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지도층이라는 표현이 통하는 뮤지션이다. 무한궤도, 넥스트, 모노크롬, 비트겐슈타인 등 그때그때 음악적 자아를 새긴 팀으로 1990년대 음악계 최전방을 누비고 다녔다. 서태지, 신승훈, 김건모 없는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없는 것만큼, 신해철 없는 그 시대를 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존 가치와 질서가 무너지면서 혼돈스럽고 힘겨웠던 세기말의 청춘들은 현실을 리얼하게 드러내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신해철과 넥스트의 음악에 동감했고 위로받았다. ‘도시인’, ‘인형의 기사’, ‘껍질의 파괴’, ‘날아라 병아리’, ‘Komerican blues’, ‘Hope’, ‘해에게서 소년에게’, ‘절망에 관하여’, ‘니가 진짜 원하는 게 뭐야’
밴드 음악 이전에 아이돌로 불렸던 때에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안녕’, ‘나에게 쓰는 편지’, ‘재즈카페’ 등등 솔로 곡도 즐비하다. 거슬러 올라가 1988년 대학가요제의 그랑프리를 안긴 무한궤도 시절의 ‘그대에게’는 이제는 추억이다. 그가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든 간에 음악에 대한 그의 뜨거운 박동과 올인하는 의지는 변함이 없다. 아니, 늙어 죽을 때까지 음악에서만큼은 비등점을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초장기전이다. 예순까지 살아서 진진발이로 가서라도 음악은 계속할 것이다.”
[ IZM ] 신해철의 곡조와 멜로디 생산력에서 가히 천재다. 곡 하나에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복잡한 결과물을 빚어내도, 그 점 때문에 수많은 명곡이 팬들 곁에 있게 된 것 같습니다.“넥스트는 아트 록과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을 수직 수평으로 구성하면서 그 속에서 다채롭게 이 장르 저 장르를 넘나들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제 팬 중에는 아이돌 스타일 때 확보했던, 오빠음악이라고 따라간 팬들도 많았어요. 만약 이러한 멀티 팬 베이스가 말씀하신 멜로디 펀치력이 작용하는 것이라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 IZM ] 팬 중에는 대학생이나 지식인층이 많습니다. 그들은 꼭 짚어낸 가사에도 열광했죠.“인텔리겐차 양아치라고 할까요. 출신 성분이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죠. 배웠으면서도 기성과 현실을 따라가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 IZM ] 메탈과 1990년대 이후 모던 록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메탈이냐 모던 록이냐 두 가지밖에 없다면 당연히 메탈을 택해요. 나는 어차피 어느 하나를 오소독스하게 파 본 적은 없어요. 지금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록의 아이콘처럼 얘기할 때 사실 무지 민망해요. 나는 댄스뮤직 가수 출신이거든요. 그 정체성을 내가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봐요. 나는 무한궤도로 데뷔를 했으니까 밴드보다는 그룹사운드출신이죠. 라스트 그룹사운드, 무한궤도는 밴드라기보다는 라스트 제너레이션 오브 그룹사운드예요. 솔로 1, 2집 했을 때, 그때 내 평생 기반을 만들어서 넥스트를 만들도록 해주었으니 고맙긴 한데, 방송 나가서 춤도 추고 발라드도 하고, 그러다가 밴드 만든 거라서….”
[ IZM ] 넥스트 때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끌리는 앨범은 뭔가요?“넥스트 앨범 중에서 지금까지 제일 만족한 건
<라젠카>예요. 어쨌든 라인업 가지고도 허구한 날 흔들리던 밴드가 그때는 고정되어 있었고. (김)세황이도 연주로 만족을 시켜 줬고, 보컬도 내가 그나마 그때가 좀 늘었을 때입니다. 표현 못 할 것도 할 수 있을 때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앨범에서 이런저런 요소들을 다 봤을 때 평균치가 제일 높아서 좋아하는 거예요.
같은 경우는 다른 거는 창피하지 않은데 포스트 프로덕션 점수가 낙제점이 나와 버리니까. 어느 한 과목이 낙제를 받아 버리면 그 앨범을 마음속에 두고 있을 수가 없어요.”
[ IZM ] 김세황에 대해 말한다면.“김세황에게 저는 세계로 가는 문이었지만, 저한테 김세황은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저도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정말 기타연습 많이 했지만 되는 사람은 따로 있더라는 거죠. 전 살아남기 위해 기타리스트를 찾아야 하는 헌터가 돼야 했습니다. 김세황은 연주 정확성에선 유례가 없는 존재지요.”
