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아주 보통의 연애’를 하게 된 걸까? - 『아주 보통의 연애』 백영옥
보통의 연애? 상대방을 향한 질문이요, 궁금증!
나는 김한아다. 책상 위 명패에 ‘관리팀 김한아’라고 쓰여 있는, 아주 보통의 존재. 하지만 관리팀 요주의 인물이자, ‘모드’의 패션팀 수석이며 짝사랑 아니 (영수증) 스토킹 상대인 이정우는 삼 년째 나를 ‘김하나’로 부른다.
(“첫눈처럼 하얀 벚꽃 잎들이 분분히 쏟아져 내리던 아득한 4월의 저녁”이었다. 물론 계획에 있던 일이었다. 강묘희(「강묘희미용실」)처럼 계획에 없던 일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오후 여섯 시의 봄 햇살은 벚꽃의 하얀 속살을 더욱 빛나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지난 14일, 서울 홍대 부근의 한 카페에서 소설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낳은 백영옥을 만났다. 아무 이유 없이 김한아(「아주 보통의 연애」)와 강묘희(「강묘희미용실」)을 화자로 그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벚꽃이 품은 봄밤의 아득함 때문이었을까. 봄은 변덕을 부려도 좋은 아이 같다.)
‘하나’로 불린 ‘한아’씨의 이야기
나는 김한아다. 책상 위 명패에 ‘관리팀 김한아’라고 쓰여 있는, 아주 보통의 존재. 하지만 관리팀 요주의 인물이자, ‘모드’의 패션팀 수석이며 짝사랑 아니 (영수증) 스토킹 상대인 이정우는 삼 년째 나를 ‘김하나’로 부른다. 물론 사 년을 함께 일한 최 과장조차 종종 ‘하나’로 잘못 쓰는 형편이니, 그에게만 특별한 이름은 아니다.
뭣보다, 나는 소설가 백영옥이 가장 애정을 품은 인물이다. 물론 굳이 꼽으라면 말이다. 내가 믿는 게 하나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손가락은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적이 있나? 아프면 다른 모든 것을 제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렇잖나. 몸 어딘가가 아프면, 온 신경은 그곳으로만 쏠린다.
아마도, 백영옥의 신간 소설집 제목이 『아주 보통의 연애』가 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강묘희 미용실」의 강묘희가 백영옥을 투영한 인물이라, 그녀가 가장 애정을 뒀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론은 나다. 말하자면 나, 김한아는 서바이벌 창궐 시대에 살아남은 ‘슈퍼스타 K’나 ‘위대한 탄생’인 셈이다. 물론 그녀는 각 인물마다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했고, 나도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영수증 사랑 혹은 영수증 스토킹. 어디 들어나 봤나. 나는 “영수증을 통해 한 사람의 모든 욕망을 해독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그것은 누군가의 눈엔 비겁하거나 미친 짓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숫자 뒤로 외로움을 감추는 행위가 아니냐고 타박할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함께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연애를 할 뿐이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지금, 동시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연애는 ‘둘이 함께’가 아닌 ‘따로 혼자서’이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외롭다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p.32)
그것이 ‘아주 보통의’ 것은 아니라는 것, 나도 안다. 어쩌면 ‘아주 보통의 연애’는 역설적인 제목이고, 수사다. 백영옥이 나의 연애에 ‘보통’이라고 수식어를 붙인 것은, 내 연애를 지지한다는 의미보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다. 연애나 사랑, 숱하게 많은 정의와 방식이 있을 텐데, 나는 내 나름의 것을 만든 것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요,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다.
백영옥은 밀란 쿤데라가 행한 사랑의 정의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사랑은 끊임없는 질문이다. 사랑은 끊임없이 묻고 싶은 것이다. 즉, 사랑의 반대말은 이별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더 이상 상대방에게 질문할 것이 없어지고, 내게 질문할 것이 없어지는 것, 그게 무관심이고, 사랑은 더 이상 없다. 질문할 것이 더 이상 없는 존재와는 연애든 사랑이든 끝이다. 그래서, 백영옥은 소설 쓰는 것이 연애와 같다고 했나 보다. 소설을 향한 질문과 호기심이 끊임없이 샘솟는 사람이 내가 아는 백영옥이다.
