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당신을 미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클래식 에세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펴내 책을 읽어 음악이 느껴지는 상태를 소망한다 클래식 초심자들에게 제발 부탁한다! 단계란 없다! 우선 들어라!
시인이자 문화평론가 김갑수가 클래식 에세이집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를 썼다. ‘소리가 들리는 책’을 쓰고 싶었다는 저자의 소망처럼, 읽다 보면 낯설고도 익숙한 선율이 들리는 것만 같다. 3만 여장의 LP와 CD가 있는 작업실 ‘줄라이홀’에서 김갑수를 만났다.
김갑수는 시인,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을 갖기 훨씬 전부터 클래식애호가, 컬렉터였다. 마포에 있는 그의 작업실 ‘줄라이홀’에는 3만여 장의 LP와 CD, 20여 조의 진공관 오디오 기기가 오래된 식구처럼 자리해 있다. 음악을 듣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웬만하면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 김갑수.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면 작업실을 찾는 것이 훨씬 빠르다.
언젠가 황지우 시인은 그에게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말을 잘하면서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는데, 한 명은 이어령 선생, 다른 한 명은 문화평론가 김갑수.”라고. 김갑수는 글맛 못지않게 입심도 뛰어난 말꾼이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는 미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김갑수가 스스로를 미치게 만든 ‘클래식’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1부 ‘추억의 음악, 일상의 음악’에서는 인생과 음악에 대한 단상을, 2부 ‘레알 작곡가 뒷담화’에서는 베토벤, 에릭 사티, 리스트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흥미로운 비화를, 3부 ‘죽이는 연주가들’에서는 독보적인 명연주가들과 지휘자, 성악가들을 소개했다.
클래식을 사랑한 한 남자의 40년 열정이 400쪽 분량에 고스란히 담겼다. 단순한 클래식 길라잡이로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방대한 이야기 분량에 놀랄 것이다. 또 좀체 지루할 틈이 없어 당황할지 모른다. 김갑수는 세계적인 지휘자 세르주 첼리비다케를 소개하며 ‘총으로 쏘아죽이고 싶었던 지휘자’라는 타이틀을 넣고, 앙드레 프레빈을 두고 ‘한국인이 애틋해 할 바람둥이’라고 말한다. 클래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퍽 호기심이 이는 제목이다. 껄렁껄렁한 태도로 한 페이지를 열었다가 훅을 맞았다. 저자가 미친 이유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떠나간 열차가 아름답게 미화되는 현상이 책에 녹아 있다. 나는 오늘의 이 21세기가 참 재미없다고 느낀다. 청년기를 보냈던 지난 20세기는 광분의 시대였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는 제목이 그래서 나왔다. 광분의 20세기적 감흥을 떠올리며 그 음악에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고. 또한 여러 면에서 돌아버릴 것 같은 21세기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고. 이 상반된 미침의 양다리를 공감할 사람이 많으리라 믿는다. 미치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세상 벗들에게 다시 또 말을 건넨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7쪽)
제목만 읽고는 클래식에 관한 책인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지금까지 펴낸 모든 책의 제목을 직접 지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는 다소 파격적이다.
이 책은 에세이집 같기도 하고, 잘 보면 클래식 책이고. 모호할 수 있다. 제목을 지을 때는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인상적으로 기억될까?’를 고민하게 되는데, 생각을 하다 보면 끝이 없다. 나는 책 제목을 지을 때, 내 심중의 생각을 넣는 편이다. 정말 음악이 좋을 때가 있지만 언제나 늘 좋은 건 아니다. 살면서 사람들이 미칠 것 같은 열정을 느끼는 순간이 있는데, 이건 종목별로 다른 거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희열을 느끼는가 하면,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면서 최고의 행복을 느낄 때도 있다.
나에겐 어떤 음악과 교감되는 순간이 다른 어떤 것과 필적할 수 없는 시간이다. 미칠 수밖에 없는 거다. 또 글을 쓰면서 21세기 오늘의 현실을 생각했을 때,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금 퇴행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책 제목은 글 쓰는 사람의 심중의 집약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클래식 정보를 담은 책이 아닌, 저자 개인의 삶이 녹아 들어있는 클래식 이야기다. 특별히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흥미롭게 읽을 책이다.
클래식 음악에는 50년, 100년, 200년 시간의 편차가 있다. 바흐, 베토벤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생애적인 관심, 음악학자의 분석이 아니라 뭔가 한방에 통하는 에센스 같은 요소를 접하게 된다. 물론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그동안 클래식을 좋아하고 들으면서 얻은 경험과 핵심적인 사실들을 녹이면 읽는 사람들도 자기화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했다. 또 클래식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높은 차원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이 그 문턱을 조금 낮췄으면 한다.
