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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와 타나토스, 젊음과 늙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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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편하게 감상할 수 없는 이유 - 추하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의미도 됩니다. 과장되고 음흉한 표정을 지닌 노인의 가면은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



지금까지 벌여놓은 일들에 주석 다는 일을 이제 막 시작한 저로서는 나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늙어가면서 이 소리만큼은 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있는데, 그건 추하다는 말이지요.

추하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는 의미도 됩니다. 과장되고 음흉한 표정을 지닌 노인의 가면은 고대 그리스 희극에서부터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희극에 쓰이던 것까지 종류가 다양하지요. 노인 가면을 쓴 희극배우는 역한 냄새가 나고, 잔소리도 심해 사람들을 성가시게 구는 역을 주로 하게 됩니다. 은연중에 관객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존재감 없이 살아야 노인답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아요. 살아 보려고 애쓰는 순간부터 노인은 바로 구질구질하고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변모하고 맙니다. 젊은 여인을 흠모하여 음탕한 눈으로 쳐다보는 할아버지나 어린 남자를 유혹해보려고 버둥대는 할머니는 관객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거든요.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쓴 『바보예찬』을 보면, “저승에서 막 돌아온 송장 같은 할머니가 암캐처럼 뜨끈뜨끈하게 군다. 쉴 새 없이 화장을 하고 손에는 늘 거울을 들고 있으며, 시들어 물렁물렁해진 젖가슴을 꺼내 보이면서 사그라져 가는 욕정을 일깨우려 한다. 처녀들 틈에 끼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연애편지를 쓰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런 할머니들을 보고 비웃으며 다시없는 미친년들이라고 말한다” 라는 식으로 노파를 추하게 희화화하고 있습니다.

할머니의 입장에서 읽어보면 희극적이 아니라 비극적일 수도 있는데 말이에요. 젊을 적에 할머니는 매력적이었겠지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젊은 여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겁니다. 이 글에 딱 어울리는 그림을 보여드릴게요. 플랑드르의 화가 마시스(Quenten Massys, 1466-1530)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늙은 부인」인데, 마시스는 이 그림 외에도 『바보예찬』에 나오는 어리석고 기괴한 인물들을 소재삼아 그림을 그렸지요.

쿠엔틴 마시스, 「그로테스크한 늙은 부인」
패널에 유채, 1525-30, 64.2x45.5cm
내셔널 갤러리

화가는 지금 단순히 못생긴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노파의 모습을 골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숭아처럼 어여쁜 가슴을 가진 아가씨가 입었으면 마냥 사랑스러울 법했을 목둘레가 깊이 파인 옷 위로 쭈글쭈글한 가슴살이 삐져나와 있습니다. 눈길이 그곳에 머무는 것이 민망합니다. 젊고 싶고, 예쁘고 싶은 노인은 오히려 늙고 추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인의 모습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그림에도 나오는데, 추하게 보려고 들면 여기 이 노인도 추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자비(시몬과 페로)」라는 이 작품은 로마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건데요.

페테르 루벤스, 「로마의 자비(시몬과 페로)」, 캔버스에 유채, 1625, 186x155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페로는 젊은 여인이고, 그녀의 아버지가 시몬이에요. 오해로 인해 중죄를 선고받은 아버지는 굶어 죽을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형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까 궁리를 하던 페로는 꾀를 내었습니다. 매일 감옥에 면회 가서 간수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자신의 젖을 먹이기로 한 거예요. 그녀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결국 아버지는 굶어죽지 않고 오해가 풀릴 때까지 원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그림은 편하게 감상할 수가 없는 면이 있어요. 딸의 효심을 전하기엔 아버지에게 젖을 물리는 딸이 너무 관능적으로 그려졌거든요. 우윳빛 피부에 토실토실한 그녀의 젖가슴이 붉은 옷 위로 탐스럽게 도드라져 보이네요. 화면 오른쪽 위, 창살 틈새로 간수 두 명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침을 꿀꺽 삼키며 엿보는 모습이 결정적이지요. 분명 자비스러운 여인이고 효성스러운 딸의 이야기인데, 내용을 모르는 채 그림으로만 보면 흰 수염을 기른 욕정에 찬 노인이 여인의 싱그러운 몸을 신나게 탐하는 것 같아 불쾌한 기분마저 듭니다.

