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목숨 끊은 여인, 누군가 그녀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더 이상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을 때?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신기루라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도 억울하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무엇인가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자살에 대해 수많은 경우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글ㆍ사진 김봉석
2011.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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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대체 어떤 경우일까? 더 이상은 세상을 살아갈 힘이 없을 때?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신기루라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나도 억울하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무엇인가 때문에 도저히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의 자살에 대해 수많은 경우를 추측해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사람이 정말로 왜 죽었는지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거나, 너무나도 강인했던 것처럼 보였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을 끊는 이유는 더더욱. 게다가 자살하는 사람 중에서 유서를 쓰고 죽는 경우는 의외로 10% 정도라고 한다. 당사자가 설명을 하지 않은 이상, 아무리 추측을 해도 그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이다. 본인이 되지 않는 이상은, 그 마음의 심연을 헤아리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자살을 수단으로 택하는 것은 어떨까? 독이나 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살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것. 그가 더 이상 삶에 희망을 느낄 수 없도록,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철저한 절망에 빠트리는 것. 그런 방법으로 자살을 시킨다면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살방조죄도 구체적으로 자살을 도운 경우에만 해당하니까.

하지만 이 방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그가 궁지에 몰렸을 때에도,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자살을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모르는 것처럼, 때로는 아주 사소한 하나의 이유 때문에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는 경우도 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가 없다.

그가 죽으면 거액이 들어온다거나 너무나도 분명한 복수의 이유가 있다면야 모를까, 자살을 시키기 위해서 쏟아야 하는 시간과 노력을 생각해 보면 다른 것을 이루는 게 낫다. 자살을 유도하는 과정이 범인에게 너무나도 짜릿한 쾌락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데니스 루헤인의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에는 그런 사건이 나온다. 한 여인이 자살했다. 그녀가 자살했다는 데에는 한 치의 의혹도 없다. 하지만 사립탐정인 켄지는 사건을 파헤친다. 죽기 몇 개월 전 스토커 때문에 여인의 의뢰를 받았던 켄지는, 그녀가 그냥 자살할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살이라면, 뭔가 그녀를 망가뜨린 외적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야비하고, 아주 파괴적인 무엇인가가. 그리고 사건은 켄지의 의심대로 흘러간다. 그녀가 자살한 것은 평범한 이유가 아니었다. 의도적인 자살에의 손길이, 완벽하게 그녀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녀는 결국 자살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대체 범인은 왜 그녀를, 그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죽인 것일까?

데니스 루헤인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영화화된 두 편의 작품 때문이다. 각각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마틴 스콜세지가 연출한 <미스틱 리버>와 <셔터 아일랜드>(국내에는 『살인자들의 섬』으로 출간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세 남자가 중년이 된 후 딸의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두려움과 오해 그리고 분노의 소용돌이를 그린 <미스틱 리버>는 앤소니상과 베리상 등을 수상한 걸작이다. 보스턴을 배경으로 범죄소설을 쓰는 데니스 루헤인은 최근 출간된 역사소설 『운명의 날』에서 보이듯 실제의 사건과 역사적 배경을 튼튼하게 바탕에 깔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사회의 현실을 소설적으로 파고들면 그 끝에 범죄소설이 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미국의 급소에 대해 쓰고 싶다면,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미국의 다른 얼굴에 대해 쓰고 싶다면, 범죄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다.’ 이 사회를 말하기 위해 범죄소설을 택한 데니스 루헤인답게, 그의 소설에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내면이 풍성하게 담겨 있다.

사립탐정 파트너인 켄지와 제나로는 한때 부부였고, 지금은 친구가 되었다. 요즘은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의 범죄소설이어도, 남자 주인공은 터프하면서도 비교적 로맨틱한 경우가 많다. 악당에게는 폭력적이지만 여성에게는 부드럽고 관대하다고나 할까. 켄지 역시 그런 타입이다. 제나로가 독립적인 성인 여성인 것에 비하면, 켄지는 몸만 큰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다. 켄지의 절친인 부바 역시 아이 같은 어른이고. 그런 켄지가 보았을 때 카렌 니콜스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우아한 여성이었다.