글이 무척 재밌는데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다.
내 글이 웃기고 재밌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웃음). 내가 그다지 웃길 줄 아는 사람은 아닌데, 글을 쓰다 보니 갈수록 심각해지더라. 어쩔 수 없이 내가 사는 세상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내 자신에 대해서도 무거워진 것 같더라. 책을 엮으면서 ‘내가 갈수록 무거운 삶을 살고 있구나’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중학생 때부터 클래식을 즐겨 들었다. 어릴 때부터 고전음악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있었나?
개인사가 행복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는데 도피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때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는데 헤드폰이라는 걸 처음 봤다. 같이 간 친구들은 딱지를 치고 놀았는데 나는 헤드폰을 끼고는 꼼짝 못하는 상태가 됐다. 음악을 들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소리를 들은 거지.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할 줄은 몰랐다. 대학에 가서 소위 유흥을 접하게 됐는데도 음악에 대한 마음이 식지 않았다.
LP, CD는 아직도 수집하는지.
한 달에 300, 400만 원 정도 쓰는 것 같다. 예전에는 회현동에서 주로 샀는데, 요즘은 예스24와 같은 온라인몰에서 주로 구입한다. 작업실 외에 집에도 베란다에 음반이 가득 쌓여 있다. 나에겐 수집이라는 개념이 아닌데, 한 아티스트의 앨범을 들으면 그 아티스트가 다른 연주가와 작업한 음악을 듣고 싶은 거다. 그러니 구해야 할 대상이 한도 끝도 없다.
작업실에서 만나는 약속 외에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고.
한 달에 한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하다. 대게 밖에서들 만나니까 이제 아무도 안 불러준다(웃음). 어제도 방송 촬영 끝나고 뒤풀이를 잔뜩 갔는데, 나는 그냥 나왔다.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 건 아니다(웃음). 술을 별로 좋아하질 않는데,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 제대로 음악을 들을 수 없다. 두 명이 넘어버린 모임은 파티다. 음악에 집중할 수가 없다. 난 오전이나 낮 시간이 많은 사람인데, 그 시간에는 음악에 집중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밤에 음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유일한 방법이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 취미가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야생풀에 대해 알려고 해도 10년을 공부해야 한다.
1999년에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 2009년에 줄리아홀 이야기를 담은 책 『지구 위의 작업실』을 펴냈지만, 클래식을 본격으로 다룬 건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가 처음이다. 저자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닐 것 같다.
책을 쓰는 건, 흩어진 것을 집약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갑수라는 사람의 음악 듣기가 클래식 영역에 집약된 이유가 있을 거다. 아주 쉬운 말로 하자면, 이게 굉장히 근사한 일이라는 거다. 한 사람의 인생 40년을 바친 일 아닌가. 스스로에게만 충족되어도 될 일인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타자들과 뭔가를 공유하고 싶고 피드백을 받고 싶은 열망이 있다. 클래식의 세계라는 게, 너무 근사한 세계니까 누구에게라도 전하고 싶다. 전통적인 감상의 행위는 사람의 삶을 가치 있게 한다. 인생의 내용을 상상 이상으로 깊이 채워줄 수 있는 도구다.
클래식 감상을 취미로 두는 일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갖는 사람이 많다.
클래식에 관심이 있다면 부디 음악 파일을 찾기 말고 CD를 사라고 말하고 싶다. 요즘은 CD가 아주 저렴하다. 구하기도 쉽다. 자기 돈을 투자해야 그게 소중해지고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다. 최소한 물체가 있어야 하는데, 파일은 물체가 아니다. 허무하게 와서 허무하게 흘러간다. 카오디오로 클래식을 듣는 것도 좋다. 음향학자가 음악이 있는 공간에 대해 분석해서 낸 책이 있는데, 차 안에 뜻밖에 굉장히 좋은 콘서트홀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어느 날 한적한 시간에 자유로를 달리면서 클래식을 들어봐라. 잘 듣다 보면 달리 들리는 수가 있다.
흔한 질문이겠지만, 클래식 초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다. 그동안 “저는 음악을 아무 것도 몰라요”라는 소리를 정말 많이 들었다.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음악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음악을 지고한 교양이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식견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음악 수업을 들은 상식이라면 더 이상 지식으로써 익혀야 할 건 없다. 다만 익숙해져서 늘어나는 건 있을 거다.
