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러나 우리는 고려를 알지 못했다
“여러분은 고려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고려왕조는 475년간 이어온 중세 봉건국가입니다. 한 왕조가 오백여년간 유지되었다는 것은 정치사회경제적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고려는 송과 요, 금과 원이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힘을 겨루는 과정 속에서 성장을 계속하며 끝내 하나의 국가로 왕조를 유지한 당당한 문명국이었습니다.”
‘오빠가 돌아왔다’ 아니, ‘문화재 전도사’ 유홍준이 돌아왔다. 지난 9월, 서울 조계사에서
『유홍준의 국보순례』 출간 기념특별회 현장은 기대와 설렘으로 잔잔하게 술렁였다. 자녀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 퇴근 후 정장 차림으로 달려오면서도 손에는 유홍준 교수의 책을 놓지 않은 직장인, 수첩과 펜을 들고 필기 준비를 하는 학생들. 강연을 들으러 불교역사문화기념관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전국민적 교양서로 자리매김 해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오랜 인기, 게다가 최근 방영된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으로 증폭된 유홍준 교수 개인에 대한 관심 때문이기도 할 터.
‘무릎팍도사에 출연하고 책이 폭발적으로 많이 판매됐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낸 유 교수는 본격적으로 ‘미술사로 본 고려시대 이미지’라는 테마를 가지고 강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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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 | |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 고려청자와 금속공예, 고려불화 등이 고려 문화의 경지를 증명하고 있어요. 그뿐입니까? 의천과 지눌, 일연스님과 같은 고승부터 김부식, 이규보, 이제현과 같은 대문장가가 나왔고 말기에는 정몽주, 안향 같은 유학자가 등장한 나라가 고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외로 고려왕조에 대해 통일신라나 조선같은 뚜렷한 문화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대체 왜일까요?”“역사를 정치외교사로만 요약한다면,
현재는 6.25동란 이후의 시기로만 서술되겠지요”
유홍준 교수는 그 첫째 이유로 ‘역사 서술에서 고려왕조가 겪은 전란과 사회적 혼란만 지나치게 부각돼 있다’는 점을 꼽았다. 한번 떠올려 보라. 중고교 시절 국사 시간마다 우리가 무엇을 외웠는지를. ‘이자겸의 난’과 ‘망이 망소이의 난’, ‘만적의 난’의 이름과 연도를 외웠으며 공민왕이 원의 세력은 물리쳤으나 이내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고, 왕조말기에는 왜구가 창궐했다는 사실에 밑줄을 그었다. 이런 전란과 혼란 속에서 무슨 문화 창달이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유 교수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전쟁은 기나긴 세월 속 잠깐 있던 일일 뿐이에요. 그런데 고려를 전쟁 중심으로 서술해 놓으니 정신없이 싸우고 당하고 하는 사이, 그 속에 피어난 문화가 생략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훗날 20세기 후반기 역사를 쓸 때 어떻겠습니까? 일제에서 겨우 해방되니 바로 6.25동란이 터지고 그 후 4.19, 5.16, 10.26, 6월 항쟁이 쉴새없이 이어졌다는 사실만 강조되겠죠? 이것이 사건중심의 역사 서술인 것입니다. 이 속에서도 언제나 문화 창조는 이뤄지고 있는데 말이지요.”‘송나라가 원나라에 망하고 요와 금, 원 모두가 100년여동안 지속되다가 끝내 자기 문화를 지키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진 데 비해, 고려는 저력있는 건강한 나라였다’는 말로 고려 왕조에 대한 이미지를 재정립한 유 교수. 그는 또한, ‘고려귀족사회의 구조와 문화적 성격’를 짚어냈다. ‘신라=중앙귀족, 조선=양반’이라는 확고하고 일반된 지배층과 달리, 고려는 문화를 주도하는 층이 몇 차례 이동했고 그만큼 문화적 다양성을 지닌 나라라는 것.
은진미륵을 석굴암과 비교하는 일의 무지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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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미륵 | |
특히 고려는 중앙의 귀족문화와 구별되는 지방의 호족문화가 존재했고, 이 호족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지역적 특색이 있다. 유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은진미륵’을 석굴암과 비교하는 일을 비판했다.
