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만 영업하는 기묘한 식당
일전에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었다. 갑자기 ‘라면’이 사라진다면 (나를 포함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라면 없는 세상」이란 (나만 좋아하는 미발표) 단편을 쓴 적이 있다. 그 소설 속에선 나를 포함해 작가의 1/3이 굶어 죽는다. (여기에는 소설가뿐 아니라, 시나리오, 드라마, 희곡 등 모든 장르의 작가들을 다 포함한다) 라면이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201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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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밥
언젠가 영화 <낮술>을 만든 노영석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한 신문사의 인턴사원을 뽑기 위한 인터뷰 대상자가 되는 다소 민망한 체험을 했는데, 둘 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인터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어쩌다보니 일찍 도착한 나는 할 말도 없고, 커피도 없고 해서, 옆에 앉아 있던 노영석 감독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소설가에게 ‘무슨 소설 좋아하세요?’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지루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초반 10분의 따뜻한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면서 애니메이션 을 이야기했다. 어린 남녀 주인공이 자라 사랑하고 결혼하고 함께 늙어가며 한쪽과 이별하는 장면 말이다.
“어쩜 그렇게 잘 만들었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슴에 깊이 남아 있던 영화의 첫 장면을 말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였다.
“그 영화는 뭐랄까, 꼭 밥 같아요. 금방 지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같다고 해야 하나.”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문득 같은 감독의 전작인 <아무도 모른다>가 떠올랐다. 그리고 왜 많은 작가들이 이 영화의 제목을 자신의 소설에 종종 인용하는지를 궁리했다. <아무도 모른다>에선 아이의 존재를 거세시킨 철없는 엄마가 등장하고, 고요한 관엽식물 같은 아이들이 나온다. 감독은 눈물 한 방울 뿌려대지 않고 햇볕과 물대신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고 자란 이 사랑스런 식물들을 담담히 관찰할 뿐이다. 너무 잔인해서, 사실 잔인하단 생각조차 들지도 않는 놀라운 경지의 영화였다.
<걸어도 걸어도>의 첫 장면을 나는 참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장면을 열 번도 넘게 봤을 정도다. 이미 할머니가 된 엄마와 이미 아줌마가 된 딸이 부엌에 나란히 서서 당근과 무를 다듬고 있다. 사각사각 무 깎는 소리와 함께 딸과 엄마의 일상적인 대화가 흐른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할머니가 딱딱한 옥수수 알갱이를 모아 동그랗게 튀김을 만드는 모습이다. 뜨거운 기름 끓는 소리는 마치 한낮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같아서, 튀김이 만들어지는 소릴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귀 끝에 눈물방울 같은 물기가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이 영화 특유의 ‘리듬’(나는 그것을 ‘냄비에서 밥이 되어가는 리듬’이라고 생각했다)과 한없이 풍겨대는 ‘밥 냄새’가 좋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먹는 것’에 민감했다.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하녀에게 ‘생강’을 사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쌉쌀한 생강쿠키와 중국차의 맛이 떠올랐고, <카모메 식당>의 향긋한 계피 롤을 만드는 장면은 새벽녘 빵집에서 흘러나오던 포근한 냄새로 나를 늘 행복하게 했다. 제대로 튀긴 돈까스를 칼로 자를 때 나는 소리를 나는 ‘라디오 헤드’ 톰 요크의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다이라 아즈코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의 제목은 「버터 밥」인데, 이쯤 되면 완전히 중증인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도심을 비추는 불빛에 활자를 말아 후루룩 국수를 넘기듯 씹어 먹었다. 아베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이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어둑한 신주쿠 골목 안에 숨어있는 이 낡은 식당은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만 영업을 한다. 메뉴는 돈지루 정식(돼지고기와 야채를 넣어 끓인 된장국) 하나. 하지만 손님이 원하는 건 가능하면 다 만들어준다는 독특한 컨셉의 식당이다. 과묵하고 무뚝뚝해 보이는 식당 주인은 눈 밑으로 기다란 칼자국이 있는데, 그저 사연 많은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을 뿐 그의 과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밤의 식당이니 밤의 손님들이 자주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야쿠자 두목, 복서, 게이바 주인, 구운 명란젓을 좋아하는 스트리퍼와 오차즈케에 열광하는 세 명의 친구들, 배우, 가수, 음식평론가, 회사원까지 등장인물이 범상치 않다. 재밌는 건 음식을 만들면서 담배를 피우는 주인답게 심야식당은 전 구역 ‘흡연구역’이라는 거다.
