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건네는 선물이 하나 있다. 지구의가 그것이다. (고로, 내게 지구의를 받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알면 되겠다.) 아니, 웬 지구의냐고 물을 수도 있을 텐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건 세계를 선물한다는 뜻이다. 꼭 굳이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의도를 알아채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알고 모르고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나의 최대한이며, 세계를 선물한다는 것, 그것보다 좋은 선물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울러, 이런 뜻도 있다. 그 지구의에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은 없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대한민국도 지구의에서는 아주 작다. 하지만, 그 지구의를 건네받은 사랑하는 내 당신은, 지구(의)보다 크다. 고로, 당신은 내게 이 세계보다 큰 세계다. 나는 당신이라는 세계를 더 많이 알고 싶다. 사랑은 때론, 그렇게 지구를 능가하는 큰 세계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지구의를 받지 못했다고? 그럼 요구해라. 내겐 왜 세계를 선물해주지 않는 거지, 응? 혹은 언제 줄 거야, 세계?
#2. 백악관을 그린 미국 드라마
<웨스트 윙> 시즌2의 한 에피소드에 이런 말, 나왔다.
그린란드와 아프리카는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지만 실제는 아프리카가 14배나 더 크다.
유럽대륙이 남미대륙보다 더 커 보이지만 실제는 남미가 2배나 더 크다.
알래스카는 멕시코보다 3배나 더 커 보이지만 실제는 멕시코가 더 크다.
유럽의 중심처럼 보이는 독일이 실제는 북쪽 구석에 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메르카도르 도법의 지도에 대한 얘기다. 메르카도르 도법의 지도는 지금 거의 모든 지도라고 보면 된다. 고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지도, 정확하지 않다. 즉, 왜곡이 있는 거다. 둥그런 지도를 펼치다보면 그 정도의 왜곡은 있을 수 있는 것 아냐? No! 그게 그렇게 단순히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 지도의 왜곡은 결국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세계를 이해하는 창을 뿌옇게 흐린 셈이었다. 1970년대 독일 역사학자 아르노 페터스는 메르카도르 도법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 지도의 왜곡이 대륙 간 힘의 균형을 반영하고 개발도상국이나 저개발국을 지도상에서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올바로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다는 주장이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선진 제국들의 오만함일세!
페터스가 주장한 것은 곧 지도의 정치학. 지도제작자 및 학자들의 정치적 입장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지도가 제작됐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을 소외시키다니! 이어 등장한 것이 페터스 도법의 세계지도였다. 그러나 구하기가 쉽지 않다. 여전히 세계의 헤게모니는 선진 제국들의 것이다. 국제 정세가 엎어지지 않는 한 페터스 도법의 세계지도가 주류를 이룰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과거의 세계는 어땠을까. 지금처럼 스마트폰 등을 통한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이나 꼼꼼한 디지털 지도뷰, 구글어스가 없었던 세상의 지도는 어땠을까. 그것은 ‘고지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간혹 듣는다. 과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도에 동해나 독도 관련한 표기가 어떠했는지를. 아직 끝나지 않은 독도의 영토 분쟁이나 동해 표기를 둘러싼 일본과의 공방. 잊을 만하면 우리를 찾는 현실이다. 고지도는 간혹 그렇게 많은 이들의 무심함을 살살 간질이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아주 사소한 표피일 수 있겠다. 고지도의 스펙트럼은 엄청나게 넓다. 고지도를 본다는 것은 세계사를 들춰보는 것이며, 주요 언어에 능통해야만 가능한 것이며, 해상 패권을 둘러싼 헤게모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타임머신과도 같아서 득도를 위한 수행이라고까지 표현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 서정철 교수.
느닷없이 고지도에 빠져서 고지도 수집과 분석에 30년 이상을 매진한 사람. 개인적인 취미로 시작했던 고지도를 통해 국가적인 이슈까지 발굴해내기도 했다. 특히 30년 이상 모은 고지도를 박물관에 기증, 혼자만의 소장품이 아닌 우리 모두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서 교수가 최근
『지도 위의 전쟁』(서정철?김인환 지음|동아일보사 펴냄)을 펴냈다. 책 출간에 맞춰 지난 18일 서울 정동극장 주변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고지도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가 함께 엮은 책, 어땠나.
