간 과금이 이뤄지는 체제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돈을 쓰고 있다는 어떠한 자각도 없는 상태에서도 계좌에서 빠져나갈 금액은 카운팅된다. 더 많은 장치를 네트워크에 연결할수록 우리 삶에는 ICT의 인클로저가 촘촘히 내리꽂히게 될 것이다. 모든 일상의 디지털화, 사물인터넷 등으로 불리는 정보자본주의의 다음 단계는 더 많은 센서와 인터넷 연결을 통해 더욱더 철저히 시공간을 자본화할 것이다. (82쪽)
무제한 인터넷주소 체계IPv6는 아이피 주소를 무려 340조 개나 부여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간 인터넷에 접속하리라 추정되는 2조 개의 장치에 부여하고도 남는 숫자다. 비트가 질주하는 340조 개의 포인트는 손바닥 위에서 손목으로, 눈과 귀, 결국엔 몸 전 체로 파고들 것이다. ‘소비자의 프랙털화’도 사물인터넷과 웨어러블 기기의 확산과 함께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87쪽)
웨어러블 기기가 스마트폰만큼 팔리려면 어떤 사회가 디자인되어야 할까?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끝없이 욕망하고 불안과 공포를 느끼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기업이 인민을 통제하듯 내 몸속의 타자들을 기술로 제어할 수 있다고 믿게 해야 한다. 몸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가장 간편한 방법은 ICT가 약속하는 헬스케어이며, 다른 선택지는 믿을 수 없는 데다 다른 선택 자체를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양계장(시장)에 새롭게 품종개량한 닭(소비자)을 채워넣는 일과 비슷한 일이다. (89쪽)
오늘날의 디지털 문화는 ‘알 수 없다’ ‘모른다’는 말에 인색하다. 정보는 자본이고 무지는 결핍된 부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색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세계관을 좀처럼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 디지털 네트워크에 합일된 현대인의 삶을 제한된 패턴을 반복하는 쳇바퀴 취급하면서, 집단적 행동 능력의 범위는 예측 가능한 수준을 넘지 않을 거라 자신하는 빅데이터 마케팅은 그중 최악이다. 디지털 문화는 인간 실존의 복잡성 앞에서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겸허히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검색 가능한 데이터베이스의 바깥, 마케팅의 바깥, 신자유주의의 바깥에 놓인 ‘알지 못하는 무엇’의 잠재성을 위한 윤리다. (92~93쪽)
그런데 우리의 몸이 과연 그렇게 할 말이 많을까? 이 사업은 데이터베이스화된 인간의 몸이 수다스러울수록 돈을 번다. 플랫폼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생활이 습관화될수록 사이버콘드리아가 줄기는커녕 그 반대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다. 몸에 이상이 생길 확률을 쉴 새 없이 계산해서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과정은 사용자의 건강만이 아니라 헬스케어 서비스 제공자의 영리에 이바지한다. 그들에게는 전 인민의 사이버콘드리아화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케팅 환경이다. (107쪽)
3장 제로 타임의 삶
자본의 리듬에 휩쓸려 다니는 서울의 일상에서 사회적 부의 파괴는 임계점을 넘어선 지 오래다. 우리 몸의 리듬도 도시와 함께 변하고 있다. 강을 파헤치고 산을 무너뜨리고 숲을 쓸어버린 자리마다 주식과 부동산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사업이 진행된다. 돈은 물 흐르듯 수익이 적은 곳에서 많은 곳으로 흐른다. 사람들의 생활 방식도 이 흐름을 따라 구조조정된다. (122쪽)
인터넷은 우리 시대에 어떤 시간이 (불)가능한가를 드러내는 적나라한 척도다. 페이스북 한 곳만 하더라도 시간의 생태계에서 인간의 ‘가동시간uptime’을 엄청나게 빨아들이고 있다. 전 세계 사용자 수는 2014년 현재 9억 명을 돌파했고, 한국만 해도 월 실사용자의 수가 1300만 명에 이른다. 월 평균 체류시간은 9시간이었다. 월 실사용자 수와 체류시간을 곱한 누적시간의 규모는 무려 1만 3,000년에 달한다. 페이스북, 유튜브 등의 사이트는 이용자들로부터 빨아들인 시간을 자본화한다. (120쪽)