실제로 이런 식당이 존재한다면 가보고 싶을까?
나라면, 분명히, 가고 싶어질 것 같다.
(손님1) 달걀 프라이!
(마스터) 포커로 치면 원페어네요.
(손님1) 나는 달걀 프라이의 노른자 위 속을 제일 좋아해요.
(손님2) 나도!
(손님1) 다음은 흰자위 가장 자리의 파삭파삭한 부분.
손님들끼리 이런 시시한 수다나 떨면서 주인이 만드는 달걀프라이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식당이라니…… 꽤 멋지지 않은가. 일본 사람들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은 정말이지 말릴 수 없다. 어쨌든 『심야식당』의 성공은 일상을 탈피한 밤의 시간대에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가정식 백반을 판다는 것에 있다.
만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제 막 이름을 알린 신인 여배우가 가난한 대학생과의 사랑에서 실패한다거나, 「길 잃은 고양이」란 노래로 막 성공하려는 엔카 가수가 인기가 있을 법하니 병에 걸려 죽게 된다거나 하는 다분히 신파적인 내용들이다. 신파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니, ‘푸아그라’나 ‘최고급 오도로’가 나올 리 없고, 그저 집에서 먹는 삶은 달걀을 으깨 마요네즈로 버무려 넣은 엄마표 샌드위치, 문어 모양으로 볶은 비엔나소시지, 뜨거운 밥에 버터를 30초간 녹여 간장과 함께 비벼먹는 ‘버터밥’ 등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버터밥’과 가다랑어포를 갓 지은 뜨거운 밥에 수복이 올려 간장을 뿌려 먹는 일명 ‘고양이 밥’이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만큼은 가능하면 만화가 아닌 드라마 <심야식당>으로 볼 것을 권유한다. (드라마 <심야식당> 역시 밤 12시 45분쯤 ‘심야’에 방영했었다)
나 역시 가끔 이런 식으로 밥을 만들어 먹는다. 뜨거운 밥 위에 버터를 넣거나, 간장에 참기름을 넣거나, 마트에서 산 가다랑어포를 올린다. 밥 위에 올린 가다랑어포가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군고구마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원고를 마감하면서 먹기엔 그것만큼 편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햇반과 포장 김, 양조간장, 참치캔, 할머니가 보내주신 깨, 시골 참기름 없는 삶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두고 ‘햇반녀’라고 놀리기 일쑤다.
일전에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었다. 갑자기 ‘라면’이 사라진다면 (나를 포함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라면 없는 세상」이란 (나만 좋아하는 미발표) 단편을 쓴 적이 있다. 그 소설 속에선 나를 포함해 작가의 1/3이 굶어 죽는다. (여기에는 소설가뿐 아니라, 시나리오, 드라마, 희곡 등 모든 장르의 작가들을 다 포함한다) 라면이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내게 영화 <봄날은 간다>가 ‘라면의, 라면에 의한, 라면을 위한’ 사랑 이야기인 것도,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슴아슴한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라면을 끓여 먹은 것 역시 주인공들이 나눈 사랑보다 그들이 먹은 라면이 더 맛있어 보여서였다. 낭만이라곤 라면에 든 파만큼도 없구나, 라고 말한다 해도 뭐, 사실이니까.