“내가 먼저 고지도를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내는 (고지도와 관련된) 책을 번역하고 사서 모으게 됐다. 내가 고지도를 수집한 것과 아내가 책을 모은 것이 연결이 돼서 같이 수집하고 행동하게 됐다. 고지도를 모으는 과정에서도 아내와 늘 상의했다. 지출 문제를 상의하고 점검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책은 기본적으로 내가 썼지만, 공동 저자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공유한 내용이 있고, 내가 쓴 것에 대해 비판하고 검토하면서, 의견도 줬기 때문에 공동 저자나 마찬가지다.”
고지도, 심야의 전공이라고 했다. 수집이 가정 경제에 심각한 영향도 줄 정도였다고도 했다. 그런데도 고지도를 놓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나.
“비근한 예로, 아편쟁이가 아편을 못 끊고, 술에 미친 사람은 아무리 말려도 술을 못 끊는다.(웃음) 내게 그런 역할을 한 것이 고지도다. 따지고 보면, 살면서 나쁜 일을 하게 된 게 고지도 때문이다. 거짓말도 하게 되고, 남을 속이게 되고.(웃음)
가정 경제는 기본적으로 아내가 이해해준 것이 가장 컸다. 생활은 자기가 책임질 테니 나보고 (고지도를) 하라고 했다. 주로 내 월급으로 했지만, 모자라면 빌리게 되고, 본의 아니게 피해도 주게 되더라. 그래도 30여 년 되니까, 목표를 도달했다. 이제 손 씻었다.(웃음)”
고지도는 집안의 돈을 빨아들이는 ‘물 먹는 하마’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해라는 명칭에 대한 관심 때문에 고지도 수집을 시작했으나 각각의 고지도를 펼쳐보았더니 Korea라는 이름의 유래, 한?중 영토 문제, 독도 등 우리와 밀접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었다. 나는 고지도라는 ‘심야 전공’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환희를 맛볼 수 있었다.(p.10)
고지도, 대개의 사람들에겐 생소한 분야다. 고지도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됐고, 고지도가 주는 매력은 뭔가.
“우선 나는 고지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작했다. 수집할 생각도 처음에는 안 했다. 고지도를 처음 본 것이 유학 시절 마지막 해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견학을 갔다. 루이 14세의 거실에 지구의가 있기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나와 있는지 찾아봤더니, 동해(Mer Orientale: Oriental Sea)라고 나와 있는 거다.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이게 어릴 때와 연결이 됐다. 초등학교 시절에 동쪽 바다를 동해, 서쪽 바다를 황해라고 배웠는데, 중학교에 가서 미군 지도를 보니, 일본해라고 돼 있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났다. 동해가 맞는 이름이다 싶었다.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연구해봐야 한다고 그랬는데, 관심이 없더라.(웃음) 그들은 박사 학위 논문을 써서 교수가 되는 게 목적이고, 샛길로 그런 것을 공부해서 생산성이 없다고 생각한 거지. 그게 충격이었다.
귀국해서 신문기자와 저녁을 먹다가 그 얘길 했다. 특파원 시켜서 취재해 봐라, 그랬는데, 특파원에게 부탁을 안 하고 그걸 신문기사로 냈다. 그러니 나한테 책임 있는 게 아니냐. 다른 신문사에서 특파원을 보내서 확인하니 그런 지도를 못 봤다는 거다. 졸지에 거짓말쟁이 된 거다. 그래서 방학을 활용, 자비로 프랑스에 갔다. 틀림없이 있더라. 이걸 증명하려면 카메라를 가져갔으면 찍었을 텐데, 마침 카메라도 없었다. 지도를 사자. 그게 고지도를 사기 시작한 거다.
빠지게 된 이유는, 사전을 찾아보니 어떤 지도가 모조품이라고 나와서 한 발자국씩 가다보니 진짜 지도를 사게 되고, 고지도에 빠졌다. 또 고지도에 나라 이름이 보이고, 역사가 보였다. 한 나라의 이름이 어떻게 변화하고 확정됐는지도.”
고지도의 가장 큰 매력은 그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시간적으로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를 투영하는 환상을 준다는 것이다. 일종의 타임머신이라고 할까. 마치 자기 자신이 득도를 위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pp.399~400)
동해에서 시작된 관심이 독도나 코리아라는 명칭, 국경까지 뻗어갔는데…….
