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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그 무자비한 세계에 대하여 -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여전히 ‘하드보일드’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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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 때 본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는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나는 <대부>에서, 비로소 어른들의 세상을 엿봤다. 그 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아이들의 좁은 세계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계 가수 겸 배우의 출연을 거부한 영화 프로듀서의 침대에 애마의 잘린 머리가 던져졌을 때, 아무 것도 몰랐던 알 파치노의 순진무구한 이탈리아 연인이 차에서 폭사했을 때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부가 된 알파치노가 아내에게 정색하며 ‘거짓말’을 할 때, 내가 알던 세상은 변해버렸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시작은 아동문학전집에 끼어 있던 홈즈와 뤼팽이었다. 다음 정석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아가사 크리스티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 『X의 비극』의 엘러리 퀸. 그러다가 동서추리문고를 만났다. 미스터리, 스릴러, SF, 환상문학 등 모든 장르가 망라된 동서추리문고를 읽으면서 대중문학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린 살인사건』 『통』 『빨강머리 레드메인즈』 『노란 방의 비밀』 『환상의 여인』 같은 고전적인 작품부터 『웃는 경관』 『지푸라기 여자』 『심판은 내가 한다』 『죽음의 키스』 『악마 같은 여자』 『인간사냥』 『위철리 여자』 『피의 수확』 『기나긴 이별』 등 하드보일드 풍의 작품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샘 스페이드, 루 아처, 마이크 해머, 필립 말로에게 끌리긴 했지만, 정작 그 작품들을 읽을 때는 하드보일드가 정확하게 뭔지도 몰랐다. 영화 <대부>를 보기 전까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본 프랜시스 코폴라의 <대부>는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나는 <대부>에서, 비로소 어른들의 세상을 엿봤다. 그 때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아이들의 좁은 세계일뿐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계 가수 겸 배우의 출연을 거부한 영화 프로듀서의 침대에 애마의 잘린 머리가 던져졌을 때, 아무 것도 몰랐던 알 파치노의 순진무구한 이탈리아 연인이 차에서 폭사했을 때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대부가 된 알파치노가 아내에게 정색하며 ‘거짓말’을 할 때, 내가 알던 세상은 변해버렸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 어떻게 그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하게 했다. 나는 영화를, 책을, 만화를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하드보일드에 빠져들었다. 세상이 얼마나 거대하고 폭력적인 것인지, 얼마나 추악한 것인지, 내가 그 안에서 왜,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지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그 하드보일드 ‘픽션’들을 통해서 보게 되었다.

하드보일드를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나온다.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전의(轉義)하여 ‘비정 ?냉혹’이란 뜻의 문학용어가 되었다. 개괄적으로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이 수법은 특히 추리소설에서 추리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는 하나의 유형으로서 ‘하드보일드파’를 낳게 하였고, 코넌 도일파의 ‘계획된 것’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원래 이 장르는 1920년대 금주령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며, 헤밍웨이와 도스 파소스 등 미국의 순수문학 작가들의 문학적 교훈을 적용시키려고 한다.

정확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상은 좀 애매하다. 영화사전을 찾아보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영미 문학에서는 수식을 일절 배제하고 묘사로 일관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식의 ‘비정한 문체’를 칭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는 장르(genre)라기보다는 스타일(style)을 말하는 것으로 자연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주제를 냉철하고 무감한 태도로 묘사하는 특징을 가진다.

문학이나 영화 등 예술 텍스트에서 비정하고 건조한 세계의 일면을 미니멀한 스타일로 담아내는 제반 수법들을 지칭한다. 여기서 ‘비정함’의 속뜻은 캐릭터나 사건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작가(감독)의 표현이 건조하고 냉정하다는 의미이다. 곧 세계를 대하는 태도 혹은 스타일을 뜻하는데 이는 작가(감독)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부조리한 세계의 단면을 응시하는 예술가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견해를 덧붙이지 않은’ 건조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대실 해멧과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작가의 추리 소설을 통해 그 기법이 세련돼졌고 이것이 영화로 넘어왔다.


하드보일드가 등장한 것은, 세계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망연자실했다. (유럽뿐이긴 하지만) 전 세계가 휘말려들어 엄청난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한 미증유의 전쟁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과 회의를 부추겼다.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격발하면서 대공황까지 발생하게 되자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점점 희박해졌다.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행복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가. 아니 인간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뭔가를 개선해갈 수는 있는 것일까. 인간에 대한 불신, 미래에 대한 절망. 결국은 그런 화의와 절망이 하드보일드를 낳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에서 탐정은 배우자의 불륜이나 연인의 실종 같은 별 거 아닌 일상의 사건을 풀어가다가 결국은 거대한 사회의 악과 대면한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설사 누군가를 구해낸다 해도, 세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도, 세상의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하드보일드의 영화적 변형이라 할 필름 누아르의 걸작 <차이나타운>에서 사립탐정 제이크는 이 세상 전체가 ‘차이나타운’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의 어떤 법과 질서도 통하지 않는, 무질서와 타락의 온상을 상징하는 차이나타운. 제이크는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략만을 믿는 인간이지만, 그건 무자비한 세상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안간힘일 뿐이다.

하드보일드, 라고 하면, 나는 『회전목마 위의 데드 히트』란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에세이의 제목을 떠올리게 된다.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 위에서 미친 듯이 서로 총격전을 하며 다투는 광경. 어디로도 갈 수 없고, 빠져나갈 수도 없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죽을 듯이 싸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상대방을 죽인다 한들, 그 곳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무력감, 절망감 그리고 쓸쓸함. 하드보일드는 이 세상이 비정한 곳이라고 말한다. 나 하나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독하게 견고한 세상.

하지만 하드보일드는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는 자의 서사다. 아무 것도 줄 수 없다 해도,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은 존재한다. 이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세계관이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일. 나는 하드보일드가 일종의 스타일이며, 일종의 애티튜드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캐릭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세상의 폭력에 맞서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

세상은 잔인하지만, 무한한 경이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것을 외면할 필요도 없다. 즐겁게 살고, 다만 이 비정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차갑고 딱딱하다고 해서 인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즐겁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드보일드는 냉정하게, 이 세상의 법칙을 알려준다. 결코 외면하지 말고, 환상에 빠지지 말고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것이 내가 여전히 ‘하드보일드’에 매료되어 있는 이유이고,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다. 앞으로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와 스릴러 그리고 하드보일드의 스타일과 애티튜드를 견지하고 있는 소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무자비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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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영화평론가. 현 <에이코믹스> 편집장. <씨네21> <한겨레> 기자, 컬처 매거진 <브뤼트>의 편집장을 지냈고 영화, 장르소설, 만화, 대중문화, 일본문화 등에 대한 글을 다양하게 쓴다.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전방위 글쓰기』 『영화리뷰쓰기』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등을 썼고, 공저로는 <좀비사전』 『시네마 수학』 등이 있다. 『자퇴 매뉴얼』 『한국스릴러문학단편선』 등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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