오늘날의 데이터 소비는 실제로 몸을 움직여 듣고 보고 경험하는 질적인 시간의 향유보다 검색과 다운로드를 되풀이하는 일에 치우쳐 있다. 쉼 없이 새로운 데이터가 유입되는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작품을 감상하는 느긋한 즐거움보다는 파일을 선택하고 저장하는 속도를 더 즐기게 된다. 예를 들어 애플이 서비스하는 아이클라우드iCloud의 기본 저장용량은 5기가바이트다. 5분짜리 엠피스리 파일만으로 채운다면 1,000곡가량을 업로드할 수 있다. 유료 서비스를 이용하면 50기가바이트까지 용량을 확장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외부 기억 장치마다 온갖 파일이 가득 채워져 있다면 한 번쯤 계산해보기 바란다. 엠피스리 음원 1,000곡을 경청하려면 80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당신은 그 데이터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가? (129~130쪽)
언젠가 체험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차원에 데이터를 저장해놓기만 하는 소비라면, 청취에 할당될 시간을 0으로 압축할 수 있다. 엠피스리 파일이 100곡이든 100만 곡이든 제로 타임에 압축하면 단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게 된다. ‘가능성’을 가능성의 차원에 손쉽게 정박해두기만 한다면, 어떤 가능성을 모아뒀는지 잊어버리기도 쉽다. 오늘날의 소비가 체험이 아닌 망각에 비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삶의 강렬함이 결핍된 기억은 뇌의 신경망에서든 외부 기억 장치를 통해서든 인간 신체의 가동시간 중에 활성화될 가능성이 낮다. ‘검색 → 다운로드 → 저장 → 망각’의 고리에 묶인 우리는 네트워크의 주체가 아니다. 사실상 디지털 네트워크의 경첩에 불과한 삶을 우리는 제대로 불평할 줄도 모른다. (130쪽)
단언컨대 가난한 인민에게는 꿈속에 꿈을 겹겹이 쌓아올리는 달콤한 상상력이 아니라, 꿈에서 단호하게 깨어나는 힘, 즉 파상력破像力이 절실히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파상력은 허황한 미래의 표상을 믿지 않는 힘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진짜 미래는 어느 사이트에서도 다운로드할 수 없다. 바로 지금 내가 한 그 행동으로부터 다음 순간이 열린다. 누구라도 예측하기 쉬운 뻔한 미래는 ‘검색 → 다운로드 → 저장 → 망각’의 고리에 묶여 있는 이의 내일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의지와 근기가 부족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자기 책임을 들먹일 만큼 문제는 간단치 않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가장 빠른 속도를 체험했다고 착각하는 이 시대야말로 깨어나야 할 가장 나쁜 꿈이다. 이 꿈의 거푸집이자 삶의 실제적인 시간을 0으로 압축하는 전방위적 사회 구조를 ‘제로 타임’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131쪽)
4장 대안시간 체계를 사는 건 가능한가
증도에서 담배는 살 수 없을지 몰라도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흔하디흔했다. 휴대폰도 잘 터졌고 인터넷 접속도 어렵지 않았다. 위치 이동 정보를 송수신하는 스마트폰의 온갖 앱이 작동될 때마다 이용 정보는 전산망에 기록되었을 테고, 신용카드를 쓸 수 있다는 건 전자화된 화폐의 입출을 이곳까지 끌어들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돈의 관점에서 봤을 때 증도는 조금도 느리지 않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돈을 ‘사용’했다고 말한다면, 다른 곳에서의 소비와 마찬가지로 단편적인 사실을 가리킬 뿐이다. 인간은 꽃가루를 몸에 묻힌 꿀벌처럼 돈을 여기저기로 실어 나르는 매개이면서 일정 시간 돈이 머물렀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는 크고 작은 터미널 구실을 한다. 흔한 이야기지만 돈 앞에 인간은 주체가 아니며, 이 사실은 슬로시티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146쪽)
우린 어떤 시간 속에 살고 있는가. 이른바 표준시간 체제는 국제 금융 거래의 대부분이 데이터베이스화된 화폐로 처리되는 현실에서 자본시장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이다. 상호 환산 불가능한 복수의 시간 체계가 이 시스템에 동시에 공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1초의 길이가 불규칙하게 늘었다가 줄어든다면 데이터베이스의 입출력은 매번 오류를 일으켜 아무도 이 시스템을 신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어드는 시간이란 우리의 의식 세계에서 늘 발생하는 현상이다. 인간의 뇌가 복수의 시간 패턴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자본은 초코드화된 거대한 단일 시간 체제를 유지한다. (151쪽)