“고지도 수가 늘어나면서 동해 문제뿐 아니라, ‘코리아’라고 하는 나라 이름의 경로가 보이더라. 아, 그럼 코리아 유래를 찾아보자. 또 다른 문제가 나온 게, 한국과 중국의 국경 문제였다. 고지도를 보니 국경이 압록강이 아닌 거다. 역사책을 뒤져보니, 지금 국경에 대한 문제점까지 알게 되고.
사실 독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외국의 한 지도상이 독도와 관련된 고지도를 구했다며 사라고 연락이 왔다. 근데 가격이 워낙 비쌌다. 집에 사정사정해서 그걸 사서, 한 신문 특파원에게 문제를 알려서 신문에도 나왔다. 독도 지도를 보니, 고지도가 지도 형태는 달라도 고지도에 나온 나라 등의 이름이 굳어진 경우가 많더라.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도 그런 경우다. 코리아, 저팬, 차이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고지도가 중요한 거다.
이 책도 최종적인 단계는 아니다. 좀 더 세밀하게 들어가고 확대한 책을 내고 싶은 생각도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서도 할 것이 있어야 하는데, 믿지 못할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하고 싶다.”
고지도를 접하는 자세나 태도 혹은 왜 고지도를 봐야 하는지에 대해 좀 더 설명한다면.
“이유를 들자면, 몇 가지가 있다.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코리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리아가 단순히 고려에서 왔다고 안다. 정확한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고려가 일본말로 ‘호라이’다. 이슬람권 다음에 해상권을 잡은 포르투갈이 ‘코라이’라고 불렀는데, 라틴 계통 언어에서는 ‘에’라고 발음해서 ‘코레’가 됐다. 또 라틴 계통 언어는 여성 명사에는 ‘아’가 붙는다. 그래서 코레아. 프랑스 말로 하니, ‘코레’가 됐다. 프랑스에서는 여성명사는 ‘에’로 끝나거든. 영국으로 넘어가 ‘코레아’가 됐다. 처음에는 C로 썼는데, 잘못해서 ‘K’로 쓴 것이 굳어졌다. 그런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현대의 정밀한 지도에 비해 고지도의 형태는 실망스럽다. 하지만 고지도는 그것 한 장만이 아니라 시대적?역사적 지식을 토대로 그 추세와 흐름을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고지도에 나오는 ‘이름(지명)’에 유의해야 한다. 어떤 황당한 이름들은 얼마 후 사라지기도 하지만 고지도에 나온 이름이 대부분 지명의 고유명사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다.(p.33)
“다음으로 미래의 문제다. 우리도 통일 국가가 되면 국경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때 고지도가 중요한 증거가 된다. 법적인 구속력은 없어도 증거 내지 근거로서 중요하다. 역사에 나온 것과 부합이 되는 거지. 정확한 국경선 확정은 고지도를 참고해서 협상해야 할 문제다.
또 독도의 영유권 문제도 중요하다. 중국에서 서양으로 간 자료를 보면, 독도를 우산도라고 하고, 고지도에 나오는 우산도가 우산국을 구성했다. 우리 사학자와 얘기해도, 우산국의 존재에 대해선 잘 모른다. 확실한 자료가 없다. 그런데 중국에선 알고 있었다. 우산국을 구성하는 섬들이 고지도에선 현재의 강원도에 행정조직으로 들어가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하고 일본과 논쟁해서 제시해야 할 논거가 여기에 있다.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은, 독도가 우산국을 구성해서 중요한 것이지, ‘독도는 우리땅’ 노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동해의 올바른 명칭을 찾는 데도 고지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걸 아우르는 것이 고지도 연구이고 심화해야 할 연구다.”
고지도에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명칭만이 아니다. 고지도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숨쉬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p.37)
후학 양성이라고나 할까. 이어서 고지도를 연구하는 사람이 있나.
“후학은, 글쎄……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고지도가 없다. 자료가 충분하지가 않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고지도가) 중요한 전공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학이나 역사학에서 사이드로 한국 고지도를 다루는 분들이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역사와 지리, 지도는 하나의 통합교육이다. 특히 네덜란드, 포르투갈에서는 지도학이 중요한 학문이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을 가르칠 사람도 없지만, 그걸 공부해서 써먹을 데가 없다. 지금은 아주 조금씩 열리지만, 사람을 뽑으려고 해도 공부한 사람이 없고, 키울 사람도 없는 상황이랄까. 또 하나의 어려움은, 고지도를 하기 위해선 여러 언어에 대한 소양이 있어야 한다. 이슬람권 언어부터 포르투갈, 프랑스, 영어, 독일어 등 중요한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지도를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지도 연구에서 우리의 문제로 인식해 온 것은 동해의 명칭, 독도의 영유권 등이지만 향후에는 영토 문제, 즉 한국과 중국의 정확한 국경선 설정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 많은 연구들이 언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표기했는가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계속 새로운 자료를 발굴함과 동시에 이제까지 발군된 자료들에 대한 통계적 연구?분석이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p.35)
고지도를 ‘투시확대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장점은 무엇인가.