이정우의 영수증이 궁금한 것도 결국은 그의 일상과 동선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나는 궁금하다, 고로 연애한다. 내가 행하는 연애는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정우의 영수증은 내 인생의 도돌이표 같은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턴지점이었다. 나는 영수증이 알려주는 대로 그가 갔던 식당으로 돌아가 오도독 소릴 내며 오돌뼈를 먹고, 그가 마셨던 하이네켄 맥주를 사서 마셨다. 꼭 함께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p.32)
그런데, 실은 나는 영수증 뒤에서 나의 삶과 욕망을 숨기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소비할 것을 강권하는 지금의 소비 사회에서 영수증은 현대인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백영옥은 그런 것을 의도하고 쓴 건 아니다. 남들 잘 모르고 흔치 않을 내 연애를 다룬 건, 영수증으로 한 사람의 일상을 담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그녀는 영수증을 모으지 않는다. 되레 영수증을 안 챙겨서 관리팀에서 핀잔도 먹는 타입이다. 재테크? 그건 일상의 백영옥이 품은 영역이 아니다. 소설 쓸 때의 백영옥은 그걸 품어도.
그러나 그녀는 타인의 영수증을 관리하고 그 의미를 해독하느라 정작 자신의 하나뿐인 삶, 영수증으로 대체될 수 없는 진짜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음을 망각한다. 그녀는 ‘타인의 영수증’ 뒤에 숨어 자신의 진짜 욕망을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pp.280~281)
우연에서 길어 올린 보통의 이야기
고생 끝에 오는 건 ‘낙樂’ 아닌 ‘병病’. 백영옥의 지론이다. 나도 그 지론에 한 표 던진다. 고생 끝에 낙 온다는 소리는, 지금처럼 계급이나 화폐의 세습화가 덜 되거나,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얘기다. 고생 죽어라 해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대부분 영역에서 그 1등도 화폐의 힘으로나 가능하다, 병을 안겨주기 십상이다. 슈퍼스타 K? 그건 일종의 판타지고 마취제다. 혹은 뽕이다. 일종의 희망고문 같은.
너무 비관적이지 않느냐고? 에이, 낙관이나 희망이 가능한 것도 ‘보통’의 시대에나 가능하다. 지금은 ‘보통을 넘어선, 혹은 보통조차 무색한’ 시대가 아닌가. 잡설 그만하고, 버지니아 울프가 1925년 내놓은 에세이 제목이 『보통의 독자』였다. 언니네이발관의 노래는 「가장 보통의 존재」였으며, 이석원의 에세이는 『보통의 존재』였다. 백영옥은 내 연애도 ‘아주 보통의’ 것으로 얘기했다. 그녀에게 ‘보통’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이렇게도 말한다. “보통이 아니라서 보통이다. 알랭드 보통을 좋아해서 보통이다. (웃음)” ‘보통’이라는 단어가 줌직한 중의적 혹은 반어적 표현이었나 보다. 그녀는 그런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내 연애를 규정했다고 한다. 나도 나쁘진 않다. 내게 이 연애는 특별하지만, 그것이 보통이 아닌 것으로 인식되는 건 나도 싫으니까.
『보통의 독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소설의 적절한 소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온갖 느낌이나 온갖 생각 등 모든 것이 소설의 적절한 소재이다. 소설에서는 두뇌와 정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성질이 다루어지며 어떤 인식이라도 가능하다.” 백영옥(의 소설)은 우연에 기댄 모든 것을 소재로 한다. 그녀는 우연이 세상의 작동원리 중 하나라고 믿는다.
고백건대 나는 삶의 우연성에 겨우 기대어 살아왔다. 이 소설집 안의 주인공들의 직업이 이토록 천차만별인 것도 이런 우연의 결과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우연히 보게 된 장면에서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으므로 세밀하게 계획된 인생의 포트폴리오 따윈 믿지 않게 되었다. (p.285)
그녀는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소설가라는 직업이 개인적 정체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서. 영수증을 통해 사랑에 빠진 나를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소설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도 지면이나 분량의 한계 혹은 조직에 속해있음으로써 완벽하게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기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다. 그 한계는 소설을 쓰는 전업 작가가 되면서 해결됐다.
