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프레더릭 와츠, 「희망」
그녀가 소중하게 껴안고 있는 악기에는 단 하나의 현만 남아 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달래듯 현을 어루만지며 그 현이 내는 떨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희망」이란 노래, 알아?”
아니, 하고 나는 대답했다. 심장 깊은 곳으로부터 무엇인가가 급히 솟구쳤고, 웬일인지 목이 메었고, 덧붙일 말을 찾지 못했다. 친구가 내게 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것 같았다. 내가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친구는 나보다 먼저 알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친구는 나를 데리고 작은 레코드숍으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서서 친구가 그 앨범을 찾고, 계산대 앞에서 지갑을 꺼내고, 잔돈을 받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하얀 종이봉투 안에 담긴 「희망」을 친구가 내게 건넸을 때, 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 노래, 슬플 거 같아.”
친구는 응, 하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노래가 슬프다는 걸까, 내 마음을 안다는 걸까, 그래도 노래를 듣는 쪽이 좋을 거라는 걸까. 나는 두려움으로 주저하는 손을 내밀어 봉투를 받았다. 예상대로, 그 노래는, 지독하게 슬펐다. 나는 슬픔에 잠겨, 슬픔에 흔들리며, 슬픔에 녹아드는 나 자신을 방치한 채로, 그 노래를 백이십 번쯤 들었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즉각적으로 ‘슬픔’을 떠올리게 했던 건, 그 시절의 운명이 나에게 혹독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건 진실이 아니었다. 희망의 뿌리는 슬픔이며 슬픔에서 벗어난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희망은 슬픔 그 자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유를 따져보자 막막해졌다. 논리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 막막함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내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놀랐고, 당황했고, 심지어 (가당치도 않게) 기쁘기까지 했다. 희망이란 단어에서 외로움, 상실감, 슬픔 같은 것을 보는 사람이 나 혼자는 아니구나, 라는 안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여자가 둥근 물체 위에 앉아 있다. 이 물체는 둥글기 때문에 어디에 앉아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둥글기 때문에 안정감 있게 서 있을 수도 없다. 물체는 언제 움직일지 모르고 앉아 있는 사람은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 ‘공이 튀는 방향’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으니 떨어질 자리조차 가늠할 수 없다.
여자는 그 위태로움 위에서 둥글게 몸을 말아 균형을 잡고 있다. 그녀의 낡고 얇은 옷은 피부를 보호한다기보다 다치기 쉬운 피부의 일부처럼 보인다. 조심스럽게 드러나 있는 왼발은 ‘버팀’을 유지하기 위해 오른쪽 종아리를 감아올리고 있다. 오른쪽 다리는 아래를 향해 뻗어 있는데, 떨어질 경우를 대비하여 아래쪽 어딘가에 있을 땅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현악기 하나를 소중하게 껴안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현, 즉 소리를 낼 수 있는 현은 단 하나밖에 없다. 나머지 현들은 오래전에 차례로 끊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달래듯 하나의 현을 어루만지며 그 현이 내는 떨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우리를 향해 있지만, 그녀의 눈은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다. 그녀는 볼 수 없다. 그 ‘볼 수 없음’이 나에게 어떤 치명적인 진실을 전하려는 것 같아서, 나는 오래도록 그림을 응시한다. 누군가 내 눈을 하얀 천으로 가려도 그림의 세세한 부분까지 떠올릴 수 있도록, 보고 또 본다.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둥근 물체의 감촉을 느낀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얇은 옷의 냄새를 맡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텅 빈 우주 속에서 하나의 현이 미세하게 떨리는 소리를 듣는다. 그 찰나, 희망의 끝자락이 막 골목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내가 본 것은 희망의 부재, 그러나 그건 희망이 그곳에 있었다는 증거.
어느 날 짐을 꾸려 나는 여행을 떠난다. 비행기로 열한 시간을 날아가서 차로 다섯 시간을 달린다. 목적지까지는 서너 시간을 더 가야 하지만, 점심식사를 위해 예정에 없던 작은 마을에 잠깐 들르기로 한다. 거대한 산의 기슭에 있는 마을로, ‘나비’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곳이다. 과연, 마을 어디서나 나비를 볼 수 있다. 진짜 나비가 날아다닐 계절은 아니지만, 나비로 만든 장식품들과 입간판들, 벽화와 기념품들까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채비를 하고 있다.
마을의 지도를 얻은 건 마을의 입구와 출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날개를 활짝 편 나비처럼 가로로 길게 뻗어 있는 지형 안에 숙소, 식당, 은행, 가게 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것들의 이름을 훑어보다가 앤티크숍을 발견했다. ‘Odella’s Antiques & Nostalgia’. 점심을 먹고 있던 레스토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식사를 한 후 한번 기웃거려보기로 했다.