“초보자는 뭘 들어야 좋을까요?”라는 질문도 많이 하는데, 그런 거 생각하지 말라고 답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른 것처럼 클래식 감상에도 절대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어떤 사람은 굉장히 복잡한 현대음악에 빠져드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가볍고 귀여운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좋아한다. 어려운 음악이란 없다. 어려운 음악을 쓰려고 작곡하는 사람도 없다. 어렵다고 느껴지는 건 음악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조금 복잡할 뿐이다. 단계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핵심으로 바로 들어가서 우선 듣자. 약간 건방진 감정을 갖고 듣는 것도 좋다. 난 지금 멋진 행위를 하고 있다고.
특히 어떤 독자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나?
오후 시간이 공허한 아줌마들, 특히 30, 40대가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들의 딱한 모습을 많이 본다. 적어도 20대까지는 이것저것을 하느라 자동적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상을 보냈는데, 그 다음 단계가 되면 삶이 공중에 뜬다는 느낌을 갖더라. 그래서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데, 뭐 좀 배우지 말았으면 한다. 학원, 동호회, 소모임. 이런 걸 하는데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는 만들어줄 수 있지만, 그 경우의 수가 희박하다. 나도 가르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안다. 강사가 아는 걸 상대방에게 쏟아 붓는 걸로 끝날 때가 많다. 스피노자가 말했던가. “자기 인생의 내용물은 혼자 가만히 있는 상태”는 말이 있다. 가만히 있는 상태가 견디기 힘들면, 독서와 음악 감상에 시간을 투자해봐라. 그것만큼 인간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게 없다.
시는 많이 썼지만 시집 출간을 꺼리고 있는 이유가 “모든 예술가에게 진정한 작품은 데뷔작 하나뿐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오래 전부터 해온 이야기인데, 시인이라는 건 사람 자체가 시여야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인간인가에 대해 가장 투명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게 시였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시를 썼는데 나 나름대로의 엄숙주의가 있었다. 시를 쓸 줄 아는 게 하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만 시를 쓰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이야기를 하자면 구구한 말들이 될 텐데,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느 시점부터 나는 시인처럼 살고 있지 않으니까 시집을 펴낼 수 없다. 간혹 모든 걸 때려치우고 시인으로 살자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그 결심이 3일을 채 못 간다. 이 수많은 음반들을 없애야 가능한 일인데, 물건들이 나를 덮어 씌우고 있기 때문에 포기한다. 아마 잘 안 될 것 같다. 청탁을 받으면 간혹 시를 쓰긴 한다.
“음악은 상당히 게으르고 무책임해야 즐길 수 있다”고도 말했다.
예전에 중부시장 멸치골목에 있었던 바흐 스튜디오를 자주 갔었다. 그 시절에는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는 걸어 다녀야 했고 담배를 줄이고 점심 메뉴는 최고로 싼 걸 먹어야 했다. 바흐 스튜디오 양차열 사장이 정말 재주가 좋았던 사람인데, 미군부대에서 넘어온 진공관 오디오 같은 걸 그렇게나 잘 고쳤다. 스튜디오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게 한갓지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든 유형이 아니었다. 그런데 언제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음악의 뒷담화를 펼쳐나갔다. 처절하고 궁상스런 이야기들도 많이 했는데, 지금 제법 나이가 들고 식견이 쌓이고 그 때를 되돌아보니,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의 상당 부분이 제대로 된 이야기더라.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가 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더라는 거다. 그 시절 멸치들이 했던 이야기와 특별히 다른 냄새가 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과 음악을 들을 때, 충만한 기분이 드나?
작업실 손님의 99%는 특별한 의미 없이 그냥 온다. 그런데 가끔 음악을 오래 들은 선수들이 온다. 그러면 상황이 확 달라진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무언가를 오래 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거다. 선수들하고 자리를 함께 갖게 되면 다른 상황이 벌어진다. 음반이 꽂혀 있고 오디오가 있을 뿐인데 빛이 난다. 똑같은 음반을 들어도 내가 들을 수 있는 함량이 많이 늘어난다.
아무렇게 살아 버려도 괜찮다
대학에서는 국문과를 전공했다. 음악에도 빠져 살았지만 먼저 탐닉한 건, 문학이었다. 어떤 책을 발견할 때, 희열을 느끼는지.
책을 읽는 이유는 세 가지로 꼽을 수 있다. 감동, 재미, 그리고 지식. 그 셋이 교차할 때 우리는 기쁨을 얻는다. 웃기는 방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작가가 어떤 걸 감춰 놓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 같은데 나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역설적인 쾌감이 있다. 영화에서는 홍상수 감독이 그렇지 않은가?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알만한 사람만 알아도 된다’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든다. 도처에 깔린 수많은 메시지를 관객이 제 능력껏 보면 되는 거다. 책도 마찬가지다.
