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지만 글쓰기에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
수업이 시작되고 ‘고종석 문장 비판’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주제가 칠판에 적혔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그리 도발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강의가 진행되는 12주 내내 수강생들은 고종석 문장을 수정해왔으니 말이다. 인사를 마친 고종석은 지난 시간 수강생들이 제출한 글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리 고종석 문장에 대한 의견을 받은 것이었다. 고종석은 다양한 비판을 기대했지만 생각만큼 날카로운 의견이 없었다며 아쉬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대신 그에게 글쓰기에 대한 궁금증을 잔뜩 써 보낸 수강생들이 있었다. 고종석은 자신이 받은 메일 중 몇 가지를 골라 대답하는 걸로 수업을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첫 번째 질문은 고종석이 ‘비롯하다’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데서 시작했다. 고종석은 ‘나를 비롯해’ 같은 표현은 부정적인 맥락에서만 사용하라는 지난번 설명을 보충했다. ‘저를 비롯해서 제 어미, 애비가 모두 역사의 죄인입니다’ 는 가능하지만 ‘나를 비롯해 엄마, 아빠가 애국자다’는 별로 좋은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문장이라는 판단이었다.
다음은 글을 쓰고 싶고, 마음속에 분노도 있는데 글쓰기에 발동이 걸리지 않는다는 고민이었다. 고종석은 소설가 이청준이 자신의 글쓰기가 복수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언급하며 분노와 글쓰기 사이의 관계로 답을 시작했다. 그는 글을 쓰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지만 글 쓰는 사람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 생각하려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며 수강생을 격려했다. 동시에 한걸음 한 글자씩 자신에게 가까운 이야기를 써나가면 가능할 거라 조언했다. 고종석은 달리는 사람에게 고비를 넘기고 나면 찾아온다는 marathoner`s high가 있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는 writer’s high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첫 번째 독자이기 때문에 글을 읽으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이 제법 마음에 드는 순간, 그 쾌감을 맛보게 되면 거기에 중독되어 계속 쓰게 된다는 거였다.
무엇보다 좋은 건, 주변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
글쓰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보내온 수강생도 있었다. 글의 주제를 정하는 것부터 구성과 철학까지 포괄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글의 주제를 어떻게 정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고종석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조언했다. 주제가 있는 청탁은 그에 맞게 글을 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당시 이슈가 되는 주제를 살펴본다고 했다. 이를테면 시리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으면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파업이 진행될 때는 복지나 민영화 문제를, 악플로 인한 사건이 생기면 사람에 대한 예의를 고민하는 식이었다. 그는 개인적 경험이나 시대적 이슈에서 소재를 얻어 깊이 있는 사유가 가능한 주제를 끌어냈다.
고종석은 앞선 수업에서 이야기했던 조지 오웰의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를 떠올려보는 것도 주제를 정하는데 좋은 방법이라 말했다. 어떤 이유로 글을 쓰고 싶은지에 따라 그에 맞는 주제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수강생을 둘러본 고종석은 사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주변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거라 말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 관점에 따라 모두 좋은 글감이 된다는 뜻이었다.
글의 구성과 전개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고종석은 물론 두괄식, 미괄식 같은 교과서적 대답이 있지만 자신은 실제로 그런 것을 생각하며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글에서 구성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므로 글을 쓰기 전에 전체적인 설계도를 그리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처음에는 말이 되는지 아닌지를 너무 생각하지 말고 다짜고짜 쓰는 게 좋다고 했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쓰려고 하면 결국 아무 것도 쓰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키는 대로 글을 쓴 다음 다시 다듬다보면 실력이 늘어날 테니 말이다.
고종석에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노하우나 철학을 묻는 수강생도 있었다. 그는 지금껏 글을 쓰면서 표현적 기능보다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중시해 왔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을 소홀히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고종석은 글을 쓰면서 오는 쾌감 중 대부분은 아름다움에서 오는 쾌감이었다고 말하며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그는 짧은 글을 쓰더라도 한 문장 정도는 수사를 동원해서 인상 깊게 읽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썼던 문장 ‘가장 부끄러운 무능은 부끄러움의 능력을 잃는 것이다.’를 예로 들며 수사를 통해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그가 글쟁이로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노력했던 부분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는 것이었다. 글에서 이름이 지워져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좋았던 순간은 남들이 잘하지 않는 말을 썼을 때라고 했다. 본인이 아니면 안 되는 나만의 스타일을 찾았을 때, 혹은 지금까지 논의되던 지점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썼을 때 글 쓰는 쾌감을 느낀다는 것.
저자와 거리를 두는 책 읽기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고종석은 독서를 할 때, 저자와 거리를 두라고 조언했다. 그는 백낙청 선생의 글을 무척 좋아했던 20대 시절을 떠올렸다. 지나치게 좋아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저자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자기만의 생각을 잃었다고 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말을 맹신하게 되면 스스로 생각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가장 좋지 않은 독서법이라 말했다. 그는 어떤 글도 완전히 좋을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비판적 읽기를 하라고 말했다.
고종석이 글을 쓰게 된 과정을 궁금해 하는 수강생도 있었다. 그는 영자신문기자로 일을 시작하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처음부터 직업적 글쓰기를 했던 셈이다. 고종석은 당시 김우창, 김현, 백낙청 같은 문학비평가들의 글을 많이 읽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 필요한 것들을 메모로 남겼는데 이런 훈련이 글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기발한 표현, 써먹을만한 정보를 모아 놓고 써먹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것으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수강생 중 하나가 좋은 글이 무엇인지 물었다. 고종석은 오랫동안 해온 답이지만, 명료하고 아름다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대답했다. 산문정신의 핵심을 묻는 질문에는 명징성과 간결함을 꼽았다. 이어 글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극대화하려면 무엇보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활용하라고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을 반박하는 글을 쓰게 된다면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선의로 받아들이고 그 해석을 논파하는 게 제대로 이기는 방법이라고 했다. 반대로 그 주장의 허점만 짚어내면 결국 상대에게 재반론에 기회가 생긴다.
문단을 잘 나눠라, 비속어는 자제하자
고종석은 글쓰기의 좋은 점으로 생각이 정리된다는 면을 이야기했다. 정답이 없더라도 질문만으로도 좋은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의문이 들면 결론이 나지 않아도 고민하며 글을 써내려가라고 했다. 그는 글에 대해 상상력의 산물이라거나 재능의 산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지만, 많은 경우 글은 연습을 통해 그 실력이 향상된다고 말했다. 또, 흔히 재능의 일부로 여겨지는 상상력을 기억의 왜곡, 변형이라 보았다. 기억이나 경험이 상상을 만든다는 의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려면 기억과 상상을 많이 축적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음악도 많이 듣고, 좋은 영화도 보고 주위에 있는 작은 사물들도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했다.
강의를 마무리하며 고종석은 몇 가지 작은 당부의 말을 남겼다. 하나는 글을 쓸 때 행갈이에 신경 쓰라는 말이었다. 의외로 많은 수강생들이 행갈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나의 문단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기 때문에 문단을 제대로 나누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문단을 잘 나눌 수 있다는 건 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고종석은 글에서 만큼은 비속어 사용을 자제하라고 했다. 비속어를 사용하면 글 전체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으니 최대한 쓰지 않는 게 좋다고 했다.
수업을 마친 고종석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짐을 꾸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수강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12주간의 공부가 이렇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괜히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고종석이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묻자 수강생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서로 마주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겨우 짐을 챙겨 일어났다. 12주 동안 새롭게 보게 된 한국어의 풍경이 글을 쓰며 살아가는 수강생들에게 단단한 힘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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