칸트의 몸시계, 그를 쫓아다니며 시간표에 맞게 시중을 들어야 했던 하인 람페의 몸시계, 그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이웃들의 몸시계, 칸트의 시야를 스쳐가는 보리수 산책로의 여러 동식물의 몸시계를 아울러 그 무엇이든, 인간에게 지속성의 단위를 경험하게 하는 패턴이 있다면 시간의 근원으로 규정될 수 있다. 토착과학을 연구하는 서구 물리학자 F. 데이비드 피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간은 우리나 자연 속의 나머지 것들과 독립되어 있지 않다. 시간은 의식을 통해서 언설되며 시간의 움직임과 인간의 관계는 늘 새로워지게 마련이다. (158쪽)
세상의 모든 시간은 이질적인 선들의 다발이자 폭발이다. 우리는 오직 그 폭풍의 현재에서만 살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바로 여기’의 특이성을 설명할 수 없는 보편시간, 표준시간 체제, 제국주의적 시간에 우리 자신을 짜맞춰 살아가는 것은 현재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현실로부터 소외받지 않는 시간을 만끽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속한 시간 공통체를 선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그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으로 벌어야만 할 돈, 벌기도 전에 빌려 쓴 돈,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돈, 이미 써버린 돈의 질서에 년, 월, 일, 시, 분, 초를 회수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162쪽)
세계 최대의 시계 생산업체 스와치Swatch가 1999년 1월에 발표한 ‘인터넷 타임Internet-Time’은 시, 분, 초 대신 데이터양을 나타내는 최소 단위인 ‘비트’를 기본 단위로 사용하는 새로운 시간 체계였다. 하루(24시간/1,440분/86,400초)를 1,000비트(bit가 아니라 beat라 쓴다)로 나눠 @를 붙여 표기하는데, 86.4초는 @ 001 스와치 비트에 해당한다. 스와치 본사가 위치한 스위스 비엘의 시간을 기준점으로 자정은 @ 000, 정오는 @ 500이다. 기존 시간 체계와 달리 시차 없이 세계 어디에서나 동일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 여러 나라 사람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웹서핑을 함께하는 일에 ‘비트’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온종일 인터넷에 매달려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모니터 화면의 불빛보다는 뜨고 지는 햇빛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당연하다. 우리 몸의 기본 리듬에는 생명체의 근본 발달 원칙이 내재해 있다. 문화적 관습과 제도의 훈육만으로 우리가 기존의 시간 체계에 길든 것은 아니다. 우리 몸도 꽤 까다로운 기준에서 시간과 협상을 벌인다. (163~164쪽)
대안시간 체계는 숫자로 계량되고 분절되는 표준시간 체제의 방법이 아니라 지역의 온갖 이야기로부터 생성한다. 시계가 2012년 12월 19일 오후 4시 30분을 가리켰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묻는 방식은 기존의 시간 체제를 따르는 일이다. 하지만 옆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던 그때에 학교 운동장엔 목련꽃이 환하게 피었다는 사건을 통해 시간을 발생시키고 두고두고 다시 헤아린다면, 그것이 대안시간 체계에서 시침과 분침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문학과 역사의 글쓰기가 대안시간 체계의 새로운 시계 역할을 하는 셈이다. (171~172쪽)
5장 창조경제의 만화경 1: DDP
서울을 돈 넣고 돈 불리는 기계로 사용하는 일에 한국사회 전체가 연루돼 있다. 용산 개발 사업은 막대한 돈의 흐름을 끌어들일 수 있는 회로망을 용산 지역에 재배치하는 작업이었다. 우리 시대 부富의 창출은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돈의 회로를 자신을 향해 배타적으로 집속시키는 일에 달렸다.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는 일이 반복될수록 집값은 뛰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부자가 됐고, 그보다 더 많은 이들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에 중독됐다. 서울의 20세기는 이 과정의 무한 루프에 갇힌 세월이었다. (176쪽)