“교과서에 한번 잘못 실려서 사람들이 고려문화를 아주 오해하게 됐어요. 은진미륵을 석굴암에 비교하면서 ‘고려는 통일신라에 비해 조각솜씨가 떨어지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아니, 비교하려면 그 시대의 최고와 이 시대의 최고를 비교하는 게 합당하지 않습니까?”은진미륵은 고려 호족문화의 특수하고 예외적인 예다. 논산 은진 지역의 지방적 샤머니즘과 결합된 형태이므로 ‘불교예술이 지방까지 파고 들었다’라고 그 장점을 거론해야 마땅하다. 또한 애초부터 8등신이 아니라 4등신으로 구상되었고 ‘장승’의 이미지를 살려 신비로운 느낌으로 제작된 불상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고 흠을 잡기도 했다니, 우리 문화 유산에 대한 심각한 호도라는 것이다. 애초에 ‘다른’ 미감으로 감상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것.
“또한 후세가 아니라 고려 시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구요. 고려인들은 통일신라 때 제작된 석굴암, 불국사, 미륵사 등을 사용 중이었고 당연히 자신들의 예술품으로 여겼죠. 그러니 이 중에 없는 형태가 제작되었던 것이고요. 그러니 이렇게 독특한 형태가 나왔지요” 변화하는 현실이 과거의 유물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현실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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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운주사 와불 | |
유 교수는 슬라이드 여러 개를 보여주며 고려시대의 예술품들에 대한 재분석을 이어갔다.
“오해가 참 많습니다. 그 예로 벙거지를 쓴 듯한 이 보살상들을 보세요. ‘티벳불교의 영향’이라고 책에 기록돼 있지요. 그런데 이 강릉 골짜기에 어떻게 티벳불교가 직수입됩니까? 원나라가 정권을 잡으며 한족의 오리지널 불교를 죽이기 위해 티벳불교를 끌어왔고, 그 것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니 결국 티벳이 아니라 원의 영향인 것이죠. 이국적 문화라기보다 신품의 유행에 가까워요.”‘와불’(누워있는 불상)로 알려진 ‘운주사 불상’에 대해서도 코멘트를 달았다. 운주사 불상은 ‘천불천탑을 세우면 수도가 옮겨진다는 말을 믿고 세웠지만 닭이 울어버려서 일으켜지지 않았고 결국 천도는 성사되지 않았다’는 전설이 서린 불상이다.
“전설은 현재의 입장에서 역사 해석의 실마리가 됩니다. ‘서울을 옮긴다’는 것은 ‘혁명’을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좌절되고 만 혁명에의 꿈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또한 유교수는 ‘와불이 아니라 미기립불’이라고 덧붙였다. 와불은 부처가 열반할 때 눕는 형상이고, 이 불상은 ‘일어나지 않은’ 불상이라는 것. 또한 운주사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총체미와 집합미에서 ‘민중의식’을 짚어냈다. 단독상의 미의식과 다른 총체미, 집합미는 ‘민중의식’과 관련이 있고, 이러한 총체미와 민중미가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겪으며 대학생들과 민중화가들에게 감동을 주었었다는 것이다.
“이 불상이 유명해지고, 한번은 유명한 조각가가 찾아왔어요. 이전의 귀족적 미를 좋아하던 이들에게 이 불상은 불상도 아니지. 그 분이 이러는 거에요. ‘이 곳이 혹시 불상 제작소인데 잘생긴 것은 다 팔리고 못생긴 것만 남은 게 아니오?’”‘고정된 미의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니 운주사 불상의 미가 발견되었을 리 없다. 결국 아름다움을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은 새로운 미의식이다. 변하는 현실이 과거의 유물을 새롭게 보게 하며, 그것이 바로 현실의 힘이다.
“영감님! 되다만 인간도 인간이라 불러주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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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상감운학문매병 꽃병인가, 술병인가 논란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뚜껑이 있고, 뚜껑이 있는 꽃병은 없으니 술병이지요. 주구가 작아 인삼 등을 넣을 수는 있되, 공기가 최소한으로 닿게 만들었지요. | |
11세기 말로 넘어가면서 고려사회는 중앙문신귀족이 중심인 사회가 된다. 예종-의종-인종 에 이르는 동안은 중앙문신귀족의 문화가 최고로 꽃피운 시기이다. 그러므로 금강산에서 출토된 관세음보살, 세지보살에 가득한 화려함과 범접할 수 없는 기교는 왕권의 파워를 보여준다. 유교수는 이에 대해 박종기 교수의
『새로 쓴 500년 고려사』를 일독할 것을 권했다.
