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물론 ‘레게(Reggae)’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죠. 하지만 1990년대에만 해도 가요계에서는 약박에 악센트가 오는 이 흑인음악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장르를 가요에 절묘하게 결합시킨 프로듀서 김창환과 ‘레게’의 그루브를 완벽히 소화한 김건모의 「핑계」는 차라리 ‘현상’에 가까웠죠. 당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이 앨범에는 댄스곡뿐만 아니라 「혼자만의 사랑」, 「나 그대에게 준 것은」과 같은 아름다운 발라드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핑계」가 수록된 김건모의 2집입니다.
김건모 <핑계> (1993)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해봐. 니가 지금 나라면 넌 그럴 수 있니?… 안개꽃 한 다발 속에 숨겨진 편지엔, 안녕이란 두 글자만 깊게 새겨 있어…’
1993년 여름 전국은 경쾌하면서도 약간은 엉거주춤한 리듬의 노래 「핑계」의 열기로 뒤덮였다. SBS ‘서울 스타서울’ 8주 1위 등 각종 가요 프로의 1순위를 장기간 점령했으며, 1994년 KBS 가수상 최고히트곡상 수상, MBC 한국가요제전 최고 인기가요상 수상, 제5회 서울가요대상 최고 가수상 대상 수상 등 큰 상은 모조리 이 곡과 김건모의 차지였다.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김창환이 빚어낸 「핑계」는 일약 가수 김건모를 선행주자인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에 맞먹는 슈퍼스타로 밀어 올리며, 가요계를 이들 ‘빅3 쟁패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 앨범은 한해 전 그의 데뷔작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의 성공을 뛰어넘어 가뿐히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다음 3집 앨범 「잘못된 만남」이 280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국내 기네스북에 오르는 신기원의 발판을 마련했다. 서태지와 아이들도 이 부문에서는 그를 밑에다 두지 못했다. 가공할 성공퍼레이드는 90년대를 관통, 김창환과 결별하고도 인기는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가장 안 팔렸다는 6집마저 60만장이란 거한 판매고를 올렸다.
하지만 「핑계」가 앨범의 상업적 성공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이 노래를 통해 생소했던 자메이카 산(産) 댄스음악인 레게의 정체, 이를테면 약박(弱拍)에 악센트가 가해져 머뭇머뭇한 동작을 유발하는 흑인음악이라는 것을 알았다. 갑자기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자메이카 레게의 영웅 밥 말리(Bob Marley)가 연구의 대상으로 솟아났다.
레게의 매력이 발굴(?)되자 가요계에는 투투, 룰라, 마로니에, 김종환 등 레게 곡을 부른 가수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심지어 ‘닥터 레게’란 그룹도 출현했다. 도시의 거리에는 레게의 색깔로 치장한 패션이 우글거렸으며 다운타운 록카페와 재즈카페가 ‘레게카페’로 둔갑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 때문에 ‘가요계는 하나의 트렌드가 생기면 무조건 몰려가는 게 하나의 뼈아픈 생리’라는 비판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 앨범이 「핑계」만의 독주, 레게의 화제성만은 아니었다.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1등 공신이 「핑계」라는 사실은 명백했지만, 밀리언셀러와 완연한 한 장의 앨범이 되기에 단지 좋은 곡 하나로는 역부족이다. 「핑계」를 뒤이은 발라드 후속곡 「혼자만의 사랑」이 그런 위험으로부터 음반을 구출했다.
심지어 SBS 가요프로그램인 ‘TV 가요 20’에서는 「혼자만의 사랑」과 「핑계」가 같은 주 1위를 동시에 다퉜던 사례도 있다. 카운트다운 가요 프로 사상 전례가 없었던 희귀 상황. 두 곡이면 앨범의 구입 이유와 존재가치가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이었지만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경쾌한 하우스 댄스곡인 「어떤 기다림」도 준(準)히트를 쳤다.
까만 피부에 흑인 필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노래한 김건모의 재능은 성공의 견인차였고 이후 그는 ‘최고 가창력의 소유자’로 평가 받기에 이른다. 「혼자만의 사랑」은 그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가를 팬들로부터 확약 받았다. 앨범은 성격이 다른 두 메가 히트곡이 말해주듯 「나 그대에게 준 것은」 「우리 스무 살 때」와 같은 발라드와 「어떤 기다림」 「버려진 시간」 등의 댄스곡들이 균등하게 포진되었으며 전곡의 고른 완성도로 인해 평단의 시선도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또 이런 점도 있다. 김건모가 활동하던 1990년대 당시의 가요계는 기성세대의 문화 지반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10대 문화의 용암이 분출되는 ‘과도기’였다. 10대 문화의 혁명적 리더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틴에이저들의 아이콘, 시대의 표상으로써 중심을 차지했다.
그런가하면 가요 프로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와 트로트 가수 김수희의 「애모」가 1위 자리를 놓고 대결을 벌이는 등 성인음악도 깃발을 완전히 내린 것은 아니었다. 90년대의 가요계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10대들의 공격적 가요’와 그것을 우려하는 ‘기성세대의 수세적 가요’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김건모는 두 극단적 세대의 사이에 선 존재였다. 미남형의 특출 난 외모보다는 친근한 이미지를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워. 틴에이저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옆집 오빠의 이미지, 기성세대들에게는 이웃 총각의 이미지로 다가갔다.
TV 프로에서 솜씨를 발휘한 코믹 멘트 또한 이전의 가수와는 뚜렷한 차별 지점이었다. 미디어들은 그를 ‘토탈 엔터테이너’라고 그럴싸하게 우대했고 사람들도 “이제는 가수도 말을 잘해야 한다”는 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 또한 다세대의 공감을 얻어냈다. 단번에 캐치되는 멜로디와 세련된 편곡은 마냥 즐거운 동시에 최신적 요소를 놓치지 않았다. 기성세대들의 눈에는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라고 외치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달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만한 것이었다. 간격이 벌어진 두 세대의 지지를 동시에 획득했다고나 할까. 이러한 사실은 2001년 「미안해요」 「짱가」가 실린 7집을 유난히도 기성세대가 많이 구매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대중을 철저히 고려하면서도 끊임없는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김건모이기에, 가요 춘추전국 시대인 지금까지도 끄떡없는 한국 가요계의 거목으로 존재한다. 그 본격적 성공 비행의 시작은 1집의 우수한 성적표를 확대 상승한 바로 이 앨범 2집의 대히트부터였다.
글 / 김소연(mybranc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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