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가 불러온 기시감이었다. 쥐의 시대라 불러도 무방한 이때. 쥐가 창궐하는 『재와 빨강』(편혜영 지음 | 창비 펴냄)을 보자니, 이건 메타포이거나, 아예 리얼리즘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 안에도 그 쥐가 있으니 쥐가 그야말로 대세인 시대. “이번 전염병 역시 한때 전세계를 공포로 물들게 한 쥐에 의한 질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유일한 증거라면 도시 곳곳에 출몰하는 쥐떼였다. 도시는 여느 때보다 쥐가 극성이었다.”(p.192)
그렇다고, 70~80년대처럼 ‘쥐를 잡자’는 구호를 내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우리는 안다. 쥐약을 놓고 쥐덫을 놓는다고, ‘소탕’할 수 없다는 것을.
“쥐는 결코 소탕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코끼리를 죽일 만큼 강한 독성을 지닌 쥐약을 쓴다고 해도 근처를 지나가기만 하면 자석처럼 철커덕 쥐를 잡아끄는 덫을 쓴다고 해도 완전히 박멸할 수 없다. 약이나 덫으로 소탕이 된다면 애당초 쥐가 아니다.”(p.111)
어딘지 모를 ‘C국’에, ‘왕의 연호’를 사용한다지만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 대해 모호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 무국적 판타지의 냄새도 나지만, 자꾸 현실과 겹치는 것을 피할 순 없었다. 외국어 같은 언어를 쓴다지만, 서로 다른 뜻으로 쓰면서 소통이 안 되는 이 땅의 현실을 안다면, 그건 외국어라고 말해도 무방할 노릇이고. 주인공은 어쩌면 다른 지정학적 공간이 아닌, 단지 쓰레기 더미가 쌓인 분리된 세계 속으로 떨어진 것이 아녔을까.
물론, 그저 흘려들어도 좋을 만큼의 농담 같은 감상일 뿐이다. 비주류는 물론 약하고 힘없는 것들을 배제하고 동종 교배로 ‘그들만의 리그’ 축성에만 골몰하는 쥐새끼들 덕분(?)에 가진 감상.
“쥐가 무슨 일로 시간을 쓰는지 알면 금세 이해될 것이다. 쥐는 무리를 생산해내는 일에 일생을 바친다. 그것이 쥐가 하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이다. 쥐는 먹을 때, 갉을 때, 땅을 팔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 교미를 하며 지낸다.”(p.111) “유별날 만큼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쥐의 성향”도, 지금의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더 정확하게는 이권과 돈이겠지만.
지금도 그렇듯, 쥐새끼들 앞엔 속수무책이다.
“쥐는 항상 그보다 빨랐다. 쥐는 그가 찾지 못하는 것을 찾았고 그가 먹지 못하는 것을 먹었으며 그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먼저 먹었다. 그가 팔을 뻗을 수 없는 곳에도 거리낌 없이 갔으며 그가 갈 수 있는 곳에는 항상 먼저 갔다.”(p.119)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뭐? 다른 것 없다. 살아남으라. 버티고 견디라. 쥐새끼들 부러워 말고, 소탕이나 박멸될 것은 아니나, 우리 마음에까지 쥐새끼 정신이 똬리를 트는 것은 막자. 뭐, 그런 것?
그래, 이쯤에서 거두절미하자. 이 복잡다단한 인간세를 그리 편협(?)하게 본 나의 옹졸한 감상을 탓하시고, 본론으로. 지난 4월의 첫날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 장국영이 거짓말 같이 허공으로 흩날리면서 나이듦을 멈춘 지 7년이 된 그날, “벽돌 같은 단단한 문장으로 치밀하게 축조된 어두운 인간세의 초상화”(성석제)를 그린
『재와 빨강』의 저자 편혜영 작가와 가진 낭독의 밤이 서울 상수동 이리카페에서 열렸다.
사회를 본 출판사 관계자는 “쓰레기와 전염병이 난무하는 소설의 세계가, 터무니없는 세계가 아니라, 지금 세계의 약간의 과장법이 아닐까”라는 말도 건넸지만,
『재와 빨강』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작품임을 우선 말하고 가야겠다. 낭독과 함께 펼쳐진
『재와 빨강』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귀 한번 기울여 보시라.
신종플루와 지진에서 착상된 세계
게스트 뮤지션이자 싱어송라이터 ‘양양’이 낭독의 밤을 열었다. 책을 읽어 보니, 주인공 남자에게 시린 겨울의 기분이 들었다며, 이 남자에게도 봄이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불러 준 노래 「봄봄」. 올해 유난히 늦된 봄이었지만, 밝고 따뜻한 희망찬 노래가 봄을 훅~ 앞당기는 그런 기분.
노래가 끝나고 공간을 채우는 편 작가의 낭랑한 목소리.
