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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한 마디 -연극 <이기동 체육관>

사람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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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준비하기 직전, 배우들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줄넘기를 하고, 펀치를 연습하는 장면은 단연 백미다. 빠른 비트의 음악, 강렬하게 번쩍이는 조명을 받은 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권투의 미덕은 정직이다.

“똑같은 체중에 똑같은 빤스만 입고 맨몸으로 싸우는 거야.

어때, 멋지지 않냐?”

 

권투만큼 테스토스테론을 자극하는 운동이 또 있을까? 맨몸, 맨주먹으로 한 놈이 완전히 드러누울 때까지 겨루는 사각링! 연극 <이기동 체육관>에도 권투 로망에 사로잡힌 동네 이웃들이 모였다. 아, 물론 권투로 상사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풀려는 서대리, 몸매 관리 하는 애숙 언니, 일진에게 복수하려는 날라리 청소년 등 권투가 필요한 사람들도 체육관에 보인다.

 

널찍한 체육관 무대. 배우들은 체육관을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고 서로 티격태격 말을 나눈다. 더할 나위 없는 생활연기 덕에 극장은 오롯이 ‘이기동 체육관’이 됐다. 실감나는 연기와 그 속에 녹아있는 깨알 같은 유머로 배우들은 단숨에 객석을 몰입시킨다.

 

"챔피언, 인생의 한방이 있었던 사람들”

 

운동의 목적은 우승이다. 권투의 목적은 상대를 쓰러뜨리고 유일한 1인자, 챔피언이 되는 거다. 비록 한물 간 왕년의 챔피언이라고 해도 정말 챔피언이었다면, 그는 인생에서 가장 멋진 한 순간을 간직한 사람이다. 챔피언은 그런 사람이다. 맨몸으로 겨뤄서 제대로 한방을 날렸던 사람들. 생각만 해도 멋지다. 싸이가 우리 모두가 챔피언이라고 했는데 그건 각자의 한방을 가져보자는 얘기겠지.

 

이 체육관의 관장, 이기동 씨 역시 왕년에 대단한 챔피온이었다. 지금은 헝클어진 머리, 퀭한 얼굴, 누추한 모습에 챔피온이라는 타이틀이 영 어울리지 않지만, 예전에는 ‘미친 탱크’ 이기동이 링에 오르면 모두가 환호하던 시절이 있었다. 화무십일홍이라,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이기동 이름을 걸어놓고 체육관을 차려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런데 여기 자신을 이기동이라고 소개하는 젊은이가 관장님의 오랜 팬이라고, 권투를 배우겠다고, 아니 그보다 이기동 선수에게 꼭 묻고 싶은 게 있다며 체육관에 찾아왔다. “챔피온이 되기 직전, 정말 딱 한방이면 상대를 날려버릴 수 있던 그 순간, 왜 가만히 서 있었어요?”

 

이기동


삶이 고장나버린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

 

김수로, 강성진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연극이지만, 우리네 일상, 집 앞에 있는 동네 체육관이 배경인 만큼 <이기동 체육관>은 상대적으로 언론에 조명을 덜 받는 배우들의 캐스트로 관람해도 꽤나 매력적이다. 오히려 훨씬 실감난다고 할까. 실력으로는 뒤지지 않는 배우들이 연기만으로 매력 발산을 하는데, 간만에 연극의 참맛을 느꼈다. 유연한 연기의 유쾌한 맛, 쫄깃한 대사 맛, 기대 이상의 장면을 선사해주는 연출의 맛.

 

당신이 극중 이기동이 누군지 모르고 들어갔다고 해도 공연을 보고 나올 때는 이기동을 연기한 배우 김동현의 이름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이기동은 어린 시절의 영웅 이기동 선수와 동명이인으로, 늘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시간강사지만, 어떻게든 이기동(자신 혹은 관장)의 시간을 움직여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기동의 연약한 모습, 어린 시절의 꿈과 지금의 현실 등 다양한 모습을 매력적으로 보여주고, 참으로 연극적인 대사도 특유의 리듬으로 개성있게 펼쳐낸다. 체육관의 분위기메이커 마 코치와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이기동 선수(이국호), 그의 뒤를 따라 챔피언을 꿈꾸는 딸 연희(문진아)의 호흡도 좋다.


“제발, 힘 좀, 내요”

 

사람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은, 간절히 바랐지만 이루지 못한 일들이다. 내가 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한 일들은 평생의 아쉬움으로 떠오른다. 기억 속에서 부풀려지기도 하고, 현재의 처지를 비관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테고 말이다. 하물며 평생을 꿈꾸고 노력했지만 이루지 못한 꿈을 가진 사람들은 어떨까? 시간이 흘러 더 이상 기회도 없고, 희망도 없을 때. 하나의 문을 열기 위해 달려왔는데 그 문이 좀체 꼼짝하지 않을 때, 그 어둠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런 모든 이기동에게, 젊은 이기동이 극 속에서 내내 외친다. “이기동! 제발! 힘 좀 내요! 제발 힘내요!”

 

그 절절한 무대의 외침. 객석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힘내라,는 말처럼 힘나지 않는 말도 없지만, 여기 <이기동 체육관>에 울리는 그 외침은 당신의 얼은 마음도 녹일 만큼 강력하다. 살면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안될 수도 있는 거다. 그래도 우리. 아직 함께이니까 우리, 힘 좀 내고 살자고.   


“나처럼 눈이 퉁퉁 부었는데, 맞고만 있지 않은 거예요.

쓰러지고 일어나고 쓰러지고 일어나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양손에 붕대를 감고, 열심히 줄넘기를 하고, 있는 힘껏 스파링을 한다. 권투를 연기하는 게 아니라, 등이 흠뻑 젖도록 무대 위에서 권투를 한다.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권투의 참맛, 쓰러져도 일어나는 권투 정신을 그대로 무대 위에서 보여주겠다는 듯이. 오랜 시간 훈련을 받고 준비한 배우들의 움직임이 좋다.

 

대회를 준비하기 직전, 배우들이 말도 없이 한참 동안 줄넘기를 하고, 펀치를 연습하는 장면은 단연 백미다. 빠른 비트의 음악, 강렬하게 번쩍이는 조명을 받은 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배우들의 몸은 대단히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권투의 미덕은 정직이다. <이기동 체육관>의 미덕 역시 정직한 배우들의 무대였다. 다가오는 연휴, 가족과 친구와 훈훈하게 볼 수 있는 작품. <이기동 체육관>은 9월 14일까지 예술마당 2관에서 공연된다.

 

 

 

이기동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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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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