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는 공존의 시대였다. 대중문화의 모든 분야를 통틀어 실로 다양한 스타일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인 것이다. 그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흑인 음악 또한 서서히 음지에서 양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소울 뮤직은 공민권 운동과 함께 발전해 왔다”는 제임스 브라운의 말처럼 ‘소울’은 그러한 흑인의 자의식을 극명히 드러내며 ‘저항 음악’으로서 그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백인 지배 사회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던 노력은 흑인 음악 전문 레이블 설립으로 이어졌다. ‘모타운’ ‘스택스’ ‘아틀랜틱’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흑인 레이블은 그야말로 ‘흑인의, 흑인에 의한, 흑인을 위한’ 음악적 자치구였다. 그들은 기업화된 시스템을 구축하며 백인 중심의 음악 산업계에 일대 혁명을 몰고 왔다. 그중 모타운은 ‘H-D-H’(작곡 트리오)의 재능에 힘입어 60년대를 걸쳐 수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소울의 본질이 ‘다크 초콜릿’이라 표현될 수 있다면, 모타운의 그것은 ‘밀크 초콜릿’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필 스펙터’의 ‘월 오브 사운드’를 자신들의 사운드에 배합하는 등, 철저한 ‘팝적 감각’을 무기로 백인 청중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적어도 팝 차트에서는 비틀스를 비롯한 영국 음악의 공세에 견줄 만한 미국의 음악적 세력이었다). 비록 그들의 대중 친화적 면모가 철저히 ‘흑인적인’ 노선을 고수하던 스택스에 비해 평가절하되곤 하지만 ‘흑인 음악의 대중화’라는 측면에서 그들이 향후 대중음악계에 기여한 공적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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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타운 | |
50년대부터 알앤비 밴드에서 활동하던 ‘베리 고디’는 재즈 음반을 주로 취급하는 레코드 숍을 열지만, 금세 빚만 남기고 사업을 접어야 했다. 부채 상환을 위해 디트로이트의 GM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며 작곡 활동을 병행하던 그는 59년 알앤비 가수 재키 윌슨에게 곡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 곡이 59년 밀리언셀러를 기록, 그의 음악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뜻을 굳힌 그는 백인들에게 장사가 되는 알앤비를 시도해 보자는 생각으로 단돈 8백 달러로 레코드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회사명을 ‘모타운’이라 명명하게 되는데, 모타운이란 ‘모터 타운’ 즉,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인 디트로이트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초기에는 ‘Motown’과 ‘Tamla’ 두 개의 조그마한 산하 레이블을 운영했지만, 61년 스스로 발굴한 ‘스모키 로빈슨 앤 더 미라클스’와 뒤이은 ‘수프림스’(다이아나 로스가 재적했던), ‘템테이션스’(「My girl」로 유명한) 등의 대박 행진으로 점차 대형 레이블로 성장해 간다. 소규모의 ‘인디펜던트 레이블’을 단 십 년 만에 명실 공히 ‘대기업’의 위치로 이끈 베리 고디의 탁월한 사업 수완은 ‘Hitsville USA’라 불리던 레이블 사옥의 효과적인 운용에서 잘 드러난다. 그곳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구조였다. 1층에는 작곡가들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2층엔 ‘펑크 브라더스’라 명명된 백업 밴드가, 3층엔 안무가들이, 그리고 지하엔 레코딩 스튜디오와 휴게실이 있었다. 소속 가수들은 각 층을 오가며 하드 트레이닝을 했으며, 연주가와 작곡가들은 대량으로 악곡을 생산, 그것을 가장 잘 소화하는 가수에게 주는 식이었다. 따라서 모타운 레이블의 곡들은 가수가 다른 동일 곡이 여럿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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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고디 | |
그렇게 베리 고디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모타운 사운드’는 ‘The Sound of Young America’라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정교하게 설계된 것으로서, ‘최대한 넓은 수용층을 겨냥한 양질의 상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가수들은 사장의 방침에 따라, 기품 있는 의상을 입고 우아하게 행동해야 했으며(정확히 말해 백인 관점에서의 ‘흑인다운 행동’은 일체 금지였다), <에드 설리번 쇼> 등 많은 TV 음악 프로그램에 활발하게 출연, 레이블 전반적으로 동시대의 비틀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고, 대중음악의 흐름을 선도했다.
60년대 모타운 사운드의 주역은 주지한 바와 같이 베리 고디와 수많은 모타운 소속 아티스트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영광의 역사 뒤편에서 묵묵히 활약했던 뛰어난 조력자들이 있었다. 모타운 사운드의 음악적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작곡 트리오 H-D-H와 연주자 집단 ‘펑크 브라더스’가 바로 그들이다.