“지도를 만든 사람의 의도를 보다 잘 알 수 있다. 객관적, 과학적, 정신분석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지도를 제대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매스컴은 동해와 관계된 지도가 나오면 호들갑부터 떨고 보는데, 지도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우스꽝스럽고 순진한 반응이다. 최종적으론 저자의 의도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그 속에서 봐야 한다.”
지도에 담긴 지리적 정보를 자세히 점검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지도 너머에 있는 상황을 문명사적 관점에서 확대하고 투시하는 방법이다.(p.19)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과소평가된 이슬람 문화의 영향력을 고지도라는 창을 통해 드러냈다는 점도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이슬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더라. 고지도 연구에 있어, 이슬람은 어떤 존재인가.
“희랍(그리스) 문화를 유럽이 바로 전수받은 게 아니다. 희랍 문화는 이슬람으로 갔다가 꽃을 피운 뒤 서양으로 간 거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가 서양 문화의 이해에서도 중요하다. 고지도에서 이슬람이 중요한 것은 그쪽 사람들이 극동에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이다. 1,150년경 이슬람의 한 지리학자가 왕의 지시에 따라 극동에 다녀온 사람들의 여행담을 기록하고 지도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신라라고 하는 이름이 나온다. 그때 제일 먼저 한국이 소개된 거다.
이슬람 지도를 물려받은 것이 포르투갈인데, ‘코리’라고 한 기록이 있다. 그건 이슬람이 한국을 부른 이름인데, 포르투갈 사람들이 나라 이름인지 모르고 써놓은 거다. 이슬람 사람들은 한국을 아직 코리로 부른다. 그래서 이슬람 지도를 더 연구해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 뜻있는 사람들이 장학금을 마련, 코리아가 나오는 옛날 지도를 찾아보도록 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 그런 방향으로 연구를 할 거다.”
아랍-이슬람은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아랍-이슬람의 지도에서 눈여겨 살펴볼 것은 바로 신라와 고려가 처음 언급되었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고려와 교역하면서 고려를 ‘코리(Cory)’라고 부른 것도 그들이다.(p.23)
이슬람권의 사람들은 지도책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넓혔고 이슬람 문명의 우수성을 동시대인들에게 인식시켰다.(p.62)
다른 고지도를 구할 때도 그랬지만, ‘포르투갈 지도의 금자탑’(이하 ‘금자탑’)을 구하고, 국내에 공수하기까지의 과정이 특히 흥미진진하더라. 과장하자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갖고 오는 것 같았다고 할까.
“고생도 많았고 돈도 돈대로 많이 냈다. 물론 그것보다 한국까지 손으로 들고 오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 과정을 책에도 썼는데, 당시 ‘금자탑’은 포르투갈의 100여 개 국립도서관에 한 부씩만 보냈던 거다. 시중 유통이 안 되는 거지. 포르투갈에 가서 제일 큰 고지도상에 체류하다시피 하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들여온 것이 아니라, 약간 편법으로 갖고 왔다. 그때 생각해보면, 목적이 좋으니까 수단이야 뭐…… 그런 심정이었다.(웃음)”
고지도를 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당빌의 지도첩을 구할 때, K회장이나 세관 담당 과장 등도 그랬고. 도움을 준 분들에게 어떤 고마움을 표하고 싶나.
“오랜 세월 지났지만, 여전히 고맙게 생각한다. 그 당시로서는 불법적인 통관도 있었다. 관세를 물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경우였는데, 취지에 대해 설명을 듣곤 통과시켜준 분도 있었다.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에 못지않게 고맙다. 당시 가짜 영문 명함을 찍어서 외국에 가면 날 소개할 때, 고지도 수집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10% 할인해주는 거다. 교수라고 하면 할인이나 동정을 못 받는다. 그것도 고마운 거지만, 더 고마운 것은 외상 거래를 해 준 게 참 고마웠다.