내용을 안다 해도 별로 다르지 않네요. 늙은이가 자기 목숨 살려보겠다고 수치심 같은 것은 염두에도 없고, 탐욕스럽게 생명을 취하는 것 같아 보이니까요. 제가 너무 비뚤어진 시각으로 노인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무튼 제가 말하려는 것은 이겁니다. 저 살기에 급급하여 수치심을 버리는 순간, 노인은 추해진다는 거예요.

저 살기에 급급하다는 말은 에로스(Eros)적인 본능에 충실하다는 의미거든요. 자기 보존적이면서 성애적인 것이 합해진 삶에의 본능을 에로스라고 하는데, 에로스는 늙음에 어울리는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늙음에 가까운 속성은 차라리 자기 파괴적이면서 궁극적인 소멸로 치닫는 타나토스(Thanatos)적인 충동이랍니다. 물론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살기 위해 자기 꼬리를 먹으며 배를 채우는 뱀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서히 죽어가는 양상이지요.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gonard, 1732-1806)의 「사랑의 샘물」을 보세요.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사랑의 샘물」, 캔버스에 유채, 1785-88, 63.5x50.7cm, 월레스 컬렉션

큐피드들이 그릇에 떠주는 물은 아마도 마르지 않는 신비로운 사랑의 샘물이겠지요. 남자와 여자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는 그릇에 상체를 바싹 들이대고 있어요. 발을 보니 이제 막 달려와 도착한 것 같은데, 어서 물부터 마시겠다는 마음이 급해 얼굴부터 내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샘물에는 비밀이 있어요. 샘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는 그것에 중독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랍니다. 큐피드는 언제나 샘물 앞에서 장난스러운 노래를 부르지요. “맛보세요. 천 번을 맛보세요. 한 번 마신 사람은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걸요. 아무리 마셔도 채워지지 않거든요.” 즉 사랑의 샘물은 한 번 마셔서는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는 뜻인데요. 해갈되지 않는 목마름은 결국 사람을 탈진시킵니다. 생명의 추구가 자연스럽게 쇠진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런 식으로 에로스는 언제나 타나토스와 맞물립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사이에 둔 젊음과 늙음의 대조는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베니스의 죽음>(1971)에서 두드러집니다. 노년의 작가 구스타프가 글의 영감을 찾아 베니스로 가는데, 그곳에서 타치오라는 아름다운 창조물(beautiful creature)을 운명처럼 만나게 됩니다. 영귈 속에서 타치오 역을 맡았던 배우, 비요른 안데르센은 완벽한 중성미를 지닌 미소년이었지요.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만화를 아시는 분은 오스칼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아요. 실제로 오스칼의 모델은 비요른이라고 하더군요. 옛 영화답게 좀 느리고 지루하지만 비요른의 미모와, 배경에 흐르는 말러의 음악, 그리고 베니스의 기막힌 정경을 즐길 수 있어 나쁘지 않습니다.

미소년과 노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동성애의 코드로 볼 필요는 없어요. 차라리 젊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노스탤지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지금껏 작가로서 도달해보지 못했던 영원한 미를 비로소 타치오에게서 발견하게 된 구스타프는 소년을 바라보는 일에 자신의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합니다. 물의 도시 베니스에 수인성 전염병인 콜레라가 심각하게 돌기 시작했지만 그는 타치오가 있는 그곳에 그대로 머물지요.

영화 <베니스의 죽음> 스틸컷

늙음이 순수하다면 궤변일까요? 더 이상 아까울 것 없이, 남겨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늙음은 젊음보다 순수한 것 같습니다. 다 써버리고, 모두 내어주는 노인은 결코 추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게 쉬워졌군. 이렇게 쉬운 건지 왜 몰랐을까.” 헤밍웨이가 쓴 저 유명한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대사이지요. 이 책은 불굴의 의지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더군요. 평온함에 대한 부분이 끝부분에 있었어요.

노인은 더 이상 쓸 에너지가 없을 만큼 모두 쏟아 부었고, 그리고 몽땅 잃었지요. 아무도 그가 그 큰 청새치를 잡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는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기로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전부 써버렸기에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모든 걸 받아들이는 순간, 마침내 쉬워진 것이지요. 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체념’의 의미가 혹시 이런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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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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