고양이밥, 그리고 고양이
다시 고양이밥을 얘기하자면 나는 고양이밥은 좋아해도,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정말? 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내 소설 속에 유달리 고양이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개를 더 좋아하는 소설가가 자꾸 고양이 얘길 쓴다는 게 나로서도 너무 신기하다. (『다이어트의 여왕』에는 팬케이크 집 고양이 ‘안나’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니 나의 등단작 제목도 「고양이 샨티」다.
물론 고양이 ‘노튼 시리즈(『노튼 삼부작』)’를 무척 좋아해서, 이름도 생소한 ‘스코티시폴드’를 키우고 싶어 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역시 나는 고양이를 키울 만큼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고양이에 자꾸만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우리 모두 듀이를 사랑했다. 어떻게 듀이의 매력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아름답고, 사람을 잘 따르고, 사교적이고, 그리고 아직도 동상 걸린 조그만 네 발로 절룩거리고 다니는 그 녀석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정말로 신기한 사실은, 듀이가 우리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이 고양이는 낯선 사람 곁에서도 너무나 편안해했다. 이 녀석의 태도는 마치 ‘아니,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혹은 ‘어떻게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나요?’라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곧 깨달았다. 듀이는 자신을 단지 평범한 고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녀석은 항상 자신을 독특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녀석이 옳았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듀이』를 읽은 건 듀이가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도서관’ 고양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는 동안 이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다. 게다가 이 고양이에게서는 일곱 살 이전의 나와 비슷한 점이 발견되었다. ‘어떻게 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라는 얼굴로 어른들을 빤히 쳐다보는 터무니없이 맹랑한 태도 말이다. 그러나 도서관 반납함에 버려져 동상에 걸린 채 발견되었던 고양이 ‘듀이’ 역시 노튼처럼 고양이라기보다 개에 가까운 고양이다. 이로서 내 취향은 정말 분명해졌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제까지 나는 ‘개 닮은 고양이’를 좋아했던 거다.
고양이 원고를 쓰다가 내친김에 집에 있는 고양이 관련 책들을 살펴봤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김진경의 『고양이 학교』, 노석미의 『스프링 고양이』 등등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엔 완전히 잊고 있던 낡은 책도 있었다. 고양이 프란시스가 고양이 종족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펠리데』 시리즈였다.(‘해문출판사’는 나머지 시리즈들을 어서 번역해줬으면 좋겠다.)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자, 책 표지에 등장한 명탐정 ‘프란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명민한 고양이의 박력이란 이런 것인가란 생각이 절로 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책상의 책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 이란 부제가 붙은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라는 여행기를 발견했다. 길고양이에 대한 책을 낸 고경원의 에세이였다. 책 뒷장을 넘겨보니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는 스노우캣의 추천사도 멋지게 붙어 있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사인을 할 때면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 말로 진실!”이라는 문구를 함께 써주곤 했다고 한다. 카페 란포의 실내 조명이 은근히 어두운 건, 에도가와 란포가 남긴 글귀처럼 ‘밤의 꿈’을 담은 공간을 구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손으로 툭 치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문고판 소설 더미, 기이한 표정의 이국적인 가면들, 100년도 넘은 골동품 시계, 느닷없는 해골 모양 장식품이 한데 모여 카오스를 이룬 카페에 따스함을 불어넣는 건 역시 고양이다.
