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한때’는 앞뒤 시간이 없는 매혹의 절단면
‘한때’는 봄의 시간이다. 마른 대궁이에도 물기가 생기고 죽은 가지에도 새순이 돋는 시간. 사위는 푸르러진다. 공기는 안온하고 빛은 싱그럽다. 자연에 속한 모든 것은 겨울을 겪는다. 그러나 봄에 다시 겨울을 잊는다. 이 망각은 정신의 나태함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감각의 충실성에 따른 결과다. 꽃이 피기 직전, 아니 꽃이 막 피려는 순간, 혹은 놀라운 집중력으로 엽록소를 빨아들여 순식간에 청록빛으로 물들어가는 몸, 안온한 공기에 도취된 물기 있는 육체는 그 감각 안에서 온전하다. 이 감각적 충실성 안에 이전과 이후라는 시간은 없다. 망각은 나약함이나 방만함 때문이 아니라, 이런 식의 앞뒤가 가파르게 절단된 시간에서도 온다. 현재에 몰입된 절단면에 과거 회상과 미래에 대한 기대나 계산은 없다. 절단이 시간을 순환시키지 않고 정지시킨다. 하지만 이 정지는 정체가 아니라 충만이며 매혹이다. 그러므로 바람의 움직임, 미세한 숨소리, 공기에 실려 오는 먼 곳의 사람 기척과 살 냄새를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예민하고 섬세해졌다고 하여 무엇이 그리 놀랍겠는가.
어린 시절 창경원에는 정오가 되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그 시각에 맞춰 부채 모양의 날개를 펼치는 공작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일찍 그곳에 간 사람이라면 부채 날개를 펼치기 전 공작새의 행복하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리라. 무대 위에 오르기 직전 최종 리허설을 하는 배우처럼, 아름다운 공작새는 제 몸짓으로 곧 만들 육체의 찰나적인 향연에 한껏 몰두해 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 여배우처럼 공작새는 이리저리 제 모습을 살피고 심지어는 제 뒤태를 자랑하듯 우쭐대며 한번 돌아보기까지 한다. 사람만이 나르시시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모든 자연은 도취를 가지고 있으며, 이 도취는 가장 행복한 자기 시간, ‘한때’의 몰입이라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적이다. 이 시간에 대한 매혹은 관객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도취는 그 자체로 충분히 자족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객관의 시선이 사라진 이 자기매혹의 시간에서는 마침내 자기도 잊는다. 공작새가 선 자리에서 상연되는 것은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 배우들 자신을 위한 즐거운 연극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에는 주인공만이 존재한다.
‘한때’는 조건 없는 행복의 연극무대
젊은 시절 알베르 까뮈는 바다가 있는 알제의 작은 마을 티파사에서 다음과 같은 찬란한 청춘의 문장을 남겼다.
봄철에 티파사에서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힌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 뿐이다. 엄청난 열기 속에서 향초들의 육감적인 냄새가 목을 긁고 숨을 컥컥 막는다. … 태양의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진다.
