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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탑 스테이지 전경 | |
첫째 날과 비슷한 시각에 행사장에 도착했다. 한눈에 봐도 방문객들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각자의 보폭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여기에 무더위는 진득하게 버티고 있었다. 이틀째 폭염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 누구도 당장의 날씨를 나무라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여름이었고, 페스티벌의 여름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당량의 구름이 관객들의 눈을 편하게 해주었던 게 사실이다. 구름마저 없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사실 지산의 둘째 날은 음악팬들에게 엄청난 기대감을 심어주지 못했다. “펫 샵 보이즈(Pet Shop Boys)만 보면 된다”는 푸념 섞인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실제로 이날 출연진은 첫째 날과 셋째 날에 비해 얌전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참여 밴드 대부분이 대한민국 록페스티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의 인디 밴드들이었다. 보고 또 보고??????. 게다가 빅 탑 스테이지 시간표의 하이라이트만 봐도 첫날은 ‘벨 앤 세바스챤(Belle & Sebastian) - 뱀파이어 위켄드(Vampire Weekend) - 매시브 어택(Massive Attack)’, 마지막 날은 ‘써드 아이 블라인드(Third Eye Blind) - 쿨라 셰이커(Kula Shaker) - 뮤즈(Muse)’인데 둘째 날은 ‘장기하와 얼굴들 - 언니네 이발관 - 펫 샵 보이즈’였다. 1년 사이에 신보를 내지 않은 두 한국 팀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그것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록 음악의 좁은 저변, 슈퍼스타의 부재, 더디기만 한 세대교체 속도가 이렇게 다시 한 번 고름을 터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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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석(아폴로 18) | |
그래도 지산 포레스트 리조트를 찾은 사람들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이날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곳은 그린 스테이지였다. 아폴로 18, 피아, 아트 오브 파티스, 크래쉬가 연이어 바통을 이어받은 'Crazy for Crash' 무대는 무더위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선사했다. 2시 반부터 7시가 지날 때까지 그린 스테이지는 활활 타올랐다. 특히 크래쉬의 무대에 김바다가 동참해 딥 퍼플(Deep Purple)의 「Smoke on the water」를 열창한 모습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괜찮은 공연이 펼쳐진 그린 스테이지는 위치와 상태 조건에서 불합격점을 받기에 충분했다. 지난해 그린 스테이지가 있던 장소가 수영장으로 변한 까닭에 올해 그린 스테이지는 새로운 터로 이사를 왔는데, 이 새로운 그린 스테이지와 빅 탑 스테이지의 거리가 멀어져 관객들의 동선은 상당히 길어졌다. 뿐만 아니라 서브 스테이지의 특징이라 할 만한 실내 공간 구비도 부재했던 탓에 음악팬들은 거의 온종일 뙤약볕 속에 있어야 했다. 땅 상태도 고르지 못했고, 콘솔 쪽으로 갈수록 내리막이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이 느끼는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최 측의 고민이 확실히 부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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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하 | |
물론 문제는 주최자뿐 아니라 일부 관람객의 매너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콘솔 앞쪽부터 돗자리를 펴고 앉아 타인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선 공연 중에도 ‘지가 돈 주고 산 땅인 냥’ 그 위에서 꿈쩍도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개념 중의 무개념, 꼴불견 중의 꼴불견이었다. 빅 탑 스테이지든 그린 스테이지든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주최 측에서 이러한 사람들에게 양해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음에도 여기에 움직이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돗자리 바깥에 예쁘게 놓아둔 신발들은, 정말이지 밟혀도 쌌다. 다른 사람들이 더 가까이서 공연을 볼 수 있게 뒤로 가서 돗자리를 깔던가, 아니면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만이라도 돗자리를 접던가, 이게 그렇게 힘들고 귀찮은 일일까? 힘든 거 따지면 다 똑같다. 이러한 추태를 엄중하게 제한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래도 주최 측에서는 내년부터 일정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게 결국 모두를 위한 길이니까.
저녁 무렵이 되면서 행사장은 더욱 붐볐다. 무대 위의 열기도 식을 줄 몰랐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미미 시스터즈가 빠졌음에도 즐거웠고, 언니네 이발관은 명성에 걸맞은 매력을 뽐냈다. 그리고 이어진 미국 밴드 뮤트매스의 그린 스테이지의 공연! 그러나 멤버들은 예정 시각에서 30분이 지난밤 8시 50분이 돼서야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몇 곡이 채 지나지 않아 관객들은 하나둘씩 빅 탑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뮤트매스는 가공할 만한 연주력으로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9시 30분부터 펫 샵 보이즈를 영접하려는 음악팬들의 마음까지 돌려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결국, 늦어진 30분이 여러 모로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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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이발관 | |
둘째 날의 마지막 공연 한 시간 전부터 빅 탑 스테이지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언니네 이발관 무대가 끝난 직후에도 일부 음악팬들은 펫 샵 보이즈를 더욱 가까이서 보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럼에도, 모두의 표정엔 설렘이 가득했다. 그리고 9시 반이 조금 시각, 펫 샵 보이즈의 역사적인 한국 공연이 드디어 막을 올렸다. 모두의 기대감은 환호와 박수 소리로 한 순간에 폭발했다. 이들이 올해 초에 발매한 라이브 앨범 (2010)의 영상이 눈앞에서 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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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테넌트(Neil Tennant) | |
선글라스와 모자를 고집한 크리스 로우(Chris Lowe)는 악기가 배치된 박스 안에서 묵묵히 연주에 몰두했고, ‘미중년’ 닐 테넌트(Neil Tennant)는 콘셉트에 맞게 의상을 갈아입으면서 노래에 몰입했다. 두 멤버 못지않게 여자 3명, 남자 1명으로 구성된 댄서 팀의 활약도 대단했다. 1시간 반 동안 이어진 공연 중에서는 팀의 최신 히트곡인 「Did you see me coming?」과 축구 덕을 많이 본 「Go west」, 콜드플레이(Coldplay)의 곡을 리메이크 한 「Viva la vida」, 펫 샵 보이즈의 대표곡 「It's a sin」 등이 최고의 반응을 얻었다. 「Being boring」, 「West End girls」로 이어진 앙코르 순서까지 뮤지션과 관객들은 뜨겁게 교감을 나누었다.
펫 샵 보이즈가 무대를 떠난 뒤 공연 관계자들이 나와 무대를 정리했다. 상자를 달라는 일부 관객의 요청에 무대 위에 쌓여 있던 공연용 종이 상자들 중 일부가 관객석으로 던져졌다. 상자를 차지하며 기뻐하는 관객들, 그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관객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관객들, 모두가 쓰레기로 뒤덮인 행사장을 미소를 머금고 가로질러 갔다. 무대 위에 있던 종이 상자는 보물이 되어 새로운 주인을 만나고, 목마름을 달래던 생수통은 쓰레기가 되어 본래 주인을 잃은, 아이러니했던 둘째 날 현장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글 / 김두완(ddoobar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