그것은 또한 삶의 우연성에 좀 더 몸과 마음을 열어둘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잇닿아 있듯,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일상의 잔재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직조하는 것보다 우연적인 것들의 충돌과 마찰에서 소설을 길어 올린다. 어쩌면 그녀는 어느 순간, 잘 받지도 않는 영수증을 받아들면서 내 이야길 떠올렸을지도…
백영옥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는 측면에서 소설은 질문이다. 어떤 것이든 관계를 맺지 않는 것에서, 그것을 관통하는 글을 쓸 수는 없다. 삶에 대한 질문의 방식이 소설이고, 살다보면 끊임없이 의문을 던진다.”
일상에서 받은 영향과 질문이 ‘아주 보통의 연애’를 낳았다는 것.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도 직업적인 정체성과 개인적인 정체성 사이의 파열과 괴리, 마찰 등이 드러나는 건, 직장인과 소설가를 병행하던 시기였기에 담아낼 수 있었던 보통의 이야기였다. 직업 뒤에 가려진 자신을 찾고 싶은 인물들.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카피라이터, 북 에디터, 패션지 기자 등 여러 직업을 거친 백영옥의 경험과 심정이 담긴 이야기.
나, 김한아는 여기서 바통을 넘긴다. 강묘희가 뒤를 잇는다. ‘대신 인생’이 지겨워져서, 자신의 이름과 같은 ‘강묘희미용실’을 찾아 훌쩍 사천으로 떠났던 그 여자. 아마도 백영옥과 가장 가까웠을 법한 서른여덟의 인생 재편집자.
정돈된 기표를 벗어던지자 찾아온 행복감
나 강묘희, 서서 끼니를 때우는 서른여덟 직장인의 삶을 살다가 돌연 사표의 첫 문장을 ‘일신상의 이유로’ 적고선 출판사에서의 십육 년을 사무적으로 정리한 여자. 혼자인 것이 그저 좋았던 시절은 지났지만, 그렇다고 외로움에 침잠만 하진 않는 사람. 누군가는 내게 말한다. 뭔가 뚜렷하진 않지만, 돌파구를 찾는 기운이 있다고.
나쁘지 않다. 나는 한 번도 희망 비슷한 것을 포기한 적은 없으니까. 소설가 H가 이혼을 ‘당하게’ 만들었고, 내비게이션을 꺼도 나는 되레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여유도 있다. 뭐랄까. 정돈된 기표를 벗어나면서 느끼는 행복이랄까.
따지고 보면, 「육백만원의 사나이」에서 평생 돈 버는 기계로 살아온 남자도 그랬다. 빡빡한 스케줄로 가득했던 사업이 망하고, 그 남자는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행복해지지 않았던가. 백영옥의 말마따나, 대한민국 사회에선 개인적인 자아보다 사회적 자아가 큰 역할을 하고, 행복하게 같이 갈 수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충돌지점이 있다.
사실 그는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었다. 느리지만 무엇인가 천천히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때대로 심장이 터질 듯 아팠지만 그것이 힘들게 산을 오른 탓인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고 있다는 충만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원한 건 바로 그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이런 느낌들이었다. 숨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잦아드는 것. 서서히, 조용히, 구십 노인의 임종처럼 평화롭게 말이다. (p.64)
내비게이션 없이도 길 위에 있을 수 있다!
내가 감행했던 돌파구, 즉 사천으로 간 것은 백영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을 쓰고 싶었던 백영옥이었다. 그런데 작가를 인터뷰하거나 리뷰만 쓰는 현실. ‘대신 인생’ 같았다. 결핍감도 느껴지고. 나도 그랬다. 스스로 질문을 하고 길을 찾아 나선 거다. 16년 직장 생활했으면서 어떻게 하루아침에 때려 치느냐고?
그렇게 보여도 그게 아니다. 내 안에서 얼마나 스스로 질문을 던졌겠나. 길을 찾아 나선 것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 뿐이다. 즉, 상황에 던져진 인물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의 이야기다. 포털사이트에서 내 이름과 같은 ‘강묘희’로 검색해서 나온 사천의 ‘강묘희미용실’. 그곳을 찾아 사천으로 떠난 것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내겐.
