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성 세대 스탠더드 팝과 신세대 로큰롤의 한 판 대결
토미 도시(Tommy Dorsey)는 저 옛날 스윙재즈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빅 밴드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30년대부터 대중적 지명도를 얻었으나 결정적으로 인기를 누린 때는 프랭크 시내트라가 가수로 밴드와 함께 댄스 템포의 발라드 음악을 불렀던 1940년대 초반이었다.
그래서 프랭크 시내트라의 관련 자료를 보면 어김없이 토미 도시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 때의 활동을 계기로 2차대전시의 최고 가수로 발돋움하는데 성공했다. 그의 무한대 고속성장과 달리 토미 도시는 50년대 들어 스윙 열기가 퇴조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토미 도시는 난국 타개의 방식으로 형 지미 도시(Jimmy Dorsey)와 함께 도시 브라더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53년부터 56년까지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은 당시 갓 개화한 텔레비전에 진출한 덕분이었다. CBS의 유명 프로였던 재키 글리슨의 <하니무너스> 도입부에 30분 짜리로 편성된 도시 형제 진행의 <스테이지 쇼>는 꽤 반응이 좋았다.
이 프로가 없어지기 전 막바지에 토미 도시는 또 한 차례 위대한 가수를 미국인들에게 선사한다. 그 이름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엘비스와 TV의 관련을 생각하면서 전설적인 CBS의 <에드 설리번 쇼>를 기억하지만 사실 그것이 결코 첫 무대는 아니었다. 엘비스가 브라운관의 신고식을 치른 프로는 바로 도시 형제가 진행한 <스테이지 쇼>였다.
두 사람 모두 스윙의 거목 토미 도시와 인연
토미 도시는 이리하여 대중음악사의 두 거인-프랭크 시내트라와 엘비스 프레슬리-과 직접적 인연을 맺는다. 시내트라와 더불어 스윙의 전성기를 견인했고 엘비스를 데뷔시키며 본인은 음악적 생(生)을 마감했다. 토미 도시 한사람만을 봐도 1956년을 기점으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프랭크 시내트라의 스탠더드 팝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로 옮겨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음악의 변화일 뿐 아니라 그것은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엘비스의 출현이 그렇다고 로큰롤의 완전한 시장 독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스탠더드 팝의 지분은 견고했고 시내트라는 56년 이후에도 꾸준한 히트 싱글 퍼레이드를 펼치고 있었다. 정확한 지형도는 냉정하게 말해서 ‘스탠더드 팝에 대한 로큰롤의 거센 도전’이었다. 개인적으로 시내트라는 스탠더드 팝이 주도하는 시장의 질서를 교란한 엘비스와 로큰롤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엘비스 죽이기’는 불가피했다.
프랭크는 1915년에 태어났고 엘비스는 1935년생이므로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라이벌이 될 수 없다. 누가 나이 스무 살 차의 부자관계를 경쟁자라고 하는가. 그러나 둘은 살벌한 라이벌이었다. 언론에서는 라이벌보다 한 수 위인 아치라이벌(archrival:최대의 라이벌)이란 어휘를 동원해 마치 두 사람 사이를 ‘철천지원수’로 묘사했다.
사람으로서의 대결을 떠나 그것은 두 사람이 대변하는 스탠더드 팝과 로큰롤 즉 ‘국민음악’과 ‘청춘음악’ 간의 충돌과 갈등이었다. 물론 적의는 주로 위협받고 있던 프랭크 시내트라 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가 1958년 의회에 나와 퍼부은 로큰롤에 대한 독설은 너무도 유명하다.
“로큰롤은 가장 야수적이며 절망적이고 추하며 사악한 표현양식이다. 내가 이런 음악을 듣는 것은 불행이다. 로큰롤 가수는 저능한 반복과 교활하고 저속한, 단순하게 말하면 더러운 노랫말로 10대를 유혹하는 백치의 깡패들이다. 이런 빗나간 방식으로 로큰롤은 지구상의 모든 구레나룻 10대 범죄자들의 군가가 되어가고 있다.”
가히 나쁘다고 하는 말이란 말은 총동원한 듯한 느낌이다. 프랭크는 심지어 어떤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로큰롤을 고약한 최음제(rancid aphrodisiac)로 규정한 적도 있었다. 위의 독설에서 굳이 구레나룻이라는 어휘를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레나룻(sideburns)은 말쑥한 차림과 단정한 자세를 강제하는 기성 권위에 덤벼드는 청춘의 반항으로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그가 입대하기 위해 구레나룻을 깎았을 때 전 미국 언론이 ‘구레나룻 없어진 엘비스’라는 헤드라인을 내걸었던 것이다. 시내트라가 까놓고 특정인을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엘비스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엘비스 죽이기
그가 이처럼 성이 난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1950년대 초반 레코드 판매량이 3만장 선으로 떨어지면서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밀려난 그는 53년 신생 캐피톨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1956년 「Love is the tender trap」(7위), 「Hey! Jealous lover」(3위), 1957년 「All the way」(2위). 1958년 「Witchcraft」(6위) 등 넬슨 리들과 고든 젠킨스가 편곡한 곡들이 차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천신만고 끝에 부활의 깃발을 펄럭일 찰나에 어린 엘비스라는 돌발변수가 나타나 행진에 훼방을 놓고 있는 셈이었다. 얼마나 엘비스가 밉고 원망스러웠겠는가. 허나 시장의 중심 축은 자꾸만 엘비스 쪽으로 옮겨갔다. 대중들은 엘비스를 더 사랑했다.
