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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유골의 도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소한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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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였던 보슈의 어머니는 살해당했고, 보슈는 어린 시절 내내 청소년 보호소와 위탁 가정을 전전해야 했다. 16살에 자원입대하여 베트남으로 향한 보슈는 땅굴에 들어가 폭탄을 설치하는 척후병 ‘땅굴 쥐’로 복무하게 된다. 처음 보슈가 등장한 『블랙 에코』에는 보슈가 땅굴 쥐로 있으면서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는지가 잘 나와 있다.

어렸을 때, 전 세계 미술관의 소장품을 담은 화집이 집에 있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우피치, 프라도 등을 가야만 볼 수 있는 그림과 조각품들이 모두 실려 있었다. 딱히 미술에 취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눈요기하기는 좋았다.

화가나 작품의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냥 보고, 틈이 나면 또 들춰보고 하는 식이었다. 그 중 몇몇 이미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어른이 되어 다시 보았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을 든다면, 네덜란드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작품이었다.

작품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곤충처럼 생긴 괴물들이 인간을 통째로 자기 입속에 밀어 넣는 모습이나 벌거벗은 남녀를 때리고 죽이는 광경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일종의 지옥도로서 너무나 선명했다. 이사를 다니다가 그 책은 사라지고, 어른이 되어 다시 그 그림을 만났을 때에야 히에로니무스 보슈란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 그림이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란 것도.

15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인 보슈는 종교적인 소재의 그림을 그리다가 점차 초현실주의적인 민담 혹은 상징의 세계로 나아갔다고 한다. 종교를 소재로 한 미술에서 지옥을 그리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지만, 보슈의 작품은 유난히 두드러졌다. 지옥이 아니라, 현실의 뒤틀린 이미지 같았다고나 할까.

마이클 코넬리의 『유골의 도시』는 히에로니무스 보슈가 주인공인 미스터리 시리즈다. 실제 화가는 아니고, 주인공의 어머니가 보슈의 이름을 따서 붙여준 것이다. LA의 형사인 해리 보슈. 현실에서도, 이름을 따라서 주변 상황이 돌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작가가 부여한 이름이라면, 그건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를 말해주는 상징인 경우가 많다.

창녀였던 보슈의 어머니는 살해당했고, 보슈는 어린 시절 내내 청소년 보호소와 위탁 가정을 전전해야 했다. 16살에 자원입대하여 베트남으로 향한 보슈는 땅굴에 들어가 폭탄을 설치하는 척후병 ‘땅굴 쥐’로 복무하게 된다. 처음 보슈가 등장한 『블랙 에코』에는 보슈가 땅굴 쥐로 있으면서 어떤 끔찍한 경험을 했는지가 잘 나와 있다.

LA로 돌아온 보슈는 형사가 되었고, 베트남의 전장과 사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전투’를 벌이면서 살아간다. 화가 보슈가 그린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인생을, 형사 보슈는 살아가고 있다.

『유골의 도시』는 해리 보슈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다. 앤서니 상과 배리 상을 받았고, 에드거 상, 스틸대거 상 등 수많은 미스터리 상의 후보작으로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걸작이다.

그런데 『유골의 도시』에 등장하는 사건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대단히 소박하다. 연쇄살인범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범인의 캐릭터가 유별나지도 않다. 소소한 범죄를 추적했더니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거나 거물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나 사건의 트릭 역시 기발함과는 거리가 멀다.

평범한, 우리의 주변에서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인 범죄. 사랑과 증오 또는 연민과 질투가 이리저리 뒤섞여 만들어내는 현실의 지옥도. 괴물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광경이 펼쳐지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충분히 잔혹하고 서글프다.

새해 첫날, 해리 보슈는 할리우드 언덕에서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뼈를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는다. 희생자는 20년 전에 사망했고, 생전에 수많은 학대를 받았던 아이로 밝혀진다. 피해자의 신원부터 밝혀내려는 보슈와 파트너인 에드거는 할리우드 언덕의 주민인 니콜라스 트렌트에게 아동 성추행 전과가 있다는 것을 알아?다. 그런데 보슈가 트렌트에게 사정 청취를 한 다음 날, 트렌트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상층부에서는 트렌트를 소년의 살해범으로 몰아가려 하지만, 보슈는 희생자가 자신의 동생인 것 같다는 쉴러 들라크루아를 만나게 된다.

