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시린 이 겨울,
어느 주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 낡은 의자에 앉아
아직 외투에 남아있던 바람 한 줄을 툭툭 털어낸다.
먹음직스러운 오뎅과 따뜻하게 데워진 정종 한 병.
얼었던 코끝이 금세 말랑말랑 제 살결로 돌아온다.
어깨 움츠리고 뻣뻣해진 발로 종종걸음 치게 만든
이 지루하리만치 긴 한파(寒波)가 원망스러운 만큼,
바다같이 시원하고 짭조름한 오뎅 국물 한 모금은 더없이 값지다.
소박한 안주.
적당한 온기.
서로의 잔을 채워주는 잔잔한 손길.
겨울이 길어질수록 대화는 깊어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도 자연스레 뜨거워지기 마련이다.
따라도 따라도 술병 속의 술은 줄어들지 않고,
화수분마냥 가득가득 잔을 적셔온다.
퍼내도 퍼내도 어느새 다시 채워지고 마는
이 낡고 오랜 그리움처럼.
아… 미워할 수 없는 겨울이다. 진한 겨울밤이다…
- 「겨울밤」, 정윤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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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겨울밤이었다… 고 하면 뻥이 섞였고, 몹시 추웠다. 귀는 이미 떨어져나갔고, 귀가 없어도 술이 필요한 밤이었다. 마음을, 가슴을 따끈하게 적셔줄 술. 물론, 홀로가 아닌 함께. 서로의 잔을 채워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는 술집. 아마 눈이 왔다면 더 좋았을 겨울밤이었다. 그야말로, 눈 오는 밤(조하문의 노래).
“우리들 사랑이 담긴 조그만 집에 옹기종기 모여 정다운 이야기, 서로의 즐거움 슬픔을 나누던 밤…”
그런 겨울밤이었다. 지난달 21일, 서울 합정동의 어느 작은 술집, 열대여섯 명이 모였다. 술이 있는 풍경에 자신을 그려 넣고 싶었나 보다.
『음주사유』였다. 음주(飮酒)에 곁들인 사유는 제각각이었을 것이다. 私有, 술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음주사유. 思惟, 음주에 대해 두루 생각하기 위한 음주사유. 事由, 술을 마시는 까닭을 알고 싶은 음주사유. 혹시나, 이런 赦宥는? 즉,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한 해를 만들겠다는 음주사유?
어쨌거나, 이날은 ‘
『음주사유』 작가와의 음주데이트’. 술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지은 두 사람, 김은하와 박기원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술, 인류의 숱한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존재. 그러니, 술은 술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술은 곧 이야기다. 술은 또한 언어다. 술 마시고 흔히 말이 많아지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소통할 수 있는 그 무엇.
“술과 동무가 함께 살았으므로 세속은 곱게 물든다.” (p.351, 김영민, 『동무론』에서 재인용) 이 말은 참에 가깝다. 어느 술자리에 가면, 술에 얽힌 내 어떤 에피소드로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고 추억을 근접 조우한다. 거기엔 우리들이 있다. 우리의 세속이 있다.
지금 커피를 만드는 나는, 커피를 만들기 전 술을 엄청 마셔댔다. 당시 깨달은 바가 있다면, ‘환락의 밤은 짧고, 숙취의 낮은 길다.’ 숙취. 얼마나 많은 시간, 취기가 몸에 머물면서 나를 샅샅이 훑었을까.
“영어로는 hangover 혹은 morning after. 여전히 걸쳐 남아 있다거나 아침 이후라는 뜻. 그네들은, 역시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러나, 압권은 한자의 그것. 숙취宿醉. 취기가 잠을 잔다. 몸에 머문다. 낭만적이다.”(p.328)
나는 아주 간혹 궁금했다. 술은 알고 있는 진실. 그러니까, 내 속에 들어간 술이 눈치 챈 나의 진심 혹은 당신의 진심 덕분에 알아차렸을 진실. 술은 그것을 언제나 비밀로 봉합했을까. 술은 그것을 내 의지와 무관하게 토해내도록 만들기도 했다. 취중진담은 그래서 나온 얘기였을 것이다.