[ IZM ] 넥스트 1집 은 총기있는 앨범이었다고 생각합니다.“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면서 오피스텔에 내 침대 말고는 다 악기고, 눈 뜨면 악기, 눈 뜨면 악기, 거기서 라면 끓여 먹고, 눈 뜨면 악기, 음악 말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었어요.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고. 사실 넥스트 1집은 드럼도, 전자 악기도, 베이스도 없는 변칙 밴드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솔로 앨범과 밴드 앨범의 중간 형태였죠. 그런데
까지 성공하고 나니까 풀 밴드를 만들어서 멤버들을 꾸려 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엔 유재학 사장님이 밴드 살림 꾸리기 어렵다고 말렸고, 그래서 최소한인 3인조로 한 것입니다.”
[ IZM ] 창을 도입한 ‘Komerican Blues’나 <모노크롬>에 수록된 ‘무소유’는 국악과의 접목을 꾀하고 있습니다.“서양음악의 세례를 받은 저로서는 국악은 오히려 새롭고 먼 데 있는 음악이었습니다. 가장 박대받는 음악이지만 국악을 너무 모르기도 했고 싫기도 했었습니다. 그 점에선 사악한 전략적 제휴죠. 그걸 떠나서 영국 유학 때 그곳에서 국악을 들으니 고향의 소리더라고요. 진짜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어요.
<모노크롬> 앨범 당시 테크노와 씨름하고 있을 때 국악은 제게 희망의 싹이었습니다. 제가 엔지니어를 지향한다고 했는데, 그랬기 때문에 국악과 제가 하는 서양음악의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 IZM ] <비트겐슈타인> 나왔을 때는 실망했어요. 서커스 음악 같았습니다.“서커스 음악처럼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그 앨범은 선후가 뒤바뀐 앨범이었어요. 그 당시에 내가 배웠던 걸 다 사용해 보고 싶었던 음반이었어요. ‘선先기술, 후後음악!’ 지금에 와선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르겠는데, 드럼을 시퀀스로 프로그래밍했는데 듣는 사람은 물론이고, 전문가도 속일 정도로 시뮬레이션이 가능한가, 그런 걸 실험해 봤습니다.”
[ IZM ] 신해철은 최소한 평균 이상의 멜로디는 써 주는 사람인데, 왜 <비트겐슈타인> 이후엔 특유의 멜로디가 부족한 걸까요.“나한테 그때 더 중요했던 건 밴드와 생활하는 거였어요. 그것은 내 인생에서 내가 제일 갈증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어요. 멤버들하고 늘 시간 나면 말 안 해도 그냥 모이고, 할 짓들이 없고, 영화도 같이 보러 다니고, 여자 친구는 다 같이 없고. 막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너무 동경했어요. 그런데 그 갈증이 넥스트 때부터 시작되어서
<모노크롬> 때는 더 비정해진 거죠. 백스테이지에서 희희덕대면서 놀고, 나를 너무 굶긴 거야. 특히
<라젠카> 할 때는 모든 시설이 갖춰진 침실과 완벽한 밴드 하우스를 갖춰 놓고 앨범 만들고 싶었는데 끝까지 밴드 하우스는 텅텅 비어 있었고….
지금까지 음악 하면서 밴드로서 제일 행복했을 때가
<개한민국>이었어요. 넥스트 전성기에 비해서는 풍족하지도 않았지만, 우린 늘 모였고, 늘 같이 나쁜 짓도 하고, 놀아도 같이 놀고, 다섯 명이 함께 너무 재밌게 살았어요. 내가 강력하게 리더십 발휘해서 음악 하기보다는 다섯 명 모두가 각자 정말 자신의 앨범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랐어요.”
[ IZM ] 20년간 음악 하면서 음악적인 면에서 가장 중요했던 모멘트는 뭔가요?“나한테는 다 중요한 모멘트예요. 일단은 대학가요제 나간 것 자체가 그랬죠. 왜냐면 당시에 내가 몸담았던 파고다 메탈 신에서는 대학가요제가 비토의 대상이었으니까.”
[ IZM ] 그때부터 언오소독스를 즐겼네요.“방법이 없었어요. 파고다 메탈 신에서도 우리는 왕따였어요. 투 키보드를 내걸고 있었거든. 내가 계속 멤버를 들이고, 구성을 짜는 것들이, 리드 기타를 뒤로 빼고 키보드를 앞으로 배치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다른 밴드들이 블랙 사바스 연주할 때, 우리는 유라이어 힙이나 최소한 딥 퍼플은 되어야 연주하는 거였고.”