“소설이 차가워서 걱정이었는데, 노래가 따뜻해서 다행이다.” 곧, 편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 잉태된 계기부터 풀려나온다. 지난해 우리 안에서 암약한 공포, ‘신종플루’. 그리고 지구촌 우리를 경악과 슬픔으로 몰아넣은 ‘지진’에서
『재와 빨강』은 착상됐단다. 지진은 편 작가의 관심사다. 회사에 다닐 때, 일본으로 출장을 갔던 경험담. 첫날 호텔에서 잠을 설치고 이튿날 아침, 동료들과 아침식사를 나눴는데, 간밤에 지진이 있었단다. 잠을 설쳤음에도 진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어찌 된 거지? 섬뜩하면서도 스스로 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가끔 현기증처럼 울렁거리는 느낌을 가지게 된 편 작가.
작가란 모름지기 그렇더라. 삶의 미세하고 작은 부분에서도 호기심 천국이 되어, 세계를 넓혀 나가곤 한다. 편 작가 역시 그랬다. 지진에 대한 그 경험으로 지진에 대한 책이나 잡지를 많이 보게 됐고, 어느 날 펼친 과학 잡지에 실린 대지진 이야기에 그는 끌렸다.
“대지진이 예고된 나라에서는 지진 강도가 높지 않아도 사망자가 발생한다더라. 약간의 진동만 느껴도 건물이 붕괴될까 봐 뛰어내리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죽음을 선택하는 거다. 그냥 있었으면 안전했을 텐데. 그런 아이러니에 끌렸다. 삶을 살겠다는 사람이 삶을 망쳐 버리는. 위험에 대한 경고 때문에 위험에 빠져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강도가 높지 않아서 지진 때문에 아무도 죽지 않았으리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죽은 사람이 있었다. 집이 흔들리자 대지진으로 착각해 건물 바깥으로 나갈 생각으로 겁을 먹고 뛰어내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 말고 지진 때문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p.221)
쓰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화하기 위한 고민을 하던 차, 민감하게 감지할 만한 세계의 대형을 만들어 주는 구조를 고민하던 차, 신종플루가 세계를 잠식하고 있었다. 맞아. 전염병도 보통사람으로선 실체를 알 수 없는 법. 뉴스 등을 통해 전해 듣기만 할 뿐. 보통 사람들은 감지도 못하고, 실체도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게 세계의 이미지가 아닐까. 위험에 빠진 사람이 사는 세계를 배경으로 전염병을 생각했고, 이야기는 그렇게 본격화됐다.
물리적인 균열로 인한 계량적 변화를 모든 사람이 느끼진 못한다는 사실도 그를 흥미롭게 만들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라는 대지. 모든 문명이 건축됐으며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을 지닌 세계의 기반이 흔들리면서 실제 지형을 바꾼다는 사실이.
“얼마 전 칠레 대지진이 있었는데, 칠레 수도가 29cm 이동했다더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도 서쪽으로 3cm 옮겨졌고. 그렇게 세계 지형이 변했는데, 보통 사람들은 감지 못한 균열이었다. 그런 균열이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과거를 잃어버린 슬픔
(주. 소설에 대한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으니, 염두에 두시길)
『재와 빨강』은 편 작가의 등단 10년 만에 나온 장편이다. 줄곧 단편으로 독자들과 만났던 그는 이번에 ‘엉덩이의 힘’(?)을 빌려 장편을 내놨다. 왜 이리 오래 걸렸느냐고?
“단편은 충격적이고 균열이 간 상태의 범위가 작아서 그 작은 질문에만 답하는 식으로 썼으면 됐으나, 장편은 처리해야 할 질문이 많았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등단 10년 만의 첫 장편이라는 말이 좀 부끄러운데, 더 잘 썼어야 할 것 같은데 아쉬운 측면도 있다. 내가 원래 단편 쓰는 것을 좋아한다. 파열된 이미지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 재미있다. 그래서 단편을 즐겁게 쓰다가, 몇 가지 이야깃거리가 구상되면서 이번 장편을 쓴 거다. 10년 만이긴 한데 집필에 10년이 걸린 건 아니다.(웃음)”
그리고 첫 낭독이 진행됐다. 주인공의 전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이를 실감할 수 없어서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
“그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쓰레기와 소독약이 어우러진 냄새가 서서히 방 안으로 퍼져 들어오듯 몸의 중심부로부터 먹먹한 슬픔이 퍼져 나왔다. 전처의 죽음을 실감한 슬픔은 아니었다. 그가 아직 어린아이일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검은 영정사진 앞에서 느낀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 그것은 자주 땀이 맺히는 민머리에 터진 양복을 입고 우스꽝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우는 초라한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슬픔이었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도는 아니었다.”(pp.95~97)
작품과 독립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느낌이 풍기는 대목. 작가는 낭독의 이유를 이렇게 얘기한다.