커피, 술, 음식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다. 어떤 커피냐, 술이냐, 음식이냐 보다 중요한 것. 누구와!
“세네카가 말했어. 사람은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고.”(p.227) 그것도 참인 명제다. 그것은 매직이다. 커피가, 술이, 음식이 행하는 마술. 나는 술 때문에 위로를 많이 받았지만, 그것은 함께 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인생은 즐기기 위해 있는 것이고,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보고 싶을 때 봐야 하고, 그때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장소,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 마실 수 없는 술, 일어나지 않는 일이란 게 있다. (p.180, 에쿠니 가오리,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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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술 이야기를 들었다. 술잔을 나눴고, 안주를 먹었다. 한파가 몰아닥친 겨울밤, 적당한 온기가 퍼졌다. 서로의 잔을 채워주는 잔잔한 손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도를 높이니까. 다, 술이 있으니까 가능한 얘기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역시 궁금했다. 술도 외로울 때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외로울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술은 술을 마실까. 혼자만의 궁금증이었다.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참, 이 글은 술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술을 마시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나눈 얘기일 뿐이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신신당부할 것이 있다. 김은하, 박기원의 부모는 자식들의
『음주사유』를 모른다. 비록,
“다 술 잘 마시게 낳아 주신 부모님 때문”에, 술을 잘 마시게 됐지만,
“우리 엄마 아빠한테 이 책 나온 거 말하면 그 땐 진짜 같이 죽는 거다!”(p.383) 반성도 하지만, 역시나 시크릿 가든에 묻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가족으로 나는 참 무심했다. 그래서 이 책은 당분간 비밀이다. 돈 텔 마마 Don't tell mama!”(p.385) 꽐라~
술을 만나다, 마시다, 즐기다
두 사람에게 ‘술’이란 무엇이었을까? 김은하는 먹을 때마다 다르다고 했다. 술이 술로 끝나지 않은 까닭일까. 무척 많단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술과 친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다. 대학입학 직전 오리엔테이션. ‘술은 내 운명’임을 알게 된 결정적 사건이었다. 그저 목이 말라서 들이킨 술이었다. 원 샷으로 들이킨 술 잔. 깨달았다. ‘아, 나는 술을 잘 마시는구나.’ 이후 사진 찍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참 많이도 들이켰고, 들이킨다. 술에 관해서라면, 쭉 한 길을 걷고 있다고 할까.
이날, 술을 두 달 만에 목구멍으로 넘겼다는 박기원은 일단 술을 마셔서 무척 좋단다. 출간 시점 때문에 술 먹다 탈이 난 것 아니냐는 지인들의 시선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역시 꾼이다. 몸은 술을 기억한다. 술꾼의 품격이 어디 가겠나. 깨달음 하나.
“아, 술을 끊었다가 먹으면 재미있구나.”
박기원은 나름 모범생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그게 술과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다면, 그도 그렇다. 나, 술 먹었어도 나름 모범생이었다, 흠흠. 여하튼 박기원, 대학에 와서 술을 입에 대고선, ‘켁, 마실 게 못 되는구나’ 생각했는데, 결국 낚였다. 술에게. 운명이었나?
“외로움을 미끼로 선배들에게 낚여서 술을 마시게 됐다. (주력酒歷이) 올해로 18년 됐는데, 겨울이 술 마시기 참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이번에 (술 마시는 것을) 두 달 쉬긴 처음이다.”
좋아하는 술이라고 왜 없겠나. 그때그때 사람과 상황에 따라 주종이 달라지겠지만, 취향은 취향. 김은하는 소맥(소주 맥주)이다. 목 넘김이 좋다는 이유다. 또 와인을 다량 구매하는데,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서 마시는 것도 좋아한다. 안주는 김, 멸치, 마른 안주 가리지 않지만, 이태원에 위치한 럭키슈퍼에서만 파는 다정원의 ‘깐 노가리’를 무척 좋아한다. 그것 때문에 이태원을 갈 정도다. 박기원은 와인과 복분자를 제외하고 가리는 술이 없다. 소주는 필수재이고, 꼬냑과 마티니도 좋아한다. 흑맥주도 좋아하고.