‘카페 란포’를 설명하는 이 문장은 이곳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너덜너덜해진 오래된 문고판들은 봉천동 녹두거리 앞 ‘책창고’나 금호동 꼭대기에 있는 ‘고구마’ 같은 헌책방을 연상시켰는데, 책에 나오는 이런 카페라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무조건 ‘료스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는 ‘카페 란포’의 주인도 근사했다. 카페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 료스케, 엄지 손톱만한 안경을 코밑까지 내려쓰고 있는 료스케의 얼굴은 신묘한 느낌마저 주는데, 정말로 『펠리데』 시리즈의 고양이들처럼 고양이들의 세계엔 ‘쥐를 쫓는 탐정’이나 ‘사람을 관찰하는 고양이’가 있을지도 모른단 상상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개 탐정’ 같은 게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믿거나 말거나 개보다 고양이 쪽이 영민하단 생각이 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와 고등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사소한 기억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개와 고양이를 사람보다 예뻐했다. 개나 고양이가 새끼를 품으면, 당신도 아까워 잘 먹지 않는 우족을 고아 우유처럼 뿌옇게 만드셨다. 젖이 잘 돌지 않는 누렁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뿐인가. 삶은 달걀을 우유에 으깨어 일일이 목에 넣어주던 그 손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두런두런 얘기하던 말 역시 절대로(!)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이쁜 누렁이. 새끼 많이 낳아라. 그래야 좋은 값에 팔아서 너 먹을 것도 많이 사주지.”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사람이 굶어죽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팔십 노인의 현실감각이란 그런 것이어서, 어린 시절의 나로선 할머니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예뻐하던 강아지를 개장수에게 팔아치우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양이가 관절에 좋다는 이유로 삶아서 할아버지에게 나눠드리겠다고 눙치던 친할머니까지 떠올리면 등골이 고양이마냥 오그라든다.
하지만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리면 공연히 울고 싶어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페이지가 어딘가 깊숙이 접혀 있고, 그 접혀진 시절을 내가 아무리 펼치려 해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낭패감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금 도시를 떠도는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유기견을 입양해 새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으로 맞이한 선한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집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 닮은 고양이거나, 고양이 닮은 개거나, 칼국수나, 수제비나,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분명히…….
누군가에게 9월은 슬럼프의 계절이고, 누군가에게 9월은 가을의 초입일 수도 있겠지. 갑자기 허기가 밀려온다. 고등어 한 마리 구워 고양이밥과 함께 먹고 싶다. 알뜰히 파먹은 고등어를 살짝 뒤집고, 고양이 탐정이 나오는 『펠리데』를 깨작깨작 읽으며 마무리하는 하루도 괜찮을 것 같다. 생각난 김에 미디어 레어로 구운 명란젓을 곁들인 맥주도 괜찮겠다. 오늘 하루 내 마음을 물어뜯던 누군가의 말을 지우며, “나를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 나는 눈을 감는 법도 몰라요.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 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루시드 폴의 「고등어」를 들으면서 말이다. 비도 오고, 창문도 깨지고, 지각하고, 엉덩방아도 쪘는데 그래, 고등어나 굽자~
추신) 막 트위터를 개설했습니다. 주소는 baekyoungok입니다. 궁금한 분들이 많아요. 소식 전해주시길.
언젠가 영화 <낮술>을 만든 노영석 감독을 만난 적이 있다. 우리는 한 신문사의 인턴사원을 뽑기 위한 인터뷰 대상자가 되는 다소 민망한 체험을 했는데, 둘 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인터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어쩌다보니 일찍 도착한 나는 할 말도 없고, 커피도 없고 해서, 옆에 앉아 있던 노영석 감독에게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소설가에게 ‘무슨 소설 좋아하세요?’ 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지루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초반 10분의 따뜻한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면서 애니메이션
“어쩜 그렇게 잘 만들었는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슴에 깊이 남아 있던 영화의 첫 장면을 말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였다.
말을 하다 말고,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문득 같은 감독의 전작인 <아무도 모른다>가 떠올랐다. 그리고 왜 많은 작가들이 이 영화의 제목을 자신의 소설에 종종 인용하는지를 궁리했다. <아무도 모른다>에선 아이의 존재를 거세시킨 철없는 엄마가 등장하고, 고요한 관엽식물 같은 아이들이 나온다. 감독은 눈물 한 방울 뿌려대지 않고 햇볕과 물대신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먹고 자란 이 사랑스런 식물들을 담담히 관찰할 뿐이다. 너무 잔인해서, 사실 잔인하단 생각조차 들지도 않는 놀라운 경지의 영화였다.