- 까뮈, 「티파사에서의 결혼」 중에서
“나의 왕국은 송두리째 다 이 세계뿐이다”고 말한 이 절대적으로 자족적인 청춘이야말로 생 내내 그에게 몸과 정신에 물기를 가져다 준 ‘한때’였다. 그는 티파사의 ‘한때’를 늘 떠올렸다. 기억했으나 항상 생생했고 그의 현재 속에 살아있다는 점에서, 티파사의 ‘한때’는 현재 아닌 현재였으며, 가지 않은 과거이자 이미 와 있는 미래였다. 그는 말한다. 누구에게나 “태양의 입맞춤과 야성의 향기 외에는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여겨”지는 ‘한때’가 있다고. 까뮈는 이 시간에 “구태여 신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딱한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인생에는 형이상학과 논리적 이유?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복에의 전적인 몰입의 순간이 있다. 우리는 이 ‘한 때’를 “정복하기 위해 나의 힘과 모든 능력을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내 본연의 모습을 그르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그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는다. 그네들의 모든 처세술 따위에 못지않은 저 어려운 삶의 지혜를 참을성 있게 깨우쳐 가면 되는 것이다”
배우이기도 극작가이기도 했던 까뮈는 인생을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로 여겼다. 그는 배우가 역할을 잘 끝낸 후 느끼는 만족감에 이 ‘한때’를 비유한다. “나는 인간으로서 내가 맡은 일을 다 했다. 내가 종일토록 기쁨을 누렸다는 사실이 유별난 성공으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행복해진다는 것만을 하나의 의무로 삼는 인간 조건의 감동적인 완성이라고 여겨졌다” 그에게 행복에 대한 전적인 몰입은 인간됨의 ‘영광’이 상연되는 연극무대이고, “바로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라는 생의 자연스러운 충동을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었다. 언뜻 잘못 이해한다면 이는 허무주의자의 무책임처럼 보이지만, ‘부조리’의 작가였던 까뮈에게 ‘행복한 한때’에의 몰입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고 유한한 생에 찾아온 삶의 시간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순간의 기쁨을 위해 분투하는 성실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들은 어떤 고독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되찾는 고독은 만족감을 동반한다”는 말을 겨우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지점에서이다.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에 충실한 것은 실은 고독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처세술”을 무시하고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은 욕망의 정직성, 행복에의 충동을 따르는 삶이기 때문이다. ‘가면과 처세술’로 구축된 세계, 그것을 우리는 ‘사회’라고 부른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행복을 향한 전적인 몰입이나 욕망을 향한 투쟁은 통제되거나 억압되거나 지연되거나 ‘적당히’ 타협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때’의 시간은 이 억압도 지연도 타협도 거부한다.
‘한때’는 가장 순결한 원형의 시간을 향한 기도
폴란드의 작가 쉼보르스카는 ‘한때’를 이렇게 말했다.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 만치 작았다.
웃으면서 묘사할 수 있을 만큼 간단했다.
기도문에 나오는 해묵은 진실의 메아리처럼 평범했다.
역사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지 못하고
더러운 먼지를 내뿜어 우리를 속였다
우리 앞에는 칠흑처럼 어둡고 머나먼 길과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
- 쉼보르스카,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중에서
이 시인에게 “한때”의 찬란함은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무모함에서 나온다. 이 무모함은 까뮈의 ‘거리낌 없이 사랑할 권리’처럼 사회의 ‘가면과 처세술’을 사용하지 않는 욕망의 충실성, 행복에의 몰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충실성은 다른 고려를 하지 않으므로 ‘한때’의 시간에 속한 이들에게 “세상은 서로 꼭 맞잡은 두 손에 들어갈 수 있으리만치 작”고 “간단”하며 “평범”하게 보인다. 오해하지 말자. 이 간단함과 평범함은 상투적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정직한 욕망은 진정한 “웃음”을 동반하며, 그 기준은 핵심을 관통하므로 ‘기도문의 진실’처럼 간명하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의 최종윤리처럼 ‘한때’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원하는 것을 따라가라’
모든 인간의 ‘한때’가 순결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각자의 ‘한때’를 떠올릴 때 갖는 그 설렘은 우리 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느낌 때문이지만, 여기에서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설렘이 행복을 향해 우리가 발휘했던 어떤 비타협성, 어떤 방식의 욕망의 정직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때’를 떠올리며 나의 무의식은 일순간 “더러운 먼지”로 뒤덮인 ‘지금 여기’의 나를 발견하며 화들짝 놀란다. ‘한때’가 주는 설렘은 내가 ‘한때’ 지닌(지녔던) 아이 같은 원형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은 아닌가. 때로 이 설레고 순결한 시간은 간혹 역사의 문틈으로 찾아들어오는 메시아의 한 줄기 빛처럼 경건할 때가 있다. ‘기도문의 진실’은 행복을 바라는 나, 그리고 결국은 나와 네가 모여 이룬 공동의 역사적 시간 속 억압 없는 삶을 향한 순결한 제문이므로.
그러므로 ‘지금 여기’ 현재 시간 속 ‘역사의 실패’는 “죄악으로 오염된 우물, 쓰디 쓴 빵 조각만 남았을 뿐”이지만, “한때”의 무모함과 행복을 향한 열정을 기억하는 일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더 이상 ‘죄악’으로 오염시키지 않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늘 중요하다. 그것은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는 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생의 시간, 행복에의 약속을 다시 도래케 하려는 자들의 기억의 윤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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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알베르 까뮈
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