용산 국제업무 지구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초고층 빌딩숲의 상상도에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비정형, 비표준 건축의 최신 경향이 총망라되어 있다. 개발사의 보도자료를 보면, 620미터 높이의 랜드마크 타워를 중심으로 30여 개 빌딩이 이어진 스카이라인은 ‘신라 금관’을 모티브로 디자인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좋게 보려고 애를 써도 그 건물들이 닮은 것은 테트리스 막대기였다. 용산에서 실제 벌어진 일도 테트리스 게 임과 다를 게 없었다. 진짜 건물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 려진 상상도가 이 지역에 쏟아져 생활권이 초토화됐다. (178~179쪽)
과잉 개발, 과잉 공급된 이 지역 부동산시장에서 DDP의 순항은 낙관할 수 있을까? 개장 이후 5년이 넘도록 상가가 활성화되지 못한 가든파이브의 전철을 DDP는 피해갈 수 있을까? 젊은이들의 쇼핑채널이 온라인 쇼핑몰로 옮겨가고 중국산 저가 제품과 글로벌 저가 브랜드의 인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DDP가 동대문 상권의 구원투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DDP 인근의 노점상들은 서울시의 단속을 피해 어디로 옮겨갔을까? 한층 가속된 자본의 속도에 뒤처지면 사람이든 건물이든 가차 없이 퇴출이다. 이곳 역시 ‘용산’과 ‘쌍용차’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DDP라고 예외가 아니다. (190쪽)
홀로코스트 이후로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마찬가지로] 2009년 이후로 ‘옥상’은 함부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193쪽)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이래로, 새로운 도시가 솟아올랐다 무너지는 대격변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자본의 고속 증식로로 도시가 남용되는 현상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세훈과 이명박, 자하 하디드 등의 부류는 이 일에 동원되는 유능한 도구들이다. 많은 이들이 그들처럼 살 수 있길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해 신흥 개발 국가의 도시에 비교하면 서울은 매력적인 부동산시장의 지위를 잃은 지 오래다. 회수할 길 없는 돈 잔치를 막대한 세금을 풀어서 꾸역꾸역 이어나가는 일은 DDP가 마지막이 될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DDP는 서울의 임계점이다. (200쪽)
6장 창조경제의 만화경 2: BIM
스마트폰으로 네트워크에 접속해 정보를 주고받을 때, 네트의 특정 도메인과 스마트폰 사이엔 표준화된 언어로 구현된 정보가 오간다. 여기서 표준화된 언어란 기계가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된 명령어를 의미한다. 이를테면 블루투스를 이용해 스마트폰을 티브이에 접속시켜 영상 데이터를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다. 두 장치가 원활히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은 표준화된 개념과 개념들 사이의 관계성, 즉 코드가 준수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터넷이나 디지털 기기에 접속할 수 없는 아날로그 라디오의 경우엔 하드웨어의 차이뿐만 아니라 정보 교환을 매개하는 기계어가 결정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언어도 인터넷에 최적화될 것을 강요받고 있다. 네트워크에서 코드를 준수하지 않는 인간의 언어는 노이즈로 처리된다. (209쪽)
BIM 기술은 대상물뿐 아니라 절차와 자원을 함께 고려한다. 구조, 지반, 도로, 수자원 등의 설계에서 공정 관리, 시공 후 관리까지 건축에 관한 모든 정보를 통합한다.6 사용할 수 있는 자원에 대한 내용을 초기부터 고려할 수 있는 통합적인 틀이 제공되기 때문에, CAD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입체적인 정보 모델링이 가능하다. 건축가의 스케치를 정확한 치수로 정리한 그 림 수준이 CAD라면, 정보 모델링 기술을 사용하는 BIM에선 화면상의 선과 면은 중력을 지니고 물질화되며 실제 실현되는 현 실로 이어진다. 건축가가 입력 데이터의 관계를 일일이 설정하지 않더라도, 데이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가치를 부여받아 스스로 ‘정보’가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BIM을 건축가를 위 한 만능 레고 블록에 비유하기도 한다. (209쪽)