‘카렌 니콜스의 여왕의 귀환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상아처럼 흰 치아, 그리고 건강미와 백치미.’ 양말을 다려 신고, 동물 인형을 수집하는 그 여자가 자살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게다가 4개월 전 켄지는, 다른 여인과 휴가를 가느라고 그녀가 남긴 메시지를 무시한 적이 있었다. 의뢰를 받은 것도 아닌 사건에 뛰어든 것은 그런 ‘낭만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캐고 들어가다 보니 켄지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밝게 빛나는 것 같았던 그녀의 인생이 너무나 참담했고, 이 세상이 너무나 잔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켄지는 사건에 빠져 들어간다.

‘카렌은 마치 타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 같았습니다….그녀는 시키는 대로 한 겁니다. 그러고는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싶은 건 그녀를 짓밟은 것 중에 우연이 아닌 것이 어떤 것이냐는 겁니다.’ 그리고 그 우연이 아닌 것들을 파헤치는 목적은 단지 범인을 잡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녀를 위해 말하고 싶어. 아니, 그녀의 삶을 망치려고 한 자나 나 자신에게 그녀의 인생도 가치가 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어.’


범인을 특정하기 전까지, 켄지는 수많은 절망에 부딪친다. 카렌의 애인이 일하던 영화계의 사람을 만났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아이들은 열심히 연기를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성장 호르몬과 처절한 투쟁을 하는 거요. 물론 이길 수가 없지. 어느 날 일어나 보니 더 이상 아이가 아닌 거요. 그건 배우로서의 생명이 다됐다는 의미요. 역할이 끝났으니까. 그럼 무너지는 거지.’ ?렌이, 겨우겨우 만들어낸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고, 어느 날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을 때,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제 알았지? 사랑 따윈 없어.’라는 말을 남기고 자살을 택한 그녀.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것이 카렌 같이 가혹한 운명에 처한 사람들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 과거요.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모두 깔끔히 처리했나요? 아니면 괴로운 문제라든가 남한테 말할 수 없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나요? 그러니까 생각할 때마다 주눅이 들고 식은땀이 나는 그런 일들 말예요……사실 다 마찬가질 거예요. 우린 과거를 끌어와 현재를 망쳐버리고, 사는 의미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존재니까요. 자살하는 사람들은 단지 실천하는 사람들일 뿐이에요.

켄지는, 그를 사랑하는 한 여자에게 상처를 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심각한 내상을 입는다. 변호사인 그녀가 법정에서 얼마나 공격적이고 자신감 있는 여성이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나약한 존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작은 불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성적 갈망의 불씨가 아니라 또 다른 자아의 상처받은 갈망 같은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모습은 피폐해졌고,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비의 무게에 상처 입은 작은 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그 약함을 좀처럼 인정하고 응시하려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름다움도, 강함도, 언젠가는 모두 사라져버린다.

『비를 바라는 기도』의 도입부에 인용된 예이츠의 싯구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물처럼 흘러가 버린다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미망에 사로잡히고, 자신이 아닌 다른 역할을 연기하게 될 수밖에 없다. 강한 척 하고, 우아한 척 하고, 자신이 뭔가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한껏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이 그 역할을 더 이상 연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의 연기를 추하다고 느꼈을 때, 그는 절망하게 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도망치고 싶게 된다. 이를테면 자살 같은 것으로.

구원이요? 이 세계에서? 그건….그래요. 그건 비를 기다리는 마음 같은 거겠죠. 사막 한가운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마음.