맥주의 가벼운 맛은 글자 그대로 ‘맛’이었기에 취향 따라 뒤적거리며 골라야만 했다. 위스키와 와인은 그럴싸한 장소와 마셔야 할 명분, 적당한 지식, 그리고 돈이 필요했다.… 소주는 언제나 사연이고 선언 그 자체였다. (p.243) |
술이 있는 자리, 그러니까 술자리 또한 빠질 수 없겠다. 술 좋아하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 이리 답한다. “술보다 술자리를 좋아해요.” 아니, 그 말이 술 좋아한다는 말이지, 무슨. 많이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술이 있어 좋은 자리. 사람이 있어 좋은 자리. 내가 있어 좋은 자리.
김은하의 가장 기억에 남는 술자리는, 아버지 친구들과 함께 했던 술자리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갔는데, 아버지가 술을 안 드셔서 아버지 대신 마시고 3차까지 갔다. 아버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아버지에 대해 몰랐던 얘기를 정말 많이 알게 됐다. 아버지의 첫 사랑, 학창시절 등을 알게 됐고, 감동과 죄송함을 느끼면서 실컷 마셨다.” 술은 사랑을 싣고, 아니겠나. 가끔, 술이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선사하는 좋은 예.
박기원의 경우는?
“술자리가 기억에 안 남는 건, 술을 잊기 위해 마셔서 인가 싶다. (웃음) 술이 수단이 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자세든 솔직한 자세가 돼 있다면, 술김에 뭔가를 하는 건 안 좋은 것 같다. (술기운을 빌려서 하는) 사랑고백도 어쩌면 폭력이 될 수 있다.”
취중진담은 전람회(김동률)의 노래다. 술을 먹고 진심을 전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허나, 어쩌다 술은 마약보다 더 큰 패악을 유발하기도 한다. 대학OT에서 술이라는 평생의 친구를 만난 김은하도 있지만, 선배들의 술 강요에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도 있다. 술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는 한국의 술 문화,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술에 의존을 많이 해서 안타깝긴 하다. 술도 트렌드가 있는데, 술 마시면서 자신의 얘길 해서 좋은 자리가 있고, 남 얘기를 들어서 좋은 자리가 있다. 그런 걸 구분하고 균형을 조절할 수 있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밸런스를 가지는 것이다.” (김은하)
“한국에 술 문화를 대체할 수 있는 문화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대체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대체할 만한 게 있다면 그걸 추천하고 싶다. 또 하나, 술이 고달픈 생을 이겨내는 힘이 된 것은 다른 대신할만한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문화는 소비문화가 많고, 술자리만큼 문학적이고 이야기가 많은 게 없는데,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문제지. (웃음) 술 대신 찾을 만한 게 없는 게 안타깝고, 소비 아닌 다른 것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박기원)
무언가를 잃었다. 그게 다 어제 마신 술 때문이다. 잃어버린 물건도 물건이지만, 기억이 없다. 내가 잃은 것은 휴대폰이나 가방이 아니고, 어쩌면 기억일지도 모른다. 그때의 내 마음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장삼이사들이 술 때문에 골치 아픈 것 중의 하나는,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아닐까. 많은 물건을 잃은 그들에게 가장 아까운 것은 무엇일까.