DDP를 설계한 자하 하디드의 또다른 대형 프로젝트인 카타르월드컵경기장 건설 현장에 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죽음의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974명이 사망했다. 카타르는 사실상 노예 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인데, 카타르월드컵경기장 건설 현장의 노동 환경과 인권 유린 실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비교될 지경이다. BIM 시스템에 이러한 인권의 문제를 입력할 수 있을까? DDP 건설 과정에서 쫓겨난 영세 노점상의 눈물겨운 사연을 BIM에 반영할 수 있을까? BIM은 이런 언어를 알지 못한다. (211쪽)
가장 빨리, 가장 멀리 질주할 수 있는 것은 자동차도 비행기도 아닌 비트bit다. 휴대폰에서 자동차, 건물, 인공위성, 냉장고 등등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질주하는 아톰atom 비트의 입장에서 모든 장소는 단 하나의 지평으로 융합하고 있다.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모든 연결을 내려다보는 권력의 출현이다. (215쪽)
7장 세상은 듣지 않는다: 인지자본주의와 음향적 신체
유튜브 비디오 조회에는 매달 68만 년의 누적시간이 사용된다. 데이터 유입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1분마다 72시간 분량 이상의 비디오가 업데이트되고 있다. 이곳은 인간의 ‘가동시간 ’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관 tube이다. 유튜브는 시간을 포획하는 형식이자 장치인 음악의 본래 기능을 인터넷 시대에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와 시간 없이 생산되고 소비될 수 있는 음악은 존재한 적 없다. 유튜브와 같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 증식하는 이 시대의 음악 또한 우리의 시간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리즘의 시간성을 신체에 새겨넣는다. (220쪽)
음악을 듣는다? 이 질문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지 않다. 디지털리즘에 사로잡힌 인간은 음악을 듣는 일보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동원한다. (…) 음악 감상 그 자체는 부차적인 임무에 불과하다. 디지털화된 음원 대부분은 소리로 출력돼서 사용자의 귀에 닿기보다는 저장 장치나 서버에 머물며 전력을 축내고 있다. 베케트 연극의 쭈그려 앉은 부랑자 신세나 다를 게 없다. 음악과 신체의 관계는 이 부랑자의 입장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221~222쪽)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오히려 컴퓨터 시스템에서 블랙박스 역할을 하는 로그 파일이 그 모든 상황을 훨씬 더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선택하지 않는 선택’의 목록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무의식은 컴퓨팅 디바이스에 외부화된다. (224쪽)
파스퀴넬리에 따르면 ‘인지자본주의’란 결국 지대rent로 돈을 버는 체제다. 지대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기식적寄食的 소득이다. 전통적으로 토지 재산과 연관되어 있으나 네트의 비물질 공유지도 지대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유튜브만 하더라도 오픈 플랫폼을 이용하는 사용자들 간에 교환되는 것은 시간과 관심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튜브는 그 일이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는 가상의 공유지에 수억 명의 사람을 장시간 자주 머무르게 함으로써 기업 광고를 수주하고 수익을 올릴 수 있다. (235~236쪽)
유튜브는 아탈리의 바람처럼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을 위한 ‘작곡’의 놀이터가 아니다. ‘관심’은 음악을 비롯한 인지 상품 소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니 음악으로 생계를 꾸리는 예술 노동자들은 유튜브 사용자의 시간과 관심을 얻기 위해 훨씬 더 치열한 경쟁에 자신을 내몰아야 한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구경꾼이자 인지 노동자인 사용자가 유튜브에 더 많이 몰리고 더 많은 지대가 창출된다. (236쪽)