데니스 루헤인은 결코 낙관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미친’ 현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라고 말한다. 결코 오지 않을 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래도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은 기도를 올리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구원 같은 것은 없다. 자신의 얼굴을 응시하고, 스스로의 길을 걸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P.S.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는 4, 5번째인 『가라, 아이야, 가라』『비를 바라는 기도』가 먼저 나오고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2), 데뷔작 『전쟁 전 한 잔』(1), 『신성한 관계』(3)가 뒤죽박죽 나오며 완간되었다. 그 덕에 한때 부부였다가 5편에서는 친구가 된 켄지와 제나로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밖에도 『미스틱 리버』, 『살인자들의 섬』, 『운명의 날』과 단편집 『코로나도』도 출간되어 있다.



 
#김봉석 #비를 바라는 기도
8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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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1.11.13

미친 현실을 똑바로 응시하며 정신바짝차려야겠어요. 루헤인소설은 비참하고 끔찍해서 책장이 잘 안넘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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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2011.06.23

아마도 스스로의 목숨을 거둔다는 일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더이상 돌아올 수 없는 나락에 굴러 떨어져 더이상 한 움큼의 희망이라는 것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일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우를 범하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차기도 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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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티샨티

2011.06.14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헤어나기 힘들 때 한 줄기 빛을 바라는 마음은 사막에서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갈수룩 목숨을 끊는 이들이 늘어나 울울한 자화상을 드러내는데 뭔가 희망을 불어넣을 수 있는 긍정적인 믿음을 살려 줬으면 합니다. 하드 보일러 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가끔은 안 보던 장르까지 섭렵하여 지평을 넓혀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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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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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루헤인

플로리다 대학원 시절, 미국 현대 단편문학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 등을 사숙(私淑)하며 작가로서 꿈을 키웠다. 그러나 1990년 초까지만 해도 석사 학위를 소지한 작가 지망생이 보스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리츠 칼튼 호텔의 주차 요원으로서 일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그가 오랜 시간의 준비를 거쳐 1994년에 발표한 첫 작품 『전쟁 전 한잔』은 그에게 ‘셰이머스 상’의 영애를 안겨주었고, 이후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 『신성한 관계』, 『가라, 아이야, 가라』, 그리고 『비를 바라는 기도』 등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끌었다. 2001년 발표한 『미스틱 리버』는 미국 최대 인터넷 서점 Amazon.com의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5주 동안 랭크되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그의 작품은, 세계적인 추리 문학상인 '앤소니 상' 및 '배리 상', 그리고 '메사추세츠 북 어워드 픽션 상'을 수상하였으며, [뉴욕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Amazon.com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평단과 대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동시에 모았다. 『미스틱 리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4000만 달러 이상의 수익과 2004 아카데미 주요 부문 수상을 하였다. 2003년 발표한 『살인자들의 섬』은 기막힌 반전이 힘입어 또다시 [퍼블리셔스 위클리], Amazon.com 의 올해의 책에 선정되었으며, 마틴 스콜세지 감독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대작 영화 「셔터 아일랜드」로 제작되어 전 세계 3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거두었다. 책은 국내에서도 10만 부 이상 판매되어 하드보일드 스릴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2006년 그가 직접 연출한 연극 시나리오와 단편을 모은 단편집 『콜로나도』를 출간하였으며, 여기에 수록된 단편은 『올해 최고의 단편들』, 『올해 최고의 추리소설들』에도 수록되었다. 2008년에는 신작 『운명의 날』로 또다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일본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2009 선정작이 되었다. 2012년에 발표한 『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는 그해 [퍼블리셔스 위클리] 선정 올해의 책을 비롯하여 2013년 에드거 상 수상 후보에 오르는 등 큰 인기에 힘입어 「아르고」로 주목받은 감독 밴 애플렉이 영화화하였다.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들은 등장인물에 대한 심리학적 통찰과 멈추지 않고 발전해 나가는 플롯, 그리고 보스턴의 어두운 과거를 훑어 파헤치는 예리한 시선으로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