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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총기난사 사건 때 도망가지 않은 이유

『우부메의 여름』, ‘쿄고쿠도’ 시리즈의 첫 번째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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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에서 소설가이면서 생계를 위해 잡설을 팔기도 하는 세키구치는 20개월째 임신을 하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은 어디론가 실종되었다. 기묘한 사건의 윤곽을 더듬어보던 세키구치는 언제나 그렇듯 쿄고쿠도에게 자문을 구한다. 와중에 그들의 친구인 탐정 에노키즈에게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눈에 명확히 보이는 것만을 믿는 태도는, 꽤나 합리적으로 보인다. 자신의 경험에만 함몰될 위험이 있긴 하지만 일단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의 근거는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크게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의 시야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개입하지 않거나 믿을만한 근거와 정보에 의지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만 있다면, 나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과연 믿을만할까? 눈으로 보면 믿을 수 있다, 는 관념은 대체로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 지각을 신뢰할 수 없다면? ‘시각’ 자체를 의심하게 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부메의 여름』의 주인공 쿄고쿠도는 말한다. 우리의 뇌는 ‘뇌가 고른, 소위 편중된 약간의 정보만을 자각할 뿐’이라고.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뇌로 전달되고, 뇌가 정보를 처리하면서 일부만을 지각한다.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모호한 것은 그냥 넘겨버리거나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는 것도 늘 벌어지는 일이다. 즉 우리의 감각, 지각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쿄고쿠도의 어투를 빌려 말한다면,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것이다.

쿄고쿠 나츠히코의 『우부메의 여름』은 소설가 세키구치와 고서점 주인이자 신사의 신주인 쿄고쿠도를 주인공으로 기괴한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쿄고쿠도’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이다. 이 시리즈는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 『철서의 우리』 그리고 외전인 『백기도연대』로까지 뻗어나간다.

일본에서는 라이트노벨로 분류하기도 하고, 본격 미스터리로도 칭해진다. 개성강한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요설을 일삼는다는 점에서는 라이트노벨이고, 치밀하게 구축된 트릭을 공들여서 파해(破解)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본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세계요괴협회 회장이기도 한 쿄고쿠 나츠히코의 소설답게 ‘요괴’를 수수께끼의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기묘한 것은, 요괴가 주요한 모티브나 소재로 등장하지만 결코 뭔가 불가해하거나 초자연적인 결말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철저히 과학적인, 논리적인 사유에 의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등장인물들의 온갖 미망(迷妄) 덕분에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것뿐.


『우부메의 여름』에서 소설가이면서 생계를 위해 잡설을 팔기도 하는 세키구치는 20개월째 임신을 하고 있는 여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남편은 어디론가 실종되었다. 기묘한 사건의 윤곽을 더듬어보던 세키구치는 언제나 그렇듯 쿄고쿠도에게 자문을 구한다. 와중에 그들의 친구인 탐정 에노키즈에게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온다.

우부메, 망량, 광골 등 요괴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 있는 ‘쿄고쿠도’ 시리즈에서는 일반적인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이 벌어진다. 요괴나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된 설명이 아니고는 도저히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고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요괴 전문가인 쿄고쿠 나츠히코는, 태연한 얼굴로 쿄고쿠도의 입을 빌려 세키구치에게 타이르듯, 독자에게 말해준다.

이 세상에는 이상한 일 같은 건 아무 것도 없다네, 세키구치 군…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 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연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당연한 걸세. 되어야 하는 대로 되고 있을 뿐이야.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윈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면, 쿄고쿠 나츠히코의 전문 분야인 요괴는 어떻게 된 것일까? 소설 속의 사람들은 요괴를 보건, 요괴 때문이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미망에 사로잡힌다. 쿄고쿠 나츠히코는 초자연적인 무엇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거기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망량은 사람에게 들러붙는 게 아니네. 그러니 떨어뜨릴 수 없어. 현혹되는 것은 사람 쪽이지. 망량은 경계적인 존재이고, 따라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네. 그리고 섣불리 손을 대면 현혹당하네.’(『망량의 상자』)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경계를 기웃거리게 되지만, 정말로 현혹되면 인간이 아닌 오니(鬼)가 되어버린다. 쿄고쿠 나츠히코는 그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혹은 넘어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다.

영화 <우무베의 여름>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버젓이 눈앞에서 일어나곤 한다. 쿄고쿠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사건 대부분이, 우리들의 마음이나 욕망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뭔가 초자연적인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더 편하고, 자신의 기존 인식을 바꾸지 않아도 되니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이 조화로운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살아가면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 고 생각하니까.