사실 제일 큰 고마움은 아내에게 해야 한다.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줬을 뿐 아니라, 그 돈을 다른 데 투자했으면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웃음) 강남이 개발되기 전에 테헤란로 50평 살 돈으로 고지도를 사기도 했다. 그런 거 생각하면 아내가 제일 고맙다.”
고지도는 국운이며 역사, 또한 국력이라고 했다. 책을 보고 고지도를 따라가 보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도 있다.
“책의 제목과도 관계가 있다. 연구해 보면 해양 세력이 강해지는 나라가 지도를 독점하다시피 한다. 그 나라가 세력을 잃으면 뒤잇는 나라가 대신하면서 지도가 발달하는 과정을 갖는다. 포르투갈이 네덜란드로 가고, 다시 프랑스로 갔으며, 영국이 19세기 와서 독보적인 해양국가가 되면서 지도도 영국으로 넘어갔다. 그 이후에는 현대지도가 나오고. 국력이 지도를 만들게 하는 원동력이다. 돈이 많다고 되는 게 아니다.”
고지도를 연구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한 나라의 지도 제작이 활성화되는 데는 국운의 융성과 해외 진출 의지(현실)가 직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고지도 너머에 있는 역사적 현실을 꿰뚫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p.28)
고지도는 국력이다. 고지도의 전성기는 유럽 각국이 해양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대항해 시대’였다. 발견과 탐험이 성행하던 시기, 새롭게 밝혀진 지역을 지도에 수록하기 위해서는 해상권, 즉 국력이 필수였기 때문이다.(p.96)
그러고 보면 고지도는, 국제정치학의 헤게모니를 보여주는 장이면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학문일 수도 있겠다.
“정치학도 반영이 되는데, 1차적으로 지도학은 종합학문이다. 17~18세기까지만 해도 고지도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수학자거나 천문학자였다. 자기들의 과학지식을 이용해 만든 거지. 지금도 그런 면이 조금 있지만, 역사와 지리가 제일 가까운 학문이다. 역사를 알기 위해 끌어들여야 할 것이 지도이고, 지도는 아까 말했듯 정치와 사회도 반영한다. 18세기 동해를 한국해라고 쓴 것에는 사회적인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고, 유럽이 보기엔 한국해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것이다. 그게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거다. 종합적으로 다 걸쳐 있다고 봐야하는 거지.”
다른 나라의 고지도와 우리나라의 고지도를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있다면.
“한국 고지도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18세기까지도 그들은 한국 지형을 제대로 모르고 그렸다. 중국 고지도를 보니, 한국과 중국의 국경이 없더라. 대부분이 그랬다. 국경이 나온 지도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에서는 국경을 표시할 필요가 없었다. 원하면 그 나라를 점령할 수 있고, 조공을 바치는데, 국경을 만들 필요가 없었던 거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거의 유일한 경우고, 그 외에는 국경을 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그려진 부정확한 고지도를 들여왔고, 중국 사람이 생각하는 세계지도를 들여와 잘못된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말기까지 독도의 위치도 제대로 몰랐다. 어떤 지도를 보면 우산도가 한반도에 더 가깝고 울릉도가 더 멀리 있더라. 그걸 보면 우리가 역사적으로 동해의 섬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준다.”
독도의 영유권 문제를 이야기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동해의 존재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독도를 이야기할 때 동해와 연결시키지 않는다. 즉 독도가 동해에 있기 때문에 한국 영토라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특히 우경화된 일본인들)은 독도가 일본해에 속해 있는 작은 섬이므로 한국 소유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p.307)
동해 표기 이슈를 제기한 지 40여 년이 됐지만, 동해 표기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외교 현안의 하나다. 당사자 입장에서 어떤가.
“외국에서 보는 관점을 말하자면 외국에서는 이런 얘기를 한다. 첫 번째로 일본해는 IHO(국제수로기구)에서 정한 거다. 중국도, 미국도, 다른 나라도 이것이 공식 이름이라서 일본해로 표기한다고 얘기한다. 지도를 만드는 중요한 제작사들과 중요한 매체들은 동해 명칭을 병행해서 표기하고 있다. IHO에서 만드는 지도에 동해가 병기된다면 국제적으로 공적인 이름이 되는 거다.
