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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나온 악당과 퇴락한 여배우의 동거

『런던 대로』, 악당 주인공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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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레스크 소설은, 악당이나 건달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말한다. 당연히 모범적이지는 않고, 일반 상식과 통념으로는 당연히 본받지 말아야 할 주인공을 내세워 세상의 모순을 폭로하거나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파고드는 것. 꼭 그런 의미가 아니라도,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보통의 우리들이 갖는 생각,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통해 일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

피카레스크 소설은, 악당이나 건달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말한다. 당연히 모범적이지는 않고, 일반 상식과 통념으로는 당연히 본받지 말아야 할 주인공을 내세워 세상의 모순을 폭로하거나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파고드는 것. 꼭 그런 의미가 아니라도,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은 나름의 재미가 있다. 보통의 우리들이 갖는 생각, 행동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통해 일상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으니까. 사실 모범적이고, 성실하고, 착하기만 한 인물은 재미가 없으니까.

 

켄 브루언의 『런던 대로』의 주인공인 미첼은 재미있다. 아니 흥미롭다. 폭행죄로 감옥에 들어갔던 미첼은 출소하자마자 자기 신경을 건드린다는 이유로 한 남자의 팔을 부러뜨린다. 툭하면 범죄소설의 문구를 인용하고 때로는 철학자나 시인의 경구도 알고 있다. 독서광이면서 건달인 인물이 간혹 등장하기는 하지만 미첼이란 인물이 유별나 보이는 것은 그의 독특한 세계관 때문이다. 그는 범죄자이지만, 범죄에 탐닉하지 않는다. 폭력을 잘 쓰지만, 폭력의 쾌감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에서 도망치기 위해 번뇌하는, 사색하는 주인공이 아닌 것이다. 단지 자신이 처한 위치를 잘 이해하고 있고, 그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행동한다. 새로운 미래, 지금의 내가 아닌 나를 꿈꾸지 않는 인물.

교도소에서 나온 미첼은 친구 녹턴이 내준 집에서 살게 된다. 빚을 갚지 못해 사라진 여피의 멋진 아파트에서, 도망자가 남겨둔 고급 양복을 입고, 그가 두고 간 범죄소설을 읽으면서 미첼은 사회에 적응해 간다. 녹턴이 원하는 것은, 미첼이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다.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때론 협박해서, 때론 폭력을 가해서라도 더 많은 돈을 뜯어내는 것. 하지만 미첼은 범죄조직에 들어가는 것은 거부한다.

‘난 감옥에 있었어요. 그 생활은 정말 싫었소. 거기 돌아가지 않으려면 내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한다는 직감이 강하게 들어요. 난 그저 생존하기 위해서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살아야 해요. 열 내기 시작하면 죽은 목숨이오.’

냉정함을 원하는 미첼은 은퇴한 여배우 릴리안의 저택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 아니 육욕에 빠지게 된다. 어디서 본 이야기, 맞다. 『런던 대로』는 할리우드의 명작 영화<선셋 대로>를 켄 브루언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소설이다.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대로>는 퇴락한 여배우의 집에 들어간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다. 범죄에 연루되어 몸을 숨길 곳을 찾던 작가는, 한때 최고의 여배우였지만 오랜 기간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여배우의 집에 들어간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 한때의 빛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다. 그는 그녀를 경멸에서 찬탄까지 이르는 복잡 미묘한 스펙트럼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점점 나락으로 빠져간다. 신기루를 찾아가는 사막의 낙오자처럼.