과하게 말하자면, 잘못을 저지르고도 주말에 교회 가서 회개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상의 인식이나 행동을 바꾸기보다는, 지금 이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존재를 끌어들여 책임을 돌리는 것이 편하니까. 그런 면에서 ‘종교란, 뇌가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신역이라는 궤변’이란 말도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지각이란 결코 완전하지 않다. 모르는 것, 불편한 것이 있으면 도망치려 하는 속성도 강하다. 알 수 없는 것을 외면하는 경우도 많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자신의 마음이 편하도록 객관적 현실 따위는 얼마든지 조작하고 왜곡시켜 받아들일 수 있다.

 

2007년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국계인 조승희가 총을 난사하여 32명이 죽고 29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다. 미국 총기 난사 중에서도 최악의 참사였던 사건을 두고 많은 음모론이 돌았다. 다양한 의심 중 한 가지는, 캠퍼스라는 열린 공간에서 한 사람의 범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였다. 사실 나도 의심스럽긴 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후안 고메스 후라도가 직접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만나 취재한 후에 쓴 르포 『매드 무비』를 읽고는, 조승희 혼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

총소리를 듣고도 사람들이 바로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의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일상과는 다른 특이한 것을 지각했을 때, 그것 자체를 부인하는 속성이 있다. 잘못 들은 거야, 일상적인 소음이야 등으로 간주하고 넘겨버리는 것이다.

총소리가 들렸을 때, 사람들은 소리를 듣고도 계속 강의실에 남아 있었다. 총을 쏘는 남자를 발견하고 모두 창을 넘어 도망갈 때에도, 어떤 사람들은 자리에 주저앉아 눈과 귀를 막았다. 이건 현실이 아니야, 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면서. 설마, 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장에서 부상을 당한 사람 중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눈으로 보고도, 객관적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거대하고 기이한 상황이었기에.

반드시 총기난사 같은 끔찍한 사건이 아니라도 이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편한 것,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는다. 아니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뇌는 그것을 ‘거짓’이라고 지각한다. 결국 나를 속이는 것은 나 자신인 셈이다. 그래서 쿄고쿠도는 말한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별은, 자기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법’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이 가능해지고, 반복해서 자신을 속이다 보면 스스로 길들여진다. 매 맞는 아내가, 남편이 사실은 착한 사람이고 내가 잘못해서 때린다고 흔히 믿어버리는 것처럼. 그나마 매 맞는 아내처럼 자신만을 속인다면 좋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사회가 자신을 홀대하고 무시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보다 약자인 사람들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들처럼. 쿄고쿠는 인간이 얼마나 부조리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독특한 장광설로 설명해준다. 그들은 결코 이상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바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 동시에 요괴인 것이다.

범죄자는 평균인에서 일탈한 자로 파악되지만, 평균이란 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일탈한다는 것은 난센스란 말일세. 범죄는 언제나 찾아왔다가 떠나가는 도리모노 같은 거거든… 성장과정에 원인이 없다고는 안 하겠고, 유아학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인생에 큰 상처를 입는 경우는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되지는 않아! 구보와 똑같이 비참하게 자란 사람이라도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네. 그런 것은 무시해도 좋을 일이야… 계기는 반드시 있는 거야… 비상식의 문을 여는 계기가 반드시 있고, 그것을 실행해도 될 듯한 분위기를 가진 온바코님이라는 특이한 환경이 만들어져서 비로소 범죄는 성립한 거란 말일세. 범죄는 사회조건과 환경조건, 그리고 도리모노와 같은 광기어린 한때의 마음의 진폭으로 성립하는 걸세.(『망량의 상자』)

누구에게나 그럴 가능성은 존재한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를 기웃거리게 되고, 어느 순간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작은 방아쇠 하나로 오니가 되어버린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인간이 아닌 그 무엇, 인간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진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요괴에게 매혹당한 쿄고쿠 나츠히코처럼, 나 역시 그들에게 이끌린다. 대체 그들의 전락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걸까? 그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혹은 세계의 근원에 있는 심연에서 무엇을 보게 되었는지가 정말 궁금하다.

쿄고쿠는 지독한 요설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요괴의 이야기를 질기게 늘어놓는다. 실용적인 지식은 아니지만, 항간에 떠다니는 쿄고쿠의 잡설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진짜 얼굴을 지독하게 끌어낸다. 아마 그것 자체가 요괴일 것이다. 인간의 벌거벗은, 세계의 추한 모습 그 자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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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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