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 울스토네크래프트 고드윈에게
1813년 10월 27일
컴브리아, 영국
오, 내 소중한 사랑. 왜 우리의 쾌락은 그토록 짧고,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 걸까요? 당신이 없으면 나는 비천하고 불순한 상태로 타락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걸 매리, 당신이 가장 잘 알겠지요.
나는 그들의 공허하고 경직된 눈알이 내게로 고정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내가 징그러운 의미에 감염된 것 같을 때, 나를 권태로 복종시켜 버린 병을 들이마시는 것 같을 때까지 말입니다. 오, 저런 매리를 벌충하는 그 눈들이 내가 잠들기 전에 나를 쏘아 볼 것만 같아요.
사랑하는 이여, 나의 인내를 칭찬해 주오. 당신에게 경솔히 날아가지 않고 순간의 축복을 적어도 안전하게 지킨 것을 말입니다. 왜 나는 당신과의 만남을 미루어야만 합니까, 당신은 나를 만나길 고대하고 있지 않나요? 내 천성에 있는 고귀하고 둥둥 떠다니는 모든 것들은 나를 당신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어요. 나를 차가운 지연으로 꾸짖고 있습니다. 모든 두려움에 대해 비웃고, 신중함에 대한 꿈을 경멸해요! 왜 나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는 걸까요? 아아 슬퍼요. 우리는 만나지 말아야 해요.
퍼시 비시 셸리(1792-1822)는 영국 최고의 낭만 시인 중의 한명이었다. 후세대들에 의해 우상화된 그는 시 선집 “오지만디아스와 서풍에 부치는 노래(Ozymandias and Ode to the West Wind)”와 걸작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등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매리 셸리는 19살에 최초의 과학 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을 썼다.
셸리는 1811년 8월, 열 여섯의 해리엇 웨스트브룩과 결혼했다. 2년 뒤에 그는 정치 철학자인 윌리엄 고드윈의 추종자가 되어 자주 고드윈의 집과 런던의 서점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고드윈의 딸인 매리 울스토네크레프트 고드윈(후에 매리 셸리로 유명해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둘은 발길 닿는 곳에서 살았지만 채권자들에 의해 쫓겨다니고 추방당했다. 퍼시와 매리는 늦은 1816년에 결혼했다.
그 다음해 신혼부부는 제네바의 바이런 경과 함께 여름을 보냈고 매리는 선구적인 고딕 소설의 아이디어를 젊은 작가들의 유령 이야기 컨테스트에서 찾아냈다. 퍼시는 1922년 스페지아 만의 폭풍 때문에 그의 배가 좌초되어 비극적으로 익사했다. 매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창작과 육아에 헌신했다.
서진의 번역 후기생전에는 주목 받지 못했지만 오스카 와일드, C. S. 루이스, 칼 마르크스, 죠지 버나드 쇼, 버트란드 러셀, 이사도라 덩컨, 윌리암 예츠… 등등 수많은 후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준 시인이 퍼시 피시 셸리다. 동시대, 친했던 시인인 바이런의 경우 생전에 모든 계층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가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종교와 정치제도를 비판하는 급진적인 시와 글을 썼기 때문이다. 대학 때 이미 무신론에 관련한 글을 펴내서 옥스퍼드 대학에서 쫓겨났다.
또한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밴 상태에서 편지의 주인공인 열여섯살의 매리와 함께 도주를 한 것을 두고 주위의 지탄을 받았으며 아내 매리도 아버지에게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마크 트웨인도 그 일에 대해서 퍼시를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200년 전, 결혼을 하기 위한 적정 나이는 지금보다 열 살은 훨씬 어렸던 것일까? 퍼시가 첫 부인인 헤리엇(그녀는 열 여섯)과 결혼한 것은 열 아홉 살 때였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그는 가족을 놔두고 자주 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리고 런던에서 지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그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여인 매리를 만난 것이다. 매리는 정치 철학자이자 언론인, 소설가인 아버지 윌리엄 고드윈(아나키즘을 최초로 주창했다), 과 여성 인권에 대한 책을 펴낸 엄마를 두었기 때문에 퍼시 피시 셸리를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 그는 아내에게 매리와 함께 셋이서 함께 살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그런 제안은 아내에게 통하지 않았고, 퍼시는 매리와 의붓 누나인 클레어와 함께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스위스로 방랑을 떠난다. 결국 고향에 대한 향수를 못 잊어 영국으로 돌아오고 첫 번째 부인이 자살을 하자. 둘은 서둘러 결혼하게 된다.
이 편지에 나오는 셸리를 보는 그 눈들(eyeballs)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상의 부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비난의 눈길이 아니었을까? 지긋지긋한 의미로 시인을 감염시키고 권태로 복종시켜 버리는 그런 상식적인 눈빛들. 운이 좋으면 사랑은 도덕에 위배되지 않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부분의 사랑은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그것이 불륜이든, 희망이 없는 사랑이든 당사자들이 어떤 감정상태에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타오른 뒤 사라지는 재일 수도 있고 한낯 육체적 쾌락에 끝날 수도 있지만 그걸 알면서도, 모든 반대에 무릅쓰고 사랑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그들의 방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이태리의 여러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많은 작가들과 교류 하였다. 특히 당대 최고의 시인 바이런과, 존 키츠와의 만남은 그가 체념하지 않고 더욱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힘을 주었다. 그들은 호수에 배를 띄워 놓고 무서운 이야기를 돌아가면서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한번은 그것을 글로 쓰자는 제안을 받아, 매리가 글로 옮긴 것이 프랑켄 슈타인이다. 최근에는 프랑켄 슈타인의 반 정도는 퍼시 피시 셸리의 창작으로 인정받아 공동 저자가 되었다.
사랑의 철학 (Love's Philosophy) - 퍼시 비시 셸리 -
샘물은 강물과 하나 되고 강물은 바다와 하나 되며 하늘의 바람은 끊임없이 다정한 정으로 뒤섞인다 세상에 홀로인 것 없으니 만물이 신의 섭리 따라 한 마음으로 만나 섞이기 마련이라 내가 왜 그대와 섞이지 못하랴
보라 산이 높은 하늘과 입맞추고 파도가 서로를 껴안는다 누이꽃이 아우꽃을 경멸하면 누이꽃은 용서받지 못하리라 햇빛이 대지를 얼싸안고 달빛은 바다와 입맞춘다 허나 달디단 이 모든 것 무슨 소용 있으랴 그대 내게 입맞추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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