아이들은 이마트의 울타리에서 어른으로 자란다. 매장이 지금처럼 계속 늘어나게 된다면 어지간한 동네 어디로 이사 가더라도 이마트를 지척에 두 게 될 것이다. 어쩌면 평생의 동선을 통틀어 가장 빈번히 들락거린 장소가 이마트가 될 수도 있다. 앞으로 이마트 키드의 일생에 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런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지대’가 무엇인지 냉철히 따져봐야 한다. (243~244쪽)
8장 미디어 격변기의 사운드스케이프
‘소리’를 귀와 신경계, 뇌로 연결된 청각의 메커니즘에만 한정 짓지 않아야 한다. 환경과 신체의 접점이자 울림의 또다른 수용체인 피부만 하더라도 몸 전체의 내ㆍ외부를 휘감고 접혀 기관들을 잇닿게 한다. ‘소리’는 몸 전체에서 울린다. 세계와 몸이 상호작용하는 관계망의 울림이 ‘소리’다. (251쪽)
미디어 환경이 급변한다 하더라도 살아 움직이는 우리의 몸에 가장 직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미디어는 인간의 몸뚱이다. 신체는 그 자체로 재매개하는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감성과 감수성이 사회적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증폭되는 현상은 인간 신체의 재매개 과정을 통해 강화된다. (262쪽)
스마트폰의 초고속 성장은 이전 시대의 국민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상대화하는 미디어사史의 임계점이다. 지금의 미디어 환경 변화는 스마트폰만의 예외적 도약이 아니라 라디오와 텔레비전, 퍼스널 컴퓨터, 휴대폰 등으로 이어지며 서서히 영향력과 대중화의 속도를 높여온 역사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스마트폰은 앞선 국민 미디어의 기술을 집약하고 있다. 이 장치는 라디오이면서 텔레비전이기도 하고, 컴퓨터이자 전화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에는 국민 미디어의 역사가 한 몸에 담겨 있다. (263쪽)
아파트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잘 믹싱된 음반을 닮았다. 아파트 환경에서 경제적 가치를 구현할 소리의 정체는 “도시의 혜택을 누리면서 사적인 공간만은 자연의 고요함을 간직하길 바라는,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쾌적함”7을 구현하는 중산층 취향의 뮤자크Muzak다. 성장과 경쟁을 외치는 동시에 평온을 희망하고, 언제나 활기찬 도시를 원하면서 돌발적인 소리는 원치 않는 ‘쾌적함’이란 불가능한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각적인 요소나 촉각적인 요소와 마찬가지로 아파트 환경의 청각적 요소에 대해서도 각 세대는 소유권을 인정받으려 하지만, 소리는 사적 소유의 경계를 가로질러 뒤섞이고 경계 자체를 불분명하게 한다. 따라서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쾌한 감각’을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감각을 무뎌지게 하는 것이다. 중산층의 꿈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기 위해서라도, 감당하지 못할 섬세한 미적 취향이나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 따윈 포기하는 편이 낫다. (268~270쪽)
이마트 취급 물품의 한계는 아파트 공화국 사람들의 무기력, 무능력의 정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 쓸 수 있었던 자생적인 메이커들이었다. 근육을 부풀리고 체력을 키우듯 필요한 능력과 도구를 스스로 구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또다시 미디어다. 새로운 사회적 신체를 키우는 보디빌딩을 시작할 때다. (271쪽)
에필로그 - 인터넷 바깥의 인터넷
김수영이 4ㆍ19 이후의 절망감을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3라고 썼던 것이 생각납니다. 오늘날엔 혁명은 없고,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비치는 영상만 바뀝니다. (279~280쪽)