김은하는 메모한 것을 잃은 게 가장 아깝다. 그래서 노트한 것만은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가방을 통째로 잃으면 대책이 없지만. 박기원은 휴대폰이었다. 헤어진 연인과의 문자가 담긴 휴대폰. 그때를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서글펐다. 술 때문에 잃은 것들, 그것들은 지금 어디서 떠돌고 있을까. 꽐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뒤도 안 돌아보고 앞만 보고 살고 있는데, 내가 흘리고 온 것들이 사실은 거기서 그대로 살고 있다는 거, 거기서 눈물 흘리며 아파하며 있다는 거, 생각해보셨나요?”(p.223) |
술꾼들, 책을 내다
술꾼들에게
『음주사유』는 어떻게 술술 나오게 된 것일까. ‘술 밝은’ 편집자의 예리한 찍기 본능이 번뜩였다. 술에 대한 실용서 아닌 에세이를 생각하던 차, 김은하에게 제안을 했다. 그녀가 술을 좋아하는지는 몰랐다. 술에 맞는 그림을 찾았고, 그녀의 그림체가 어울리지 싶었다.
“술책 한 권 어때요?” 편집자, 그녀의 그림에서 술 냄새를 맡았던 것은 아닐까.
제안을 받은 김은하, 별로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겐 딱, 이었다. 그냥 당연하게 일상처럼 나오겠다 싶었다. 술 마시고 재밌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던 터라 쉽게 해보자고 했다. 나, 쉬운 사람 아닌데, 이번만 쉽게 허락했다. (웃음)” 아무렴, 다 술 덕분이다. 그놈의 술.
박기원은 김은하의 낚시질에 낚였다. 업무 중에 슬쩍 물어봤는데, 귀가 솔깃했다. 역시나 술 때문이었다.
“다른 주제였으면 안 했을 텐데, 술이어서, 그리고 이름 없는 저자라서 썼다. 고마운 계기였다. 마흔 되기 전에 책 쓰는 것이 의미 있겠다 싶었다.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원고 작업은 역시 술과 함께였다. 술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 술이 빠져선 안 되니까. 술이 있어야 그림도 나오고 글도 나오는 법이니까. 전문용어로, 시상은 알코올과 함께 떠오른다. 생업과 함께여서 쉽진 않았지만, 주말에 몰아 쓰기도 하고, 세고 강한 것을 순화시키느라 힘들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튼실한 술책이 나왔다. 주변에선 ‘역시’라며 끄덕끄덕. 술꾼들에게 담긴 술 이야기, 어찌 묻어두고만 있으리오. 13차까지 마신 적도 있고, 비디오를 팔아 그 돈으로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금 있으면 아마 가보로 물려줘도 좋을 수동카메라도, 술로 치환됐다. 김은하에겐 집에 알려선 안 될 이야기 투성이다. 박기원도 부모, 형제에겐 쉿, 비밀이다.
책에 쓰지 못한 에피소드라고 왜 없겠나. 술 이야기다보니 수위조절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싣지 못한 에피소드도 있다. 경우 없이 술값 내지 않는 친구를 용서 못하는 김은하는, 이런 경우 때문에 불미스럽게 경찰서로 가기도 했다. 아침에 전날 술을 함께 마신 선배를 깨우러 갔더니, 빨간 입술로 칫솔을 입에 물고자는 선배를 보고 기겁도 했다. 술에 취해 고추장 튜브를 짜서 양치질을 한답시고 입에 갖다 댄 데다 가스레인지 위에 연탄까지 올려놓기까지 한 것. 빙산의 일각이렷다. 더 듣고 싶다면 김은하에게 술 한 잔 사주면 될 터.
농활을 끝내고 돌아와 뒤풀이를 한 박기원, 주사가 있는 친구가 느닷없이 차를 막았다. 각그랜저였다. 그 안에서 나온 아저씨들이 친구를 때렸다. 욱해서 뛰어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스팔트에 무릎을 꿇고 군밤을 맞고 있었다. 처참하게 깨지는 장면을 여자 동기들에게 보이다니, 굉장히 창피했던 기억. 아, 부끄러워라. 꽐라~
이런 책, 함께 읽고 싶다
술만큼 좋아하는 책을 물었다. 술을 앞설 순 없겠지만, 술보다 우선순위가 될 순 없겠으나, 그래도. 회사에선 기획 일을 맡고 있어서 직장에선 그녀가 그림 그리는 것을 잘 몰랐다는 김은하, 사진책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 책 권한다. 꼭 소장하거나 선물하라는 당부와 함께.