1965년에서 1972년 사이에 모타운 레이블에서 발표된 빌보드 탑 텐 히트곡은 모두 79곡. 그중 28곡은 H-D-H, 또는 그들 중 한 명의 작품이었다. 또한 넘버원에 랭크된 21곡 중 무려 12곡이 바로 그들의 작품이었던 것이다(포 탑스, 수프림스, 마사 앤 더 반델라스의 히트곡 대부분은 H-D-H의 작품). 이처럼 모타운은 말 그대로 ‘모터 타운’ 디트로이트의 ‘히트곡 제조 공장’ 그 자체였고, H-D-H야말로 그러한 히트곡 제조 공장의 ‘신제품 기획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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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브라더스 | |
H-D-H란 ‘홀랜드, 다져, 홀랜드’의 약자로 ‘에디 홀랜드’ ‘브라이언 홀랜드’의 ‘홀랜드 형제’와 ‘라몬트 도지어’ 등 세 명의 멤버로 구성된 작곡가 팀이었다. 그중 에디 홀랜드가 작사를, 브라이언 홀랜드가 작곡을 주로 담당하고, 라몬트 도지어가 작사, 작곡, 양쪽에 모두 참가하는 형태로 곡을 완성했다. 이 세 명이 한 팀을 이루어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62년경의 일이었고, 바로 그 무렵부터 디트로이트의 작은 레이블에 불과했던 모타운은 기적의 대약진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들 세 명은 모두 작곡가가 아닌 뮤지션을 꿈꾸던 청년들이었다. 원래 그들은 싱어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훗날 모타운에서 독립하여 자신들의 싱글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들은 음악 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었고, 전문적인 음악 지식이 그다지 풍부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특별한 재능이 있었는데, 젊은이들의 마음을 자극할 만한 소박한 문구와 춤추기 좋은 세련된 비트를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그것을 바탕으로 전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는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다. 그들은 약간의 허밍이나 리듬의 아이디어를 백업 그룹 ‘펑크 브라더스’에게 들려주고 그들은 그것을 다양한 패턴으로 변주, 그렇게 노래를 완성해 나가는 방법을 취했다.
재즈에 일가견이 있던 피아니스트 ‘알 반 다이크’, 수많은 명 프레이즈를 만들어 낸 베이시스트 ‘제임스 재머슨’, 그리고 모타운 사운드 특유의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낸(‘모타운 비트’ 라고도 한다. 수프림스의 「You can't hurry love」가 대표적) ‘베니 벤자민’, 「My Girl」의 저 유명한 기타 리프를 완성시킨 기타리스트 ‘로버트 화이트’를 중심으로 한 ‘펑크 브라더스’는 H-D-H가 가져온 노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양념을 치며 ‘1일 3곡’이라는 엄청난 스피드로 무수한 안타를 날려 댔다. 그들 펑크 브라더스는 히트곡 제조 공장의 생산 라인에서 가장 숙련된 근로자였고, 그들의 부재는 ‘생산 라인의 마비’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모타운의 해외 공연 등에 동참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으며, 언제나 녹음을 위해 컴컴한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그들에 대한 댓가는 몇 푼 안 되는 시급이 전부였다고 한다. 게다가 모타운이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기며 그들은 결국 활동의 장마저도 빼앗겨 버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안타까울 데가……!
모타운의 설립자 베리 고디의 1인 독재 체제하에서 H-D-H에게 주어진 보상 역시 그들의 공로에 비하면 한없이 미미한 것이었다. 과도한 업무와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날대로 난 H-D-H는 1968년 10만 달러의 보너스를 주겠다는 회유에도 불구, 모타운의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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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H | |
우여곡절 끝에 모타운으로부터 독립한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그것은 ‘인빅터스’와 ‘핫 왁스’라는 두 개의 레이블로써, 거기에서 곧장 자신들의 작품을 제작, ‘캐피탈 레코드’와 ‘붓다 레코드’를 통해 발매하기에 이른다.
그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레이블을 세우는 동안, 모타운에서는 충격적인 발표를 한다. 그것은 모타운의 본사를 디트로이트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한다는 것이었다. H-D-H라는 기둥을 잃은 모타운은 자신의 뿌리인 동시에 정체성이기도 했던 지역의 ‘검은 커뮤니티’와도 완전히 결별하며 느닷없는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러한 베리 고디의 모든 도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1972년 로스앤젤레스로 본거지를 옮긴 모타운은 급격하게 예전의 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잭슨스’와 ‘다이아나 로스’ 같은 간판급 스타가 일찍이 다른 회사로 이적해 버리고 난 뒤, 지독한 경영난에 허우적댔다. 이따금 코모도스(라이오넬 리치가 재적해 있던)나 드바지 (80년대의 펑키 그룹) 같은 재능 있는 신예들이 레이블을 위기에서 구하는 듯했으나 결국 거기까지였다. 80년대에 접어들자 음악 산업은 점점 다국적 기업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며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갔다. 1988년 모타운은 결국 소규모 독립 레이블의 처지로 MCA에 매각되어 버리고 만다. 전설의 왕국은 그렇게 보잘 것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미국 음악 문화의 빈틈을 노렸다는 점이 바로 베리 고디의 천재성이고 그는 도시의 흑인 동네에 사는 나와 같은 젊은 형제자매들에게 이게 바로 우리의 음악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동시에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노래를 듣던 백인 동네에 사는 백인 형제자매들 역시 모타운의 음악이 자기들의 노래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 코넬 웨스트 박사, 프린스턴 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