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차승우의 록큰롤 스타
‘블랙 아메리칸’의 상징적 존재가 된 사내
제임스 브라운(2/2)
격동의 시대였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제임스 브라운은 점차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격동의 시대였던 196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제임스 브라운은 점차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은 곡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It's A Man's Man's Man's World」에서는 남성 중심 사회의 부조리한 이면에 대해 노래했고, 「Don't Be A Drop Out」에서는 흑인 아이들에게 ‘낙오되지 말 것’을 당부하며 자신의 콘서트 매출 중 일정한 금액을 흑인 장학 재단에 기부하기 시작한다. 또한 ‘NAACP’(미국의 흑인 인권 단체. ‘전미 유색인종촉진동맹’ 또는 ‘전미 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라고도 한다)의 영구 회원으로 비폭력 저항주의의 입장에서 ‘공민권 운동’(공민이 가지는 선거권?피선거권, 기타의 공민권(참정권)의 획득을 위한 운동)을 지지하며 스스로 흑인 지위 향상, 직장 보장과 능력 개발 촉진을 위해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 그 운영을 시작한다. 당시 위대한 흑인 해방 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와도 교분을 쌓기도 했는데, 그가 암살된 1968년 4월 4일, 제임스는 사회 운동가로서 하나의 커다란 업적을 남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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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브라운의 대활약은 미국 정부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고, 결국 백악관 주최 만찬에까지 초대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훗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될 민주당의 휴버트 험프리와 공화당의 닉슨 등, 거물 정치인들과 친분을 쌓게 된다. 「America is my home」은 바로 이러한 시기에 발표된 곡인데, 그것은 놀랍게도 ‘국가주의’를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게다가 베트남까지 날아가, 참전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자청하기도 한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그때까지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반전 운동, 공민권 운동가들이 등을 돌리게 되며, ‘블랙 팬더’(1965년에 결성된 미국의 급진적인 흑인 결사. 흑표당‘黑豹黨:Black Panther Party’이라고도 한다) 등의 과격파 세력으로부터 협박을 받기에 이른다. 이러한 협박이 주효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1968년 그는 또다시 진로를 변경하여 충격적인 곡을 발표한다. 그 제목만으로도 유명한 역사적인 싱글 「Say It Loud. I'm Black and I'm Proud」(큰 소리로 외쳐라. 나는 검둥이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이 곡은 빌보드 알앤비 차트 정상에 무려 6주간이나 랭크됐으며 전체 차트 10위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그의 강력한 블랙 파워 지지 선언에 그동안 애써 늘려 왔던 백인 팬들을 단숨에 잃고 말았다. 또한 FBI의 블랙리스트에까지 오르게 되며, 이후 국세청으로부터 세금 체납 등의 혐의로 철저히 추궁당하기도 한다. 혼돈의 시대였던 탓이리라. 그는 자기주장을 할 때마다 새로운 적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만 것이다. 아마도 그가 정녕 말하고자 했던 것은, 1969년 발표된 「I don't want nobody to give me nothing」에 담겨있는 듯하다. “Open up the door, I'll get it myself…….” 이러한 맥락에서, 실은 그가 언제나 일관된 삶을 살았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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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새로운 밴드 JB's와의 협연으로 태어난 최초의 성과가 펑크의 역사적 명곡 「Sex Machine」 되겠다. JB's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는 그 후로도 그들이 단독으로 녹음한 여러 장의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으며, 그 곡들의 대부분이 현재에 이르러 ‘샘플링’의 보물 창고로써 다수의 DJ나 래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표적인 음반으로서 <Food for Thought> <Doin' It to Death> <Damn Right I Am Somebody> <Breakin' Bread> 등을 꼽을 수 있는데,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는 명작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이즈음 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나들며 대규모 순회공연을 가지게 되는데, 나이지리아에서는 아프리칸 펑크의 개척자 ‘펠라 쿠티’(나이지리아의 음악가. 미국의 블루스?재즈?펑크를 전통적인 요루바 음악과 융합시켜 ‘아프로비트라’는 아프리카풍의 현대 음악을 만들어 냈다. 급진적 음악가이자 정치가로서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 중 하나이다)와도 만남을 가진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지, 실로 흥미 있는 대목이다.
1970년에 접어들어, 제임스는 킹 레코드를 떠나 거대 기업 ‘폴리돌’(Polydor)과 계약한다. 킹 시대보다 금전적인 면에서 풍족한 조건으로 이적했지만, 음반 제작의 자유도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후퇴하고 만다. 더욱이 대중음악계 또한 다시금 지각 변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는데, 펑크 뮤직의 인기가 차츰 시들해질 무렵, 사람들은 ‘디스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레코드 회사는 디스코 성향의 단조로운 리듬 패턴의 곡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밴드 사운드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부치 콜린스 그리고 메이시오 파커와 프레드 웨슬리가 당시 디스코의 아성에도 기세를 잃지 않았던 P-Funk 군단으로 이적해 버린다.
1977년 8월 엘비스 프레슬리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핀치를 맞고 있던 제임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둘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으며, 남부 시골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친구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제임스는 엘비스의 관을 앞에 두고 “왜 먼저 가버린 거야?”라며 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전까지 누구 앞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기에 최측근들마저도 그 슬픈 모습에 사뭇 놀랐다고 전해진다. 계속되는 악재에 그의 마음도 많이 약해졌던 탓일까? 그는 그로부터 수년 동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1980년, 두 명의 코미디언에 의해 부활의 계기가 마련된다. 제임스의 열렬한 팬이었던 존 벨루시와 댄 에크로이드로부터 영화판 <블루스 브라더스>의 출연을 요청받은 것이다. 이 영화의 대박을 계기로 R&B의 붐이 일어났고 제임스와 그의 음악은 다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게다가 영화 <록키 4>의 테마곡 「Living in America」도 대히트를 기록, 제임스 브라운은 순식간에 쇼 비지니스계의 정상을 탈환한다. 1984년에는 힙합 음악의 개간자라고 일컬어지는 ‘아프리카 밤바타’와의 협연을 가지며 앨범 <Unity>를 발표, 당시 힙합계의 젊은 아티스트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로부터 제임스의 수많은 노래들이 차례차례 무단 샘플링으로 사용되기에 이른다. 때는 아직 샘플링에 관한 저작권 침해의 법적 제재가 없던 시기인 탓에 제임스는 자신의 곡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단 도용되는 꼴을 잠자코 지켜봐야만 했다. 1988년 발표한 「I'm Real」은 당시 그가 느꼈던 분노를 표현한 작품이었고, 이 시기의 대표작이 되었다. 이 곡은 당시의 인기 펑크 밴드 ‘풀 포스’와의 공동 작품으로 자신의 음악을 훔치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다.
초로의 길목에서 각종 명예의 전당에 오르거나 하는 수순을 밟으며 조용히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다. 스튜디오에서의 논쟁이 급기야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지며 체포되거나, 아내에 대한 폭력이 끊임없이 거론되었고, 2004년에는 자식에게 폭력을 휘둘러 또다시 체포되는 등, 그의 사생활에 관한 세인들의 평가는 최악 그 자체였다. 그의 삶은 철저히 ‘신분 상승의 욕구’에 의해 구축된 것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얻어 내야 했다. 그렇게 일구어 온 그의 업적이란 것은 어떤 의미, 그 자신의 피와 땀, 눈물, 그 모든 욕망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생긴 응어리 같은 것일 게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음속에 ‘폭력에 의한 트라우마’로 남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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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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