<걸어도 걸어도>의 첫 장면을 나는 참 좋아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장면을 열 번도 넘게 봤을 정도다. 이미 할머니가 된 엄마와 이미 아줌마가 된 딸이 부엌에 나란히 서서 당근과 무를 다듬고 있다. 사각사각 무 깎는 소리와 함께 딸과 엄마의 일상적인 대화가 흐른다. 내가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할머니가 딱딱한 옥수수 알갱이를 모아 동그랗게 튀김을 만드는 모습이다. 뜨거운 기름 끓는 소리는 마치 한낮에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같아서, 튀김이 만들어지는 소릴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귀 끝에 눈물방울 같은 물기가 스며드는 기분이 든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이 영화 특유의 ‘리듬’(나는 그것을 ‘냄비에서 밥이 되어가는 리듬’이라고 생각했다)과 한없이 풍겨대는 ‘밥 냄새’가 좋다.
생각해보면 나는 늘 ‘먹는 것’에 민감했다.
<디 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하녀에게 ‘생강’을 사오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쌉쌀한 생강쿠키와 중국차의 맛이 떠올랐고, <카모메 식당>의 향긋한 계피 롤을 만드는 장면은 새벽녘 빵집에서 흘러나오던 포근한 냄새로 나를 늘 행복하게 했다. 제대로 튀긴 돈까스를 칼로 자를 때 나는 소리를 나는 ‘라디오 헤드’ 톰 요크의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다이라 아즈코의 소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의 제목은 「버터 밥」인데, 이쯤 되면 완전히 중증인 것이다.
밤의 식당이니 밤의 손님들이 자주 등장하는 건 당연지사. 야쿠자 두목, 복서, 게이바 주인, 구운 명란젓을 좋아하는 스트리퍼와 오차즈케에 열광하는 세 명의 친구들, 배우, 가수, 음식평론가, 회사원까지 등장인물이 범상치 않다. 재밌는 건 음식을 만들면서 담배를 피우는 주인답게 심야식당은 전 구역 ‘흡연구역’이라는 거다.
실제로 이런 식당이 존재한다면 가보고 싶을까?
나라면, 분명히, 가고 싶어질 것 같다.
(손님1) 달걀 프라이!
(마스터) 포커로 치면 원페어네요.
(손님1) 나는 달걀 프라이의 노른자 위 속을 제일 좋아해요.
(손님2) 나도!
(손님1) 다음은 흰자위 가장 자리의 파삭파삭한 부분.
- 『심야식당』
손님들끼리 이런 시시한 수다나 떨면서 주인이 만드는 달걀프라이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식당이라니…… 꽤 멋지지 않은가. 일본 사람들의 디테일에 대한 집착은 정말이지 말릴 수 없다. 어쨌든 『심야식당』의 성공은 일상을 탈피한 밤의 시간대에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하는 가정식 백반을 판다는 것에 있다.