보슈가 다룬 끔찍한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유독 이런 사건은 보슈를 괴롭힌다. 어린아이가 학대를 받다가 살해당해 20여 년간 야산에 묻혀 있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고, 쓸쓸히 기억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피해자가 어린이인 사건들은 늘 보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런 사건들은 그를 완전히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상처를 입혔다. 그 독이 묻은 탄알을 막을 만큼 두꺼운 방탄조끼는 없었다. 어린이 사건들은 이 세상이 잃어버린 빛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어린이, 약자를 대상으로 한 사건들은 시간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범람한다. 여전히 모성과 가족에 대한 신화가 강한 한국에서는, 근친에 의한 학대나 범죄를 잘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유아가 죽었을 때 1차 용의자는 부모이고, 배우자가 죽었을 때 1차 용의자가 남편과 아내인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그저 지나치는 사람보다도 못한 가족, 부모는 세상에는 널려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보슈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늘 방황한다.

그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진정한 악은 세상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기껏해야 양손에 물이 새는 양동이를 하나씩 쥐고 절망의 어두운 시궁창 속을 허우적거리고 다니며 물을 퍼내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골의 도시’라는 제목은, 인간의 악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수 천 년 전의 유골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현재의 범죄들에 대해서도 조사하는 이는 말한다. ‘이 여자는…9천 년 전에 살해당했고, 시체는 범죄를 은닉하기 타르 구덩이로 던져진 것 같아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질 않는군요.’ 그건 딱히 범죄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와 다른 누군가의 문제가 아니다. 『유골의 도시』는 가장 평범한 범죄를 다루고 있다. 가까운 사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순간의 오류와 그릇된 선택들. 그건 결코 그들이 악인이어서가 아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 에서도 나오듯, 우리 누구나가 어떤 찰나에는 ‘악인’이 될 수가 있다.


보슈는 언제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 안에서 아무리 뛰어다니고, 악인들을 잡아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내팽개치고 안온하게, 혹은 자연으로 들어가서 홀로 살아갈까? 보슈가 택한 것은 그저 살아가는 길이다. ‘난 믿음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 푸른 종교라 불러도 좋고 다른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그건 이 사건들을 이대로 놔두진 않겠다는 믿음이에요. 내가 찾아내도록, 내가 뭔가 바로잡아주도록 하기 위해서 튀어나온 거라는 믿음이에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를 잡아주고 지탱해주고 일을 계속하게 만들고 있어요.’ 살아가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고 세워주는 것. 그것만이 보슈의 유일한 종교다.

『유골의 도시』에는 또다시, 보슈가 사랑한 여인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비극은 그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이 원해서, 자신이 만들어낸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 비극이 궁금하다면, 『유골의 도시』를 읽어보면 된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비극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보슈가 절절하게 깨닫는 ‘진실’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길을 자기가 선택한다. 다른 사람이 길을 가르쳐주기도 하고 손을 잡고 다른 데로 이끌기도 하지만, 언제나 최종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누구에게나 상어를 막아주는 울타리가 있다. 그런데 그 울타리 문을 열고 상어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택을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마음대로 끌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이 있다고 해도, 그 운명의 무게와 향방을 정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의미다. 똑같은 차를 가지고, 누구는 흉기로 쓰고, 누구는 ‘스위트 홈’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다시 한 번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보슈는 가만히 물러선다. 물러서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기로 마음먹는다. 자신이 있는 곳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것, 그 선택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해도, 적어도 보슈의 시선과 마음은 달라졌다. 내가 ‘어디에도 없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다음 선택은 자명하다. 자신이 있을 곳을 정하는 것. 그래서 해리 보슈는, 형사를 그만둔다. 하지만 보슈의 인생은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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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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