 

하지만 미첼은 다르다. 그가 일종의 낙오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는다. 아니 너무나도 정확하게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비참함을 알고 있기에 그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미첼의 여동생 브라이어니는, 남편이 죽은 후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그가 살아 있다고 믿으며, 환상 속에서 살아가며 현실의 자신을 파괴해 간다. 그런 여동생을 보면서, 미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안다. 그녀를 고쳐줄 수도 없고, 환상을 유지시킬 수도 없다. 그저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것뿐.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힘, 그것이 미첼이 이 미친 세상에서 냉정해질 수 있는 방법이다.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의사에게 미첼은 말해준다. ‘난 충고를 하지도 않고 절대 받지도 않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해주죠. 가서 공을 차지하고 불꽃처럼 살아요. 사실 그 애가 당신을 떠날 거니까. 걘 언제나 그럽니다. 그런 후에 프랭크를 되살려서 코카인과 총과 광기로 돌아갈 거요.’ 의사는 절망하며, 다시 미첼에게 묻는다. ‘그럼 난 어떻게 살죠?’ 미첼은 단순하게, 단호하게 답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겠죠. 아주 잘.’ 미첼은 섣부른 희망을 갖지 않는다.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랑으로 여동생이 구원받으리라는 어설픈 착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첼이 단지 냉정한 현실인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일 뿐이라면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런 인물은 그저 약삭빠르고, 매사에 구획 지어진 영역에서만 안전하게 살아가는 소인배에 불과하다. 미첼은 다르다. 그는 현실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복종하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녹턴과 함께 빚을 받으러 갔다가 거대한 흑인을 만난다. 싸움을 피하는 법? 미첼은 그런 것 모른다. 싸움을 걸면 받고, 뭔가 거슬리면 그대로 해치워버린다. ‘남자는 덩치가 크고 억셌지만 그게 다였다. 독하지가 못했다. 나는 독했다.’ 미첼은 독한 인간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기꺼이 행동한다.

미첼은 릴리안에게 빠져들지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섹스를 하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미첼은 고뇌하는 대신에 행동한다. 그리고 자신의 원칙을 지킨다. 미첼의 유일한 친구는 아마도, 거리에서 ‘빅 이슈’를 팔던 노숙인 조일 것이다. 그런 조가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해 죽게 된다. 조의 장례를 치러준 미첼은, 범인이라고 추정되는 소년들을 찾아간다. 베컴을 닮았다는, 10대의 축구선수. 그를 찾아낸 미첼은 바로 다리에 총을 쏴 버린다. 말도 필요 없고, 그의 미래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미첼의 친구를 폭행하여 죽였고, 미첼은 그 복수를 한다. 다시 감옥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은, 더 큰 원칙 아래에서 묻혀버린다. 필요한 일, 해야 하는 일은 반드시 한다. 그것이 바로 미첼의 원칙이다.

미첼이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그는 두려워한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배신을 잘 하는 독약을 주었다. 희망.’ 희망을 가지게 되면, 언젠가 자신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예 희망이 없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만을 처리하며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미첼의 유일한 원칙이다.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릴리안과 섹스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다. 미첼은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 해야 한다면 한다. 치고 싶으면 치고, 죽이고 싶으면 죽인다. 하지만 아무나 죽이지는 않는다. 이유가 있을 때에만, 그는 싸우고 사람을 죽인다.

『런던 대로』<선셋 대로>의 오마쥬이긴 하지만, 켄 브루언은 명작의 명성에 기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영락한 여배우와 집사, 그녀의 집에 들어간 (다소) 젊은 남자라는 구도만을 가지고 와서, 자신만의 누아르를 써내려간다. 할리우드의 빛과 그림자, 지나간 세월의 흔적 같은 것에 미첼은, 켄 브루언은 전혀 관심이 없다. 미첼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행동일 뿐이다.

<선셋 대로>를 좋아했던 팬이라면,『런던 대로』의 릴리언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 릴리언의 캐릭터는 평면적이고, 조잡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런던 대로』는 릴리언의 저택이 아니라 거리에서 벌어지는 미첼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춘다. 저택에서의 일은, 거리에서의 미첼을 방해하는, 혹은 조종하려는 음모일 뿐이다.

미첼은 그들의 음모 덕분에, 한순간 느꼈던 희망에게 완벽하게 배신당한다. 하지만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미첼은 냉담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아주 심플한 켄 브루언의 문체처럼. 그런 미첼의 선택, 행동을 보고 있으면 문득 그를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악당이어도 좋으니, 미첼처럼 단호하게, 직선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악당이 되고 싶다면 되자. 단 자신만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악당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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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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