초기 인터넷은 사용자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능력에 기초한 기술이었지만, 오늘날의 인터넷은 대기업 통신사에 집중화된 클라이언트-서버Client-Server 구조로 바뀌었습니다. 벤처 코뮤니즘 활동가이자 이론가이기도 한 드미트리 클라이너의 설명에 따르면, 오늘날의 인터넷은 자본주의적 금융에 예속되어 있어서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정보 공유지를 유지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은 네트워크에 통합되었고 경제 시스템 전반이 클라이언트-서버 위상구조로 조정되었습니다. 네트워크는 폐쇄적이고 중앙 집중화되고 있습니다. 구글이나 애플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컴퓨팅도 이 과정의 일환입니다. 소비자들이 자신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물리적 인프라를 소유하지 않고 기업 네트워크에 의존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인터넷의 미래는 소수 대기업의 독점적 운영에 최적화될 것입니다 . (283~284쪽)
코딩 언어는 제2의 세계 공용어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국가적인 대비가 필요합니다. 정규 교과로 편입되는 조치도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마도 머지않은 장래에 초등학교에선 가나다라, 구구단과 함께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기초를 배우게 될 겁니다.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서삼경이나 읊던 고루한 선비들이 근대 문학의 새로움에 충격받았던 일을 가까운 미래에 겪게 될 겁니다. 이 아이들이 배우고 익힐 코딩 능력은 ICT 산업에 회수될 인적 자원 수준으로 제한되어선 안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화된 교육장 안에서 배웠으나, 그 틀을 도약대 삼아 탈자본주의로 뛰어넘어갈 수 있는 가속주의적 실천을 새로운 세대에 기대해봅니다. (286~287쪽)
오늘날 우리들에게 인터넷은 준準자연이 되었습니다. 인터넷을 낯설게 바라보기가 매우 어려운 시대입니다.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향해 파선을 분출하는 이종異種의 인터넷은 시작조차 요원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볼 순 없을까요? 컴퓨터라곤 전원조차 켤 줄 모르고, 당연히 이메일은 써본 적도 없으며, 어쩌다 아이패드가 생긴다 해도 부엌에서 도마로 쓸 뿐인 구제불능의 컴맹, 어떤 기계든 때리면 말을 듣는다고 믿는 무적의 무식쟁이, 또는 내친김에 오지 정글의 야만인에게 인터넷을 디자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인터넷을 본래 매뉴얼대로만 사용하려 할 때, 그 매뉴얼을 성립시키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부숴버릴 수 있는 ‘고장’을 궁리해봅시다. (288쪽)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인터넷은 가두리 양식장 신세입니다. 카카오톡 사태가 이 사실을 여실히 증명했습니다. 사생활 보호 기능이 강화된 텔레그램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기본적인 인터넷 접속은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경유해야 합니다. 기업과 국가의 패킷 감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이버 망명은 착각이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이 나라에서 인터넷 패킷 감청설비의 숫자는 무려 아홉 배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 설비가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제대로 밝혀진 게 없습니다. 이 사실은 카카오톡의 보안성 문제 이상으로 심각한 사안입니다. 이런 인터넷 환경을 그냥 내버려두고 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굴종입니다. 정보의 바다가 진정으로 광대해지기 위해선 폐쇄적이고 중앙 집중화된 클라이언트-서버 구조를 깨뜨려야 합니다. (289~290쪽)
반드시 지금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데이터는 지금이 아니면 경험할 기회가 없는 데이터와 감각의 강도强度 차이가 확연합니다. 죽음은 어떤 존재에 ‘바로, 지금’의 광채를 부여합니다. 기존의 인터넷과는 다른 시간 체계가 실험될 수 있는 곳입니다. 제로 타임에 압축된 ‘언젠가’가 아니라 현재를 살라고 재촉하는 인터넷이 포틀래치입니다. 이곳에서 듣는 단 한 번의 말러 교황곡 2번 <부활>은 어떤 느낌일까요? 이곳에서 보는 단 한번의 나운규 〈아리랑〉 상영은 또 어떨까요? 필름의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한 그 작품을 왜 하필 포틀래치에서 보느냐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영화일수록 이곳에서 소모해야 합니다. 평생에 다시 없을 가장 강렬하고 비탄에 찬 영화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라면 포틀래치에서 어떤 데이터를 소모하시겠습니까? (294쪽)