그런데 일본은 공적인 이름인데 왜 그리 하느냐. 동해는 일본뿐 아니라 8,000만 이상이 사는 한국도 있고, 중국, 러시아도 관계되는 바다인데, 일본이 독점해야 하느냐. 부당하다. 지명을 정할 때도 원칙이 있다. 토착명이 가장 먼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동해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일본해를 지우자는 것이 아니고.
미국이나 중국 등 정부는 공식 명칭을 쓰더라도, 지도 제작사에서는 한국이 주장하는 명칭에 일리가 있다며 병기를 한다. 외국에선 또 어떤 문제를 제기하느냐면 독도를 일본에서는 다케시마라고 하니까 병기를 해야 한단다. 한국은 독도를 고집하면서 동해는 병기해야 한다는 점을 들어 일부 출판사들은 독도와 다케시마라고 병기하고 있다. 그런 양면이 있다. 외국에서는 다케시마도 인정하라고 한다.
아주 조심스럽지만, 내가 생각할 때, 영토는 한국 것으로 할 테니 이용권을 일본 것으로 하거나 이용권은 한국에 주지만 영토 표시는 일본 것으로 하라고 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그런 예가 있다.”
고지도 수집이나 연구 등은 국가에서 해야 할 일인데, 그리 못한 것 같다. 2004년, 30년 동안 수집한 180여 점의 고지도와 관련 문헌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수집하기도 어려웠지만, 기증하기는 더 어려웠을 거다. 어떤 연유로 기증하게 됐나.
“고지도 산 것 중에 독도 관계된 자료를 힘 있는 기관에서 넘기라는 압력을 받은 적도 있다. 그때는 ‘내 사비를 들여 샀는데, 왜 넘겨’ 하고 안 넘겼다. 모으는 과정에서는 수집에 혈안이 돼 있었을 뿐, 나중 문제에 대해선 생각을 안 했다. 그러다 나이 60이 지나고 보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생겼다.
제일 먼저 알아본 곳이 대학이었다. 그런데 고지도를 기증한다고 해도 돈을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더구나 대학은 고지도를 받아서 활용할 여력이 없는 거다. 박물관을 만들려면 재벌이나 돼야 하고, 전시를 한다고 해도 전시공간을 구하는 임대료는 어떻게든 구한다 쳐도 그것을 도록으로 만드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들어서 감당할 여력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어떤 분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면 도록도 내주고 전시도 해준다는데,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박물관에서 우리 집에 사람을 보내와 협상을 해보니 그게 제일 좋은 길인 것 같더라. 모으는 과정에서 내 것이라고 하지만, 모으고 나서는 내 것이 될 수 없더라. 후손에 물려줘도 후손이 가치도 모르면 처박아놓을 텐데, 모든 사람들이 활용하고 공부하기 위해선 기증이 제일 좋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고지도의 가격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아쉽기도 하다. 재벌도 될 수 있었는데.(웃음) 그렇지만, 죽을 때 100억이 있어도 짊어지고 가겠나. 하루 세 끼 먹고 지내면 되는 거지. 죽을 때 가져갈 것도 아니고. 후회하다가도 잘했다 생각하고.
나 혼자만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다. 무엇이든 많이 모으면 누구나 그리 생각할 거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부담이지, 그것을 놓을 때의 해방감과 자기가 옳은 일 했다고 느끼는 즐거움을 묵힐 수는 없었다. 그걸 아깝게 생각하는 사람은 돈도 쓰지 말아야 한다. 고지도도 한두 점 살 때는 내 것이지만 몇백 점 모으면 사회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의 것이다.”
마지막 질문이다. 서정철에게 고지도란?
“고지도를 심야의 전공이라고 표현했는데, 가만 생각하면 전생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빠져든 것이 아닐까 싶다. 우연으로 시작했지만, 그 나름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도 같고. 정년퇴직을 한 입장에서 솔직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고지도 평가를 위한 의뢰가 있으니, 이게 본래의 직업이나 전공인 프랑스 어문학보다 더 중요한 전공인 것 같다.”
나는 고지도를 수집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깨달았다. 결국 고지도를 통해 인생을 배운 셈이다. 다른 사람이 가르쳐준 것은 거의 없고, 나 스스로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수집은 이런 것이다’라고 설교할 용기는 없다. 몽테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의 체험과 스스로의 깨달음만을 전하고 싶다.(p.3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