만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제 막 이름을 알린 신인 여배우가 가난한 대학생과의 사랑에서 실패한다거나, 「길 잃은 고양이」란 노래로 막 성공하려는 엔카 가수가 인기가 있을 법하니 병에 걸려 죽게 된다거나 하는 다분히 신파적인 내용들이다. 신파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니, ‘푸아그라’나 ‘최고급 오도로’가 나올 리 없고, 그저 집에서 먹는 삶은 달걀을 으깨 마요네즈로 버무려 넣은 엄마표 샌드위치, 문어 모양으로 볶은 비엔나소시지, 뜨거운 밥에 버터를 30초간 녹여 간장과 함께 비벼먹는 ‘버터밥’ 등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버터밥’과 가다랑어포를 갓 지은 뜨거운 밥에 수복이 올려 간장을 뿌려 먹는 일명 ‘고양이 밥’이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만큼은 가능하면 만화가 아닌 드라마 <심야식당>으로 볼 것을 권유한다. (드라마 <심야식당> 역시 밤 12시 45분쯤 ‘심야’에 방영했었다)
나 역시 가끔 이런 식으로 밥을 만들어 먹는다. 뜨거운 밥 위에 버터를 넣거나, 간장에 참기름을 넣거나, 마트에서 산 가다랑어포를 올린다. 밥 위에 올린 가다랑어포가 너울너울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군고구마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훈훈해지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원고를 마감하면서 먹기엔 그것만큼 편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햇반과 포장 김, 양조간장, 참치캔, 할머니가 보내주신 깨, 시골 참기름 없는 삶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두고 ‘햇반녀’라고 놀리기 일쑤다.
일전에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었다. 갑자기 ‘라면’이 사라진다면 (나를 포함해)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렇게 「라면 없는 세상」이란 (나만 좋아하는 미발표) 단편을 쓴 적이 있다. 그 소설 속에선 나를 포함해 작가의 1/3이 굶어 죽는다. (여기에는 소설가뿐 아니라, 시나리오, 드라마, 희곡 등 모든 장르의 작가들을 다 포함한다) 라면이란 그토록 위대한 것이다! 내게 영화 <봄날은 간다>가 ‘라면의, 라면에 의한, 라면을 위한’ 사랑 이야기인 것도,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슴아슴한 첫사랑의 설렘을 느끼기도 전에, 라면을 끓여 먹은 것 역시 주인공들이 나눈 사랑보다 그들이 먹은 라면이 더 맛있어 보여서였다. 낭만이라곤 라면에 든 파만큼도 없구나, 라고 말한다 해도 뭐, 사실이니까.
고양이밥, 그리고 고양이
다시 고양이밥을 얘기하자면 나는 고양이밥은 좋아해도, 고양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정말? 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내 소설 속에 유달리 고양이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개를 더 좋아하는 소설가가 자꾸 고양이 얘길 쓴다는 게 나로서도 너무 신기하다. (『다이어트의 여왕』에는 팬케이크 집 고양이 ‘안나’가 등장한다) 생각해보니 나의 등단작 제목도 「고양이 샨티」다.
물론 고양이 ‘노튼 시리즈(『노튼 삼부작』)’를 무척 좋아해서, 이름도 생소한 ‘스코티시폴드’를 키우고 싶어 했던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역시 나는 고양이를 키울 만큼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고양이에 자꾸만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 『듀이』
며칠 전, 도서관에서 『듀이』를 읽은 건 듀이가 ‘고양이’라서가 아니라 ‘도서관’ 고양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는 동안 이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특성에 절로 웃음이 나오곤 했다. 게다가 이 고양이에게서는 일곱 살 이전의 나와 비슷한 점이 발견되었다. ‘어떻게 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라는 얼굴로 어른들을 빤히 쳐다보는 터무니없이 맹랑한 태도 말이다. 그러나 도서관 반납함에 버려져 동상에 걸린 채 발견되었던 고양이 ‘듀이’ 역시 노튼처럼 고양이라기보다 개에 가까운 고양이다. 이로서 내 취향은 정말 분명해졌다. 결론은 하나였다. 이제까지 나는 ‘개 닮은 고양이’를 좋아했던 거다.