이제 막 고교 1년생이 된 1998년생 남자아이 둘(박성범, 윤형근)이 SNS 커뮤니케이션 ‘하루’를 개발했습니다. (…) 이곳에서 오래갈 글의 가치는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유사한 ‘오호라’를 눌러서 유지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한 정보는 하루 만에 사라지고 가치 있는 정보만 지속합니다. ‘하루’ 페이지에 글을 작성하면 작성한 글 오른쪽 위에 작성한 시간과 “24시간 남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생깁니다. 작성한 글 하단에 ‘오호라’를 누르면 하루가 더 추가되었다는 문구가 나타납니다. (…) 어른들이 입으로만 투덜거리며 살던 대로 그냥 살고 있을 때,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삶의 도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 아이들의 건투를 빕니다. (299~300쪽)
검색되지 않을 자유임태훈 저 | 알마
이 책은 정보통신 기술뿐만 아니라 건축, 의료, 음악, 패션, 사진, 기억과 죽음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변화상을 전방위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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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색깔에 관한 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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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박정희체제의 사운드스케이프와 문학의 대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디어의 역사, 소리의 문화사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 기획 위원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 저작으로 《우애의 미디올로지: 잉여력과 로우테크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이 있고, 공저로는《문학사 이후의 문학사》 《옥상의 정치》 《불순한 테크놀로지》가 있다. 미디어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는 극작을 했었다. 학부 2학년이었던 1999년에 삼성문학상 희곡 부문에 〈애벌레〉라는 작품이 당선됐다. 이 작품은 이듬해 실험극장 40주년 기념작으로 공연되어 한국 연극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작품상’을 수상했다. 2006년 문학비평으로 등단하고 여러 문예지에 문학비평을 발표했다. 비평가이기보다는 창작자의 삶이 더 좋았고,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오픈뮤직네트워크’와 ‘책 읽는 라디오’에서 다수의 인터넷 방송을 제작했고, 《판타스틱》 《네이버 캐스트》 《계간 미스터리》 등의 장르문학 매체에 에스에프와 추리소설을 발표했다. 2006년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식민지기 소리의 모더니티에 관한 석사논문을 썼다. 이때부터 기술사, 문화사, 미디어 이론과 역사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 분야의 연구자, 미디어 아티스트, 활동가들을 만나 깊은 감화를 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강렬한 영감을 전하는 사람, 피뢰침과 번개의 역할을 모두 맡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다.
<임태훈> 저15,750원(10% + 5%)
빅데이터 시대에 대한 포괄적인 문제 제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 이래, 감시사회의 가능성은 지식인들이 미래를 상상할 때 언제나 고려하는 상수常數가 되었다. 어디서 무얼 하든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빅브라더’의 존재는 정보사회의 전개와 함께 더욱더 개연성 있는 서사로 자리매김했다.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