그녀는 화려하거나 대단한 여행이 아니라 자신과 이름이 같은 원장의 미용실을 찾아가는 ‘사소한’ 일에서, ‘내비게이션’대로 따라가지 않는 우연과 실수로 가득한 여행 속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다. (p.272)
이건, 재밌게도 백영옥의 경험과 일치한다. 직장을 옮기는 등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 그녀도 같은 행위를 했다. 그랬더니 반짝 뜨는 이름, ‘백영옥 미용실’. 역시 사천이었다. 나와 달랐던 것은, 내 경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쉬는 날이었는데, 백영옥은 월차를 내고 충동적으로 사천까지 내려갔으나 백영옥 미용실을 찾지 않았다. 막상 내려가니, 백영옥 원장님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쑥스러워서. 남편과 함께 갔었는데, 결국 사천에서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는 것으로 일탈을 마쳤다. 결국 ‘삼천포’로 빠진 셈이었다.
강조하고 싶은데, 서른여덟, 바보짓을 해도 된다. 내비게이션을 꺼도 죽지 않는다. 길 위를 여전히 달릴 수도 있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다른 길과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것에 충분히 안도해도 된다.
내비게이션이 삭제한 느림과 우연이 어쩌면 우리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행간의 진짜 의미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점점 불규칙한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오늘 못 가면 내일, 내일 못 가면 모레 가면 그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멍청한 짓이었지만 서른여덟에 이런 바보짓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얼마간 안도했다. (pp.160~161)
어쩌면 나는 그것을 권하고 싶다. 내비게이션 없이도 우리는 길을 잘 다녔다. 내비게이션에 의존함으로써, 우리의 길에 대한 감각이나 감수성이 퇴화할지도 모른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것보다 이게 더 걱정할 일이 아닌가. 나름 시크할 것 같고, 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일 거라는 오해(?)도 받는 백영옥도 가끔 황당하고 정신줄 놓는 일을 종종 벌인다.
그녀의 육성으로 들어보자.
“이건 『스타일』에도 나오는 얘긴데, 영화를 보려고 밤11시 표를 예매했고, 그 시간에 가서 좌석에 앉아 있었다. 어떤 커플이 오더니 자신들 자리라는 거다. 내 자리라고 우기다가, 자세히 보니, 오전 11시 표였다. 더 황당한 건, <스파이더맨2>를 보겠다고 표를 끊어서 들어갔는데, <투 가이즈>가 나오는 거다. 발음이 잘못됐던 건지, 엉뚱한 표를 끊어갔던 거고, 확인도 제대로 안 한 거다. (웃음) 내가 좀 빈틈이 많다. 한 번은 엄마 집에 갔다. 착한 딸 노릇한다고, 설거지를 했다. 녹색 세제가 있기에 그걸로 설거지를 다했다. 그런데 나중에 엄마한테서 난리가 난 거다. 설거지를 뭐로 했냐고. 알고 보니, 세제가 아니고 기름이었다. 거품도 안 났을 텐데, 아무 생각 없이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한 거다. (웃음)”
결국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대리인생이었던 나 강묘희도 서른여덟이 돼서야 그것을 알고, 탈옥한 셈이다. 백영옥은 글을 쓰는 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세상을 더 잘 알게 되는 것만은 아닌가보다. 그녀는 소설을 쓸수록, 세월을 머금을수록,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얘기하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지고, 사람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는다.
글을 쓰는 것은 단지 내 직업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소설들을 정리하며 더 분명한 방식으로 알게 되었다. 만약 소설을 쓰지 못했다면, 나는 나 자신을 무척 혐오하는 인간이 되었을지 모른다. 무수히 많은 실패를 견디게 했던 것도 결국 쓰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p.285)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금-여기의 환경은 소설 쓰기를 힘들게 만든단다. 소설가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말하는 방식으로 현재를 말하는 건 식상하고, 소설은 보통 사람들이 잘 안 보이는 곳, 미세한 틈새나 흘린 자국 등에 프레임을 거는 것인데,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란다. 소설이, 소설가가 할 일을 뺏는 현실이다.
하긴 이곳은 정말 하드보일드하다. 뉴스만 봐도, 소설이나 영화가 필요 없을 정도다. 굳이 소설을 들어 다른 세상을 상상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서울을 ‘골 때리는 도시’라고 했다. 역시 동의한다. 총기를 사용 못하도록 하는 국가다보니, 총기난사사건 등은 없지만, 사회적 타살은 거침없이 일어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역시, 사회적 타살의 일환이며, 자살률이 높다는 통계가 그냥 나온 것도 아니다.