[ IZM ] 두 번째는 모멘트는요?“사실 대학가요제 나간 것보다 먼저일 수도 있는데, 기타 잡았을 때였죠. 그때 느꼈던 감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키도 작고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그냥 학삐리. 학교에서 성적은 상위권이지만 그걸로 인생이 보장되겠어? 그렇다고 집에 빽이 있어 뭐가 있어. 그런 평범한 애한테 쥐어진 기타, 그것은 성기의 확장이더라고요. 이 기타를 든 순간 나는 서양 놈, 백인 놈들보다 더 큰 걸 휘둘러대는 마초로 변신하는 것이 되었죠. 그다음은 솔로로 전향한 것. 물론 나의 첫 번째 희망은 밴드를 만드는 거였는데 사람이 없었어요. 무한궤도는 이제 해체하기로 된 거고.”
[ IZM ] 자신의 베스트10 노래를 꼽는다면.“보컬 쪽에서 베스트였다고 생각하는 건 <정글 스토리> OST 앨범에 있는 ‘절망에 관하여’ 입니다. 부를 때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죠. 그것이 내 가창의 베스트였던 것 같고, 사운드 메이킹에서 베스트는 보컬은 안 들어가 있지만 월드컵 때 나왔던 ‘Into the arena’, ‘재즈 카페’는 내 음악 인생의 터닝 포인트 구실을 했어요. 그 앨범이 나올 때는 여전히 발라드가 휩쓸던 시대였죠. 회사에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타이틀로 한다고 했는데, 난 싫다고 ‘재즈 카페’로 간다고 했지만, 그때는 프로모션 매니저까지 지휘할 권력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너를’ 밀었는데 잘 안 됐죠. 그런데 ‘재즈 카페’로 미니까 갑자기 판이 빠지기 시작하더라고요.”
[ IZM ] 가사로 베스트는?“내가 맘에 드는 건 ‘아버지와 나’죠. 팬들이 좋아하는 거는 ‘나에게 쓰는 편지’가 아닐까 싶고. 그런데 내 만족도나 팬 만족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가장 오랜 세월 남는 건 ‘The Ocean’이더라고요. 제일 정이 가는 노래는 ‘그대에게’인 것 같아요. 원래 사랑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살다 보니 정이 드는 거 있잖아요. 평생 살면서 그렇게 작전까지 짜서 만든 노래는 없었을걸요. 대학가요제를 겨냥해서 진짜 머리를 많이 굴렸죠. 한번은 ‘그대에게’를 공연장에서 안 부르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우려먹기 그만하라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래서 한번은 앙코르에서 ‘그대에게’를 안 부르고 공연을 끝냈어요. 근데 그랬더니 관객들이 또 앙코르를 하더라고. 심지어 쓰리 앙코르를 했어요. 그러다 지쳐서 아 나도 집에는 가야지 싶어서 ‘그대에게’를 불렀죠. 그랬더니 그렇게 앙코르 외치던 사람들이 다 집에 가더라고요.”
[ IZM ] 음악생활 20년 동안 선배든 후배든 자신한테 자극을 준 사람은 누구인가요?“작은 거인의 김수철 정말 좋아했어요. 송골매도 좋아했는데 그건 자극라기보다는 그냥 즐겼던 거 같아요. 철수 형 말로는 잘하는 음악이 아니라, 잘 나가는 음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로 음악이 좋았어요. 작은 거인이나 산울림이 팬들이 개 거품 물고 쓰러지게 했던 밴드였다면, 송골매는 밴드하고 싶은 동기를 만들어 준 밴드죠. 가사는 산울림한테 진짜 영향 많이 받았어요.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형한테도 영향을 받았고, 한국 록의 4인방 있잖아요. 백두산, 시나위, 부활, H2O 다 영향을 받았죠. 그중에서 부활의 김태원은 진짜 스승이에요. 뮤지션이 뭔지 알려 준 형이니까요. 애티튜드를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솔로 성공하고 가요 프로그램 1위 했을 때도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지’라는 생각 많이 했죠. 선배들은 내가 대기실에 있으면 이랬어요. ‘너 울어야 돼. 그래야 담에 또 받는다. 그래야 대중들이 좋아해!’ 근데 난 완전히 반대로 나갔어요. 트로피 한 손으로 받고, 그거 막 아무렇지 않게 빙빙 돌리고. 어쩌면 그런 건방이 날 20년 동안 살린 건지도 몰라요.”
-
- 가수를 말하다 임진모 저 | 빅하우스
이 책은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가 20여 년간 축적한 인터뷰, 취재자료, 평론을 토대로 엮어 낸 가수와 가요 이야기이며, 우리 대중음악의 사료이자 자산이다. 60년대 미8군과 번안가요에서부터 70년대 대마초 파동, 80년대 팝을 이겨낸 가요, 그리고 90년대 우리음악의 혁명을 통해 마침내 우리 가요는 지금 ‘케이팝’이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향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음악과 가요를 탄생시킨 주인공과 최고의 가수에 주목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