저자와의 교감이 중요한 건가?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대부분의 저자들과 비슷한 연배, 혹은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됐다. 특별한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세계에서 쓰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결국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이야기를 하고 독자에게 어떤 도움, 즐거움을 주는지가 핵심인데, 일종의 저자와 독자와의 다이얼로그가 활발히 이뤄지는 책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글을 쓰다 보니, 스스로가 무거워졌다고 이야기했는데. 요즘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농담이 될 수도 있지만 농담이 아닌 말인데, 아무렇게 살아 버려도 괜찮다는 거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인 것 같다. 둘이 결합된 걸로는 타인의 시선에 잘 보여야 한다는 압박도 있다. 내가 성공 따위에는 관심 없이 살았다고 말하면 허세가 되는데, 지금까지 내 삶의 방식은 성공과는 무관했다. 그런데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있고 당분간 거지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사람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에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돈이 많아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삶의 충족도는 돈의 높낮이와 정말 상관 없다. 인간은 무엇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최소한의 편의를 위해 국가 시스템을 만든 건데, 사람이 그것을 위해서 살 수는 없는 거다. 언젠가 이 문제에 대해 정교하게 다듬어서 글을 한 편 쓰고 싶다.
시인, 문화평론가, DJ, 칼럼니스트, 방송인 등. 타이틀이 많은 사람으로 사는 삶은 어떠한가?
(웃음)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타이틀이 붙지 않는 거다. 나는 그래서 가끔 비탄한 감정에 빠진다. 나는 왜 무엇이 되지 않지? 생각해보면, 이유는 있다.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 적이 없다. 할 수 있는 것들, 다가온 것들을 했을 뿐이다.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말을 잘하긴 어렵다고 한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저자가 그런 경우다.
마이크 앞에 서면 편안해진다.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졌다가도 마이크 앞에 서면 뽀얗게 흩어진 것들이 정리된 느낌이다. 한 번도 따로 연습을 하거나 훈련과정이 없었다. 덜컥 방송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온 거다. 만약 말을 아주 잘했더라면 대중강연 강사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을 거다. 내 경우는 말을 잘한다기보다는 수다스럽다는 게 맞을 거다. 집중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말을 잘 못한다는 편견이 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과 글이 어째서 분리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나는 어떤 원고를 쓰든 내 뇌에 있는 생각을 가지고 막 이야기를 한다. 그게 문어체일 때도 마찬가지다. 글 쓰는 행위가 말하는 행위와 결합될 수 없다는 게 이해는 안 가는데, 현실에는 많이 보인다.
말하는 나와 생각하는 나, 두 자아를 분리하는 게 쉬운 사람이 있고 어려운 사람이 있을 텐데.
내가 지금 선생 앞에 있는데, 이건 온전한 상태로 있는 게 아니라 말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자아에게 지시하는 상태다. 모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 놓인다. 최소한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분열된 자아가 동시에 구현된다. 말하는 상황이라는 건, 말하는 나를 의식하는 또 다른 자아가 쳐다보는 상황이 만들어지니까. 그 분리가 잘 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글을 쓰면 비교적 온전한 하나의 자아로 어떤 행위를 하게 되니까.
간혹 강연을 할 기회가 있지 않은가. 젊은 사람들, 청춘들에게 하는 말은 무엇인가.
답이 뻔한데, 뻔한 답을 귀 기울여 듣진 않으니까 나로서는 궁리를 한다. 내 답은 하나다. 당신의 나이가 몇 살이든,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자기가 잘 알고 있거나 흥미로운 걸 계속 하라는 말이다. 뭘 하나를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하는 것 이상의 인생에서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 대상이 특별히 가치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생은 좋은 결과물을 낳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니까. 대단히 함량이 높고 근사한 것을 10년간 몰두하는 것과 하찮아 보이는 것에 10년간 몰두하는 것의 결과물은 다르지 않다. 집념을 가지고 어떠한 한 세계에 한 발 더 들어가는 게 중요하다. 이것저것 말고 하나를 오래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 김갑수 저 | 오픈하우스
시인?문화평론가 김갑수의 신작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가 오픈하우스에서 나왔다. 미쳐 돌아가는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니?’라며 그가 안내하는 탈출구는 놀랍게도 ‘클래식 음악’이다. 마포의 어느 고깃집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에 3만여 장의 음반과 수많은 오디오 기기들을 구비해놓고 저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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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도시인은 숨어 있을 공간을 꿈꾼다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만을 위한 지구 위 단 하나의 공간, 작업실 나는 멀쩡한 사람들에게 작업실을 권한다! 『지구 위의 작업실』은 숨 가쁜 현대인의 로망을 일상으로 포섭한 한 남자의 일상, 오로지 작업실에서만 벌어지는 일상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