이름이 ‘오델라’일 것이 분명한 할머니가 이웃에서 놀러온 친구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저 자그마한 건물이었는데, 보석함 같은 작은 방들이 1층과 2층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오래된 그릇들, 병들, 액자들, 인형들, 책들, LP들, 모자와 모형 자동차와 농기구……. 모든 시간과 공간이 그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고, 나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이 마구 뒤엉켰다.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을 때, 내 눈에 띈 것은 커다란 침대 하나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작은 옷장과 장식장, 서랍장, 화장대에 모두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행히도 주인할머니의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나는 마음을 놓고 천천히 물건들을 뒤적였다. ‘그것’은 바닥에 놓여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바닥에 놓인 거울 속에 있었다. 전신을 비출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화장대에 올려놓기에는 조금 커 보이는 거울은 윗부분이 사진이나 그림을 넣는 액자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그 속에 들어 있는 낡은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건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살펴보아도 분명 「희망」이었다. 누군가 그 그림을 카메라에 담고 인화하여 그 속에 넣어두었다. 사진 아래에 희미한 서명도 남겨두었다. 그리고 누군가 매일 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으리라. 사진을 찍어 넣어둔 사람, 아니면 그에게 거울을 선물로 받은 누군가가. 그는 종종 거울 속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들어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이 사라지고, 거울의 소유자가 사라지고, 사진과 거울은 어느 마을의 작은 가게로 팔려갔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가게의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어느 날,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와츠의 「희망」을 응시하고 ‘희망’에 대해 생각했던 한 이방인이 예기치 않게 그 가게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에서 이방인은 마음에 품고 있던, 낯익은 ‘희망’을 만났다.
나는 더 이상 내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거울을, 사진을, 시간을, 공간을, 세계를, 마지막으로 희망을 의심했다. 희망의 의도를 의심했다. 과연, 희망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내 앞에 나타나야 했던 걸까? 희망이란 원래 그런 거라는 것을 굳이 확인시켜주기 위해, 수십, 수백 개의 우연을 겹쳐놓아야 했던 걸까?
나는 희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으나,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놓여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와츠의 「희망」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본다. 그림 속 모든 요소들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들까지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함과 낯섦이 차가운 바람처럼 심장으로 스며든다. 뭔가 분리된 것, 어긋난 것, 그래서 미묘하게 달라진 것이 그 속에 있다.
문득, 하나의 의문이 고개를 든다. 너무나 명백해 보여서 지금까지 던져보지 않았던 질문. 와츠가 그린 것은 ‘희망을 품고 있는 한 여자’였을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상황은 간결해진다. 희망이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품는 것이며, 따라서 그림 속의 위태로운 요소들은 그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 있다. 이를테면 둥근 물체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불안한 현재, 드러난 맨발은 지탱할 곳 없는 현실, 현이 끊어진 악기는 암담한 미래,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는 구원이다. 그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간절하게 희망을 갈망하고 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현이 소리를 내는 것을 희망의 증거로 품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친절한 직유가 어쩐지 부족하게 여겨진다. 나는 다시 그림을 본다. 그녀를 본다.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맨발과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악기를 쥐고 있는 왼손과 행여 끊어질까 봐 노심초사하며 현을 어루만지는 오른손을 본다. 그녀의 가려진 눈을 본다. 하얀 천 뒤에 있을 그녀의 눈동자를 보려 한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것을. 그녀가 바로 희망 그 자체라는 것을.
희망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현재와 현실과 미래와 구원을 직시하는 순간, 희망은 희망을 잃고 만다. 희망이 희망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희망 외의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희망은 스스로 눈을 가린다. 둥근 물체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도, 현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잊기 위해.
들리는가, 당신. 희망이 내고 있는 이 연약한 소리가. 천 개의 어두운 길에서 단 하나의 밝은 길을 만들어내는, 캄캄한 소용돌이 속에서 굽이치며 흘러가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가. 만약 당신이 희망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그것을 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희망의 눈을 가려라. 그 어떤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담고 있지 않은, 순결한 하얀 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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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으면 황경신 저 | 아트북스
황경신의 세 번째 그림 에세이. 첫 번째 그림 에세이 『그림 같은 세상』이 스물두 명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 책이었고, 두 번째 그림 에세이 『그림 같은 신화』가 신화를 주제로 한 그림들을 모아 풀어낸 신화이야기였다면, 이번에는 그림에서 출발해 황경신이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그림을 보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눈을 감고서 떠오른 것들에 관한 것이다. 그림이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들, 어쩌면 그림이 끝끝내 숨겨놓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황경신 작가의 감은 눈을 통과하여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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