『윤미네 집』(전몽각 지음|PHOTONET 펴냄).
아, 나도 갖고 있는 이 사진 책. 아마추어 사진작가 故 전몽각이 딸 윤미가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담은. 마침 지금,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 미술관에서 <전몽각 그리고 윤미네집 전> 전시가 열리고 있다. 71년과 78년 두 차례 전시에 이은 32년 만에 열리는 세 번째 전시로, 서울의 옛 모습을 찍은 전몽각의 사진도 함께다. 2월19일까지니까, 기회가 닿으면 꼭 보시라.
김은하의 한 권 더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필립 퍼키스 지음/박태희 옮김|눈빛 펴냄). 필립 퍼키스, 누구냐고? 우선, 사진작가다. 공군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하며 사진 찍기를 시작했다.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의 사진과 교수로 40년간 재직했고, 사진학과의 학장을 역임했다. 50년 동안의 사진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집필한 책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다. 그녀는
“사진을 통해 삶을 이야기 한다”고 책을 추천한 이유를 말한다.
나는 『필립 퍼키스와의 대화』를 갖고 있는데, 이 책에서 퍼키스는 이런 말을 했다.
“사진은 삶의 방식을 배우는 매체입니다. 사진은 그야말로 삶의 방식 그 자체입니다. 대상에 반응하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우린 항상 무언가에 반응합니다. 그러므로 사진이란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한 명 더 있다. 철학자 강신주.
“책을 쉽게 쓴다. 그의 책을 보면, 우리가 평소 무심히 접한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한다.”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데, 올해는 꼭 읽어보리라 생각도 해 본다.
박기원은 가방을 뒤적거려 책 한 권을 꺼낸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아, 이 책. 나는 영화
<러브 레터> 덕분에 이 책을 처음 알았다. 마지막 장면. 후지이 이츠키(나카야마 미호)는 도서부 후배들이 들고 온 이 책의 대여카드 뒷면에 그려진 초상화를 보고 감회에 젖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목이 의미하는 함의 때문에라도 더욱 짠했던 이 장면.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은 아직 잊히지 않는다.
박기원의 추천사.
“읽는데 어려움은 있으나 홍상수 감독 등 많은 감독들이 프루스트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이번 책을 쓰면서 나도 많이 기댔다. 프루스트 본인도 외롭고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술자리 떠나선 우리도 그렇지 않나. (웃음) 문장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경지를 봤다. 문장을 곱씹을 수 있고, 굉장히 도움이 됐다.” 물론,
『음주사유』에 이 책, 당연히 등장한다.
7편 11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지은이의 자전적 이야기가 뼈대를 이룬다. 화자 마르셀의 어린 시절 눈과 귀와 코와 입과 몸에 닿았던 모든 것들. (p.330) |
또한 술이라면 이 만화책도 빠질 순 없다.
“『음주가무연구소』는 탁월한 감성이 돋보이는 재기발랄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몸이 살아온 어느 지점에 한해서 공동경비구역을 갖는다! 처음에는 경계하면서도, 어느 순간 어르고 은근슬쩍 부딪혔던 순간들!”(p.321)
자신들의 책은 어떻게 읽혔으면 좋을까. 물론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이상,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지만, 저자들의 소박한 바람이랄까. 김은하는, 자신을 살피면서 해찰을 많이 할 수 있는 책이었으면, 박기원은 화장실에서 잘 읽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특히 박기원은 조금 아쉬운 바가 있는 것 같았다. 나름 정치적으로 쓰고 싶었으나 한계가 있었다는 뉘앙스. 허나, 그가 의도 한 바 중의 하나는,
“이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힘을, 혼자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런 사람도 있다고 느껴줬으면 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책을 써서 스스로 힘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술에 관한 얘기가 아니에요. 술을 마시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중 한 명의 얘기일 뿐이에요.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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