고양이 원고를 쓰다가 내친김에 집에 있는 고양이 관련 책들을 살펴봤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김진경의 『고양이 학교』, 노석미의 『스프링 고양이』 등등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개중엔 완전히 잊고 있던 낡은 책도 있었다. 고양이 프란시스가 고양이 종족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펠리데』 시리즈였다.(‘해문출판사’는 나머지 시리즈들을 어서 번역해줬으면 좋겠다.) 뿌옇게 앉은 먼지를 털어내자, 책 표지에 등장한 명탐정 ‘프란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명민한 고양이의 박력이란 이런 것인가란 생각이 절로 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책상의 책 무더기 속에서 ‘행복한 고양이를 찾아가는 일본 여행’, 이란 부제가 붙은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라는 여행기를 발견했다. 길고양이에 대한 책을 낸 고경원의 에세이였다. 책 뒷장을 넘겨보니 역시 고양이를 좋아하는 스노우캣의 추천사도 멋지게 붙어 있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사인을 할 때면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 말로 진실!”이라는 문구를 함께 써주곤 했다고 한다. 카페 란포의 실내 조명이 은근히 어두운 건, 에도가와 란포가 남긴 글귀처럼 ‘밤의 꿈’을 담은 공간을 구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손으로 툭 치면 무너질 듯 위태로운 문고판 소설 더미, 기이한 표정의 이국적인 가면들, 100년도 넘은 골동품 시계, 느닷없는 해골 모양 장식품이 한데 모여 카오스를 이룬 카페에 따스함을 불어넣는 건 역시 고양이다.
‘카페 란포’를 설명하는 이 문장은 이곳의 분위기를 잘 설명해준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고, 너덜너덜해진 오래된 문고판들은 봉천동 녹두거리 앞 ‘책창고’나 금호동 꼭대기에 있는 ‘고구마’ 같은 헌책방을 연상시켰는데, 책에 나오는 이런 카페라면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무조건 ‘료스케’라는 이름을 붙여준다는 ‘카페 란포’의 주인도 근사했다. 카페를 지키고 있는 고양이 료스케, 엄지 손톱만한 안경을 코밑까지 내려쓰고 있는 료스케의 얼굴은 신묘한 느낌마저 주는데, 정말로 『펠리데』 시리즈의 고양이들처럼 고양이들의 세계엔 ‘쥐를 쫓는 탐정’이나 ‘사람을 관찰하는 고양이’가 있을지도 모른단 상상을 하게 된다. 아무래도 ‘개 탐정’ 같은 게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믿거나 말거나 개보다 고양이 쪽이 영민하단 생각이 들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고양이와 고등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사소한 기억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개와 고양이를 사람보다 예뻐했다. 개나 고양이가 새끼를 품으면, 당신도 아까워 잘 먹지 않는 우족을 고아 우유처럼 뿌옇게 만드셨다. 젖이 잘 돌지 않는 누렁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그뿐인가. 삶은 달걀을 우유에 으깨어 일일이 목에 넣어주던 그 손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할머니가 두런두런 얘기하던 말 역시 절대로(!)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이쁜 누렁이. 새끼 많이 낳아라. 그래야 좋은 값에 팔아서 너 먹을 것도 많이 사주지.”
가족이 몰살당하거나 사람이 굶어죽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팔십 노인의 현실감각이란 그런 것이어서, 어린 시절의 나로선 할머니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렇게 예뻐하던 강아지를 개장수에게 팔아치우는 이율배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양이가 관절에 좋다는 이유로 삶아서 할아버지에게 나눠드리겠다고 눙치던 친할머니까지 떠올리면 등골이 고양이마냥 오그라든다.
하지만 그때의 장면들을 떠올리면 공연히 울고 싶어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의 페이지가 어딘가 깊숙이 접혀 있고, 그 접혀진 시절을 내가 아무리 펼치려 해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낭패감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금 도시를 떠도는 길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유기견을 입양해 새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으로 맞이한 선한 이도 있을 것이다.
내가 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고양이에게 집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개 닮은 고양이거나, 고양이 닮은 개거나, 칼국수나, 수제비나, 그게 그거 아닌가,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분명히…….
추신) 막 트위터를 개설했습니다. 주소는 baekyoungok입니다. 궁금한 분들이 많아요. 소식 전해주시길.
6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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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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