웰컴 투 서울. 넌 세상에서 가장 골 때리는 도시에 온 거야! 이 도시의 코드에 맞추려면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먼저 개통시켜야 할지,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p.91)
백영옥은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루해졌으면 좋겠다.” 나도 동의한다. 더 이상 다이내믹이라는 이름으로, 역동성이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비게이션 없이도, 스마트폰 없이도 우리는 살 수 있는데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창을 점점 좁히고 있는 건 아닐까. 느림과 우연이 빚어내는 또 다른 세계들이 있음에도, 애써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고.
아마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도 좋은 것이, 사람들이 소설을 더 많이 읽을 터. 심심하니까! 우리나라에서 소설을 안 보고, 책을 덜 보는 건, 뉴스만 틀어도 충분하기 때문은 아닐까. 이왕 십육 년 직장생활을 때려친 마당에, ‘심심한 나라 만들기’ 프로젝트라도 해야할까보다. 나 강묘희, 심심한 나라 만들기 연구소장, 어때?
백영옥의 복수극 기대한다!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할 것 같다. 앞서 김한아를 비롯해 나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 이야기로 채워진 『아주 보통의 연애』. 백영옥에겐 추억의 앨범 같았나봐. 하긴 나와 비슷한 일도 있긴 했으니, 그때 기억이 얼마나 새록새록 떠올랐겠어. 자신의 죽은 애인을 사랑했던 고양이 이야기를 다룬 「고양이 샨티」가 2002년 쓰였으니 10여 년. 짧은 이야기들이 긴 시간에 걸쳐 있는 책, 앨범처럼 느껴질 만하다.
모쪼록, 내가 기대하는 건, 많은 이들에겐 다소 의외가 될지 모르겠는데, 백영옥의 복수극이다. 그 전조는 「푹」에도 있다. 텍스트를 주도하진 않지만, 강지영은 음험한 사회의 공모에 자경단처럼 나서서 공모자들을 응징한다. 즉, 복수를 한다. 백영옥에겐 이것이 트레이닝의 과정이었다. 복수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행위는 인간이 가진 다양한 감정을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 인생관, 트라우마, 성격 등 굉장히 많은 것이 응축된 키워드가 복수라는 거다.
소설을 쓸 때도 외로움이나 소외 등은 추상적이나 복수는 구체적이다. 그것이 그녀를 당기는가보다. 복수를 떠올렸을 때, 연상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의 다른 방식으로 스럴러나 캐릭터 장르를 쓰고 싶은 로망이 있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최제훈 작가의 소설을 굉장히 재밌게 읽었고, 굉장히 재밌는 스릴러나 장르물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녀 역시 그런 장르를 강렬하게 쓸 수 있는 날을 향해 연마하고 있고, 고민하고 있다. 잘은 몰라도, 내가 H를 향해 복수하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지.
한국과 중국에 온라인으로 동시 연재될 세 번째 장편소설을 위해 그녀는 일산에 작업실을 얻어 작업 구상에 한창이다. 뭣보다 그녀는 독자들이 고맙다. 기적 같단다. 이렇게 살기 힘들고, 경쟁이 심한 나라에서 문학적 순정을 갖고, 돈 내고 책을 사고, 방사능 비를 뚫고 강연회에 오기도 하고. 그녀는 이런 순간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고 싶단다. 김한아나 강묘희의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도 기적이겠고. 모든 우연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만들어진 기적.
지금 이 글을 읽고 있을, 한 권의 책을 읽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내가 가진 가장 뜨거운 고마움을 보낸다. 다시 한번. 고마워요. (p.286)
강퍅해지고 신산해지는 사람살이지만, 그녀는 내면의 소외감 느끼지 말고, 살던 대로 편하게 살 것을 권한다. 내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고, 주변에 공연한 신경을 쓰기보단 자신만의 페이스와 템포로 살아갈 것. 나 강묘희가 훌쩍 떠나서 깨달았던 것처럼. 가장 보통의 존재들이 아주 보통의 연애를 하거나 보통의 독자로 책을 만나면서 느끼는 행복, 그것이 보통의 삶으로 인식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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