레코드 판매고만을 볼 때 도저히 시내트라는 엘비스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1960년대 말까지 엘비스는 2억 5천장의 음반을 팔았다. 이 기록에 가장 근접한 아티스트는 2억장의 빙 크로스비(Bing Crosby)였으며 프랭크는 겨우 4천만 장에 불과했다. 시내트라가 활동경력 30년이고 엘비스가 경력 15년이 채 안됐음을 감안한다면 이는 굉장한 차이가 아닐 수 없었다.
엘비스가 60년 3월 독일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미국 뉴저지의 미 육군 포트 딕스 기지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그를 공식적으로 영접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프랭크 시내트라의 딸 낸시(Nancy Sinatra)였다. 낸시 시내트라는 아버지와 달리 엘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 (아버지는 원수라는데 딸은 광적으로 좋아하고. 이 어이없는 부녀갈등!)
그렇지만 프랭크 시내트라는 앞서 지적한 1950년대 말 로큰롤에 대한 파상 공세를 통해 개인적 소득을 떠나 중대한 음악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가 로큰롤을 공격했던 주요 수단은 바로 가창력의 근거이기도 한 ‘음정’이었다. 로큰롤 가수들은 거친 음색만이 있을 뿐 음정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환상적인 크루닝(crooning)으로서 1940년대에 얻은 별명은 ‘목소리’(The voice)였다. 엘비스가 알게 모르게 여기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1960년 제대하고 난 뒤 엘비스는 ‘맥아더 원수 이래 가장 유명한 군인’이라는 제도권의 축복에 화답하듯 시내트라와 같은 ‘음정 예술’의 스탠더드 팝에 발을 들여놓고 만다.
로큰롤에서 스탠더드 팝으로 선회한 엘비스
톤을 크게 낮추고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Surrender」와 같은 발라드를 노래했다. 그것은 로큰롤 가수에서 국민가수로의 대이동이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매니저 톰 파커(Tom Parker) 퇴역 대령의 조종에 따른 측면이 없지 않았다. 사실 인기 절정의 순간에 엘비스 프레슬리를 군대로 보낸 것도 그였다. 가공할 성공을 맛보고 있는 상황에서 톱 스타를 대중의 곁에서 사라지게 할 어리석은 매니저는 없다.
이 점에 대해 록 평론가 필립 제이콥스는 저서 『로큰롤 헤븐』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파커 대령은 로큰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로큰롤이 곧 퇴조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고객도 함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비스를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어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어필하는 전천후 스타를 만들어야 했다. 그를 군대로 보내 위험한 반항아에서 법을 준수하는 건전한 시민으로 바꾸는 시도가 필요했다(그 무렵 유명 연예인들은 병역을 기피해 여론이 좋지 않았다).”
매니저 톰 파커의 지침은 달리 말해 프랭크의 길을 뒤따르는 것이었다. 엘비스는 군말 없이 파커 대령의 명을 받들었다. 전역 후 시내트라와의 화해전선도 형성되었다.
1960년 TV 프랭크 시내트라 쇼가 마련한 < Welcome Home Elvis > 프로그램에 엘비스는 록 가수답지 않게 턱시도와 정장 차림으로 출연해 자신이 프랭크 시내트라와 같은 국민가수로 지향점을 조정하고 있음을 알렸다. 사정을 알 리 없는 젊은이들이 단정하는 것 같은 무조건의 ‘적과의 동침’이 아니었다.
시내트라 입장에서는 조류에 떠밀려 엘비스를 자기 쇼에 출연시켜야 했다. 프로의 시청률이 날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연료도 톰 파커에게 무려 12만5천 달러를 제공했다. 엘비스 진영이 시내트라를 필요로 한 것 이상으로 시내트라는 엘비스가 절실했다.
이 자리에서 프랭크는 ‘돌아온 엘비스’에 대해 이 시대 최고의 인물, 마법의 노래솜씨 운운하며 극찬으로 환대했다. 엘비스도 물론
“존경하는 프랭크 시내트라와 함께 하게 무대에 서 영광입니다”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상대의 레퍼토리인 「Witchcraft」와 「Love me tender」를 바꿔 불렀다.
