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첫사랑을 못 잊을까
이소라가 부르는 「바람이 분다」를 들으며 글을 씁니다. 정말로 바람이 불어 서럽도록 꽃눈이 오네요.
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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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라가 부르는 「바람이 분다」를 들으며 글을 씁니다. 정말로 바람이 불어 서럽도록 꽃눈이 오네요. 19세기 일본의 요시토시(芳年, 1839-92)가 그린 판화 연작 『달의 백 가지 모습』 중 「시노부가오카의 달」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어요. 보세요. 가녀린 달빛 아래 꽃잎이 파르르 최후의 아름다움을 빛내며 날아 내리고 있네요. 꽃이 활짝 피어있었을 때에는 보름달 같이 터질 것 같았을 여인의 마음은 지금 이렇게 야윈 달로 기울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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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녀는 잡을 수도 없는 꽃잎들만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실컷 안아주지도 않고, 단 한 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간다는 귀띔도 없이 어느 날 떠나는군요. 차라리 모습조차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텅 빈 풍경만 뒤로 남겨두고 봄날은 저만치 멀어져 갑니다.
기다리지 말라고요? 시린 눈을 뚫고 꽃이 피기까지가 이미 힘겨운 기다림입니다.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일본풍으로 물빛 하늘색을 써서 환하게 그린 「아몬드 꽃」에도 실은 억 겹의 기다림이 숨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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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를 승리로 이끈 데모폰이라는 장수가 있었어요. 그는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어느 성에 잠시 머무는데, 그곳에서, 필리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지요. 고향 아테네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이 있기에 그 성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던 데모폰은 집으로 다녀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길을 떠났지요.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만이 그 시간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해하실 거예요. 1분 1초가 백년 같았던 필리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남자가 오지 않자 고통과 절망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그리고 그곳에 아름드리 아몬드나무가 자라났어요. 그제야 돌아온 데모폰은 눈물을 흘리며 “미안해, 미안해” 하며, 아몬드나무에 입을 맞추었어요. 그러자 울음을 터트리듯, 봇물이 터지듯 아몬드나무에서 꽃잎이 돋아났다고 하네요. 반 고흐가 그린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이에요.
이 작품은 1890년, 그러니까 반 고흐가 죽던 해에 그린 것이지요. 늘 믿고 의지하던 동생 테오에게서 예쁜 딸이 태어나자, 삼촌이 된 반 고흐는 조카가 생긴 기쁨으로 이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는군요. 아주 맑은 하늘색을 보더니 단번에 어린 조카가 무척이나 좋아했고, 숙녀가 될 때까지 늘 침실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려준 빈센트 삼촌은 숨바꼭질을 하다가 너무 꼭꼭 숨어버렸는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에요. 그림은 그리움이라고 하셨던가요. 반 고흐의 조카에게 「아몬드 꽃」은 자신의 탄생을 기뻐해준 삼촌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요.
오늘 아침 신문에서 어느 아버지가 투고한, 다 큰 딸을 위해서 손으로 꼭꼭 눌러 썼을 아름다운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옛 앨범을 꺼내보았어요. 중학교 입학하던 날 처음 엉성하게 교복을 입고 학교 가기 직전에 쑥스러워하며 찍은 사진이에요. 사진 속 교복 입은 그 아이 옆에 아빠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군요. 그리고 곧바로 사진 속의 그가 더 이상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아이가 살던 모과나무가 있는 집과 흰털 강아지도 사진 속에는 있지만, 지금은 없지요. 싱겁게 웃던 그 교복 입은 아이만 혼자 이렇게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사진과 지금의 나 사이에 따라잡을 수도, 도저히 회복할 수도 없는 엄청난 심연이 가로놓여 있네요. 그리움이란 이런 건가요. 갑자기 깨닫는 빈자리,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들…
화가들은 그리움에 젖은 사람들의 넋을 잃은 표정을 잘 포착하지요. 「첫 과일」이라는 그림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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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화가로 파리에서 주로 활동했었던 조반니 볼디니(Giovanni Boldini, 1842-1931)의 작품인데, 아름다운 한 여인이 바구니 속 딸기를 집어 한 입 베어 물고는 꿈을 꾸는 얼굴을 하고 있네요. 생전 처음으로 딸기를 맛본 것처럼, 새콤하고 말캉한 그 감각적인 느낌이 보는 이에게 전해집니다.
딸기를 입에 넣고 있는 젊고 매혹적인 여인에 우선적으로 눈길이 가는 바람에, 그 옆의 나이든 여인의 표정을 놓치기가 십상이네요. 아마도 젊은 여자의 유모일 것 같은 나이든 여인 역시 뭔지 모를 그리움에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수확한 딸기를 맛보며 두 여인은 무슨 애틋한 사연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간다 (On revient toujours a ses premiers amours)”라는 프랑스 속담이 있는데, 혹시 이들도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첫사랑을 붙잡아 정말로 끝까지 사랑해보겠다는 건가요, 아니면 어린애처럼 늘 처음 같은 사랑만 하겠다는 건가요. “끝까지 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도 있잖아요.” 여자를 절실하게 붙잡고 싶어진 남자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사랑은 붺날의 첫 개화처럼 설렘과 떨림과 오랜 기다림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하고, 떨어진 꽃잎처럼 더 이상 곁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두고두고 아프지요. 사람들은 지나간 것들에 대해 애틋함을 안고 사나 봅니다. 장소라면 이미 그곳을 떠나와 있을 테고, 시간이라면 이미 지나버려 되돌릴 수 없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릴 적 친구라면 모습이 많이 변했을 것이고, 천진난만한 아이였다면 이미 자라서 때 묻은 어른이 되어 있을 거예요. 그 어느 하나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가슴 저미도록 그리운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늘 처음사랑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철들지 못하고 멈춰버린, 그래서 지금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미완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늘 아쉬워한다는 뜻일 거예요. 완결되지 못한 빈자리는 계속해서 소록소록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7개의 댓글
필자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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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호
2012.06.30
prognose
2011.12.01
앙ㅋ
2011.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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