“고려 유물이 이렇게 아름다워요. 한번은 학생들에게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 사진을 보여줬더니 다같이 ‘와!’하고 탄성을 질러요. 이 학교가 이렇게 수준이 높은가 싶어서 ‘늬들, 왜 소리 질렀니’했더니 그 이름이 복잡해서 역사시험문제에서 아주 많이 나온 건데 글쎄, 실물을 처음 봤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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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표주박형 주전자(좌), 청자 죽순형 주전자(우) | |
문화를 그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암기문제로 받아들이는 역사 교육에 대해 실소가 나오는 에피소드였다. 유 교수는 슬라이드로 예술품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관련된 에피소드들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나갔다.
“이 작품은 노랗죠? 그렇지만 ‘청자’에요. 한번은 누군가 이게 ‘고려황자’냐고 물어왔어요. 그래서 ‘청자가 되려고 했는데 청자가 못된 상태이니까 청자라 부릅니다’ 했죠. 그러니까 그런 법이 어딨냐고 막 따져요. 제가 그랬죠. ‘영감님! 되다만 인간도 인간이라 불러주지 않습니까’”이어 고려 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새로 알 수 있었다.
“청자의 첫째 아름다움이 때깔이에요, 색깔이 아니고 ‘때깔’! 왜냐하면 청자는 색은 유약과 태토가 어우러짐이에요 유약 자체가 청색이 아니라, 투명한 유약에 비쳐서 안에서부터 뿜어나오는 색이 바로 청자의 색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청자는 동일한 청색이 아니라 그 조합에 따라 초록일 수도 연두일 수도 올리브그린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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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기린형 향로 - 향을 피우면 정말 살아있는 듯 해요. 예술품도 실제 사용할 때 생명감이 느껴집니다. ②청자 참외모양꽃병 - 참외형 화병이 많은데 이것만 목이 길어요. 목을 쫙 뽑아 올리니 더 멋있고 왕가의 체통이 느껴지지요?과장되면 부조화스러운데, 딱 적당해요. ③청자 죽순모양 주전자 - 아이들 보여주면 옥수수나 빵빠레 아이스크림 같다고 해요.죽순 모양으로 항아리 몸체를 만들었고 손잡이와 주구가 대통이며, 꼭지에 죽순의 껍질이 말린 듯한 모양이죠. 가는 선을 넣어 죽순이 가진 텍스처를 살리고자 한 묘미가 있어요. 순청자 시절의 조각적 세공이 대단하지요? ④청자 비룡모양주전자 - 용의 머리엔 예리한 앞지느러미가, 몸체엔 옆지느러미가 날개처럼 바짝 들려 있지요? 사실감과 생동감이 일어나는 멋진 모양이 주전자에서 구현되는 것만 봐도 이 12세기 정서는 대단히 풍요했을 듯 합니다. | |
‘이목구비가 예뻐도 피부가 좋지 않으면 미인이 될 수 없듯이’ 청자는 형태만큼 때깔이 중요하다. 문양도 관건이다. 청자의 경우, 문양이 없으면 다양성이 없고, 있으면 지저분해 보이기 쉬운 까다로운 특성이 있다. 그러므로 문양이 없는 순청자의 경우 대개 참외나 죽순, 거북이, 사자, 복숭아 등 형태가 조각형태로 나가게 된다.
이어 기린형 향로, 참외형 화병, 죽순모양 주전자 등의 국보급 명품,
‘쭈꾸미 공덕비’ 등에 관련된 재담을 풀어낸 유교수는 아쉽게 강연을 마치며 고려의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이 생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 쭈꾸미 공덕비 : 이 쭈꾸미가 어부에게 잡히면서 제 집도 끌고 왔고 그 결과 이만점의 유물이 발견됐다. 200억~300억원(문화재청 추산)에 이르는 고려청자 발굴에 ‘1등 공신’을 한 주꾸미에게 공덕비를 세워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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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보살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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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관음도(좌), 수월관음도(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