유명한 평론가 폴 두 노이어(Paul Du Noyer)는 98년 프랭크 시내트라의 사망 후 록 잡지 『큐(Q)』에 쓴 조사(弔辭)에서 이 장면을
“맨해튼 펜트하우스(옥상가옥)와 미시시피 섀크(오두막)의 문화충돌”로 묘사했다. 그리고 이어서
“록의 인물들이 냉담한 음악가든 완성된 음악가든 그 대부로서 시내트라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점점 보편화되어갔다”고 기술하고 있다.
노이어가 언급한 록의 인물들은 브루스 스프링스틴, 엘비스 코스텔로, 밴 모리슨, 랜디 뉴먼 등이었고 의외로 데이비드 보위도 거론했다. 시내트라의 유명한 팝송 「My way」는 프랑스 샹송(Comme d'habitude)에 폴 앵카가 가사를 붙인 것이나 실제로 이 작업을 먼저 시도한 사람은 데이비드 보위였다는 것이다.
보위는 1968년 자기 것(이 때 제목은 「Even a fool learns to love」)이 묻히고 이듬해 1969년 앵카의 것이 크게 히트해 엄청난 저작료를 놓치게 된 것이 너무도 아쉬워 야유하는 기분으로 곡 「Life on mars」(
“넌 잘 먹고 살아! 난 화성에서 살래”라는 뜻?)를 만들었다.
보위의 고백.
“보복의 심정이 담긴 곡이랄까. 난 정말 폴 앵카가 「My way」를 쓴 것에 너무 화가 나서 내 식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
다시 그 쇼의 순간으로 돌아가서 프랭크 시내트라 입장에서도 로큰롤에 대한 성인 음악의 승리를 자신하며 즐거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독설에서 극찬으로의 격변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제도권의 총아, 그것은 시내트라에 대한 굴복
엘비스는 스탠더드 팝은 물론 나중에는 종교음악을 구사해 단단히 ‘제도권 총아’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그것은 거리음악인 로큰롤의 제도음악에 대한 판정패를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엘비스 개인으로 볼 때는 프랭크에 대한 굴복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사실상 승리는 뜻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도 프랭크를 키운 것처럼 여전히 미국의 제도음악계는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과 같은 스타들을 꾸준히 생산해 막강한 위세를 거듭하고 있다. 록이 한 때 세대의 충격을 가해 분위기를 휩쓸어가지만 결국 역사는 성인 대상의 스탠더드 팝에 손을 들어준다.
이는 어쩌면 프랭크와 엘비스 간에 전개된 일대 격돌에서 프랭크의 도덕적 정서적 승리가 남겨준 대물림의 유산일 수도 있다. 20년 먼저 태어난 프랭크는 1977년 엘비스가 죽고 난 21년 후인 1998년에 세상을 떴다. 억지 같지만 어쩌면 이것이 프랭크 시내트라와 스탠다드 팝의 영구한 생명력을 말해주는 단서 아닐까? (장수만세!)
『타임』지는 1998년 ‘20세기를 빛낸 문화예술인 20인’을 선정하면서 대중음악인으로는 프랭크 시내트라, 비틀스, 밥 딜런 그리고 아레사 프랭클린 넷을 뽑았다. 엘비스는 쏙 빠졌다. 엘비스와 프랭크의 상호간 파괴력, 후대의 영향력을 기준으로 재단한 끝에 승리자인 프랭크 시내트라를 선택한 셈이다.
영국의 록 잡지 『모조』도 같은 해 ‘역사상 위대한 가수 100인’을 선정하면서 프랭크의 비교 우위를 확인했다. 가수들의 설문을 통해 집계한 이 조사에서 프랭크 시내트라는 2위, 엘비스 프레슬리는 7위였다(1위는 아레사 프랭클린).
이름난 록 가수 치고 엘비스의 영향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틀스, 퀸,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엘비스의 영향 하에 음악계에 입문했으며 심지어 밥 딜런도 ‘엘비스보다 큰(Bigger than Elvis)’가수를 외치며 포부를 쌓았다. 저명한 록 비평가 고(故) 레스터 뱅스(Leater Bangs)는
“우리가 엘비스에게 해준 동의를 앞으로 어떤 가수에게도 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못박기도 했다.
하지만 근래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그의 입장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왜 점점 엘비스가 멀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로큰롤 혁명을 일으켜놓고 그 혁명에 쓰러져버린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게 솟아났지만 그에 걸 맞는 상큼한 마무리를 기하지 못한 것이다. 이를테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록 관련 상당 부분의 업적은 이제 비틀스로 넘어갔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경우는 반대로 결코 찬란하지 않으나 그 패턴은 변함없이 후대에 반복 재생산되고 있다. 그는 ‘제도 음악의 역사’ 속에서 여전히 당당하다. 반면 엘비스는 ‘록 역사’ 속에서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록의 혁명을 일으켜놓고 프랭크의 길을 쫓아가 그것을 절반의 성공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다. 음반 판매고와 관계없이 엘비스와 프랭크 라이벌전 승자는 프랭크 시내트라일지도 모른다.
글 / 임진모(jjinmoo@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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