“주인공이 불행해진 것은 과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보다 험한 일을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추억들, 자기를 살게 하는 과거의 힘을 잃어버려서 불행해졌다고 생각한 거다. 그나마 죽은 어머니의 기억이 이 사람이 드물게 떠올릴 수 있는 서정적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대목의 서정은 한편으로 섬뜩하다는 사회자의 언급도 있었다. 슬픔이 전제되지 않고 아버지의 와이셔츠에서 통증, 슬픔이라는 감정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일수록 실감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사실적인 정보를 늦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보다 사실로는 아는데, 가슴 속 통증으로 느끼기엔 오래 걸린다. 회상 신에서 주인공의 나이는 어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보다 아버지가 초라해 보일까 봐, 셔츠가 찢어진 것도 모를까, 하는 기억이 먼저 남았을 것 같았다. 어린 화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장례식 장면을 묘사하려 했고. 신체적 통증을 거쳐 슬픔으로 형상화되는, 그만큼 슬픔이 천천히 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이어진 낭독은, 원숭이에 털린, 급작스러운 상황에 닥친 주인공 부부의 이야기였다.
“사원은 깊은 U자형 숲의 중앙부분에 있어서 사원에 이르지 않고는 숲을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 누군가 풀을 밟아 내놓은 길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울창한 잡목과 키 큰 나무였다. (…) 그 원숭이가 떠오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떨리고 그 떨림을 감당하지 못해 두통이 일었는데, 지독한 약탈꾼 원숭이 때문이 아니라 위기에 닥친 자신의 선택이 두려워서였다.”(pp.157~163)
보편적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대목이다. 그런 묘사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나 참조하는 것은 일단 없단다. 유사한 질문이라면, ‘공포 영화 좋아하느냐?’와 같은. 왜 그런 질문을 받을까 생각해 보면, ‘멀쩡하게 생긴 것 같은데, 왜 그런 잔인한 생각을……’이라는 궁금증인 것 같단다. 때론 소설에서 잔혹한 일이 묘사되면, 작가가 이를 즐겨하는 것 같고, 어릴 때 어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나 체험이 있지 않을까 궁금해 하지만, 작가의 대답은, “No!”. 곱게 자랐고, 인상적인 체험도 없단다.
다만 소설을 쓸 때, 그는 현실의 그와 달리, ‘지킬과 하이드’까지는 아니지만, 현실의 자신보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이 된단다.
“그런 장면에 집중하면서 소설을 쓸 때 기분이 좋다. 그때의 재미는, 잔혹한 장면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으로 주인공을 몰아가면서 갖게 되는 소설의 내적 긴장감 같은 거 있잖나. 여기 주인공처럼 원숭이 숲에 들어가면 뭐를 해야 할까 궁금해 하고 질문하면서 쓴다. 그런 질문에 답을 하면서 문장을 쓰다 보면 그 긴장감이 좋을 때가 있다. 그런 긴장감이 주인공을 비관적이고 그런 상황으로 모는 것 같다. 가끔!”
『재와 빨강』, 제목은 어떻게 탄생했나
한순간의 즐거움도 없다시피 한 주인공의 비극에 가슴이 아팠던 모양인지, 양양이 질문을 던졌다. 왜 주인공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는가. 편 작가도 그런 류의 질문 공세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웃으며 반박한다.
“그렇게 쓰는 내가 더 불쌍하지 않나? 그런 나쁜 상상을 하면 내가 더 힘들다.(웃음) 주인공도 아름답고 간직하고픈 추억이 있겠지만 사소하고 아름답던 기억을 잃어버린 이후의 상태라 외롭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상태가 많이 보였을 거다.”
냄새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소설은 시각적인 체험임에도, 후각이나 다른 감각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 양양이 작품을 읽은 뒤, 쓰레기 냄새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의도? 아마도, 문장이 환기하는 효과, 이미지가 지닌 확장력 때문일 거라고 편 작가는 답했다.
“예전에 쓴 단편 중에 고속도로를 운전하던 남녀가 뭔가를 치는 장면이 있었는데, 독자들이 그들이 죽인 건 사람이 맞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더라. 난 그렇게 쓰지 않았는데, 독자들은 편혜영이 사람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한다.(웃음) 아마 냄새도 소설을 읽으면서 구축된 이미지 때문에, 자신이 머리에서 비위 상하는 냄새를 증폭해서 상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일부러 상상하라고 그러는 건 아니고.(웃음)”
한편으로 그건, 소설의 기능과 연결된다. 다른 누군가의 눈에 띄진 않아도, 작품을 읽고 미약하게 일어난 균열을 느껴도 좋은.
“사람에 따라 나는 이렇게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낀 작품도 있을 거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발을 굴려 안전한지 확인하는 그런 작품이 있다면, 내 작품은 그런 쪽이 아닌가 싶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사실 제목이 쉬이 나오질 않아 긴 시간 고민을 했다. 가제가 하나 있었다. 배두나 주연의 일본 영화
<린다 린다 린다>에서, 배두나가 부르는 노래 가사 중 “생쥐처럼 아름다워지고 싶어”라는 대목. 물론 출판사에선 그런 제목으론 책이 안 팔린다고 극구 말리고. 제목 때문에 고민한 이유는, 상반된 두 개의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인공이 낯선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처럼 살아간다. 몰락이기도 하지만 끝내 멸종되지 않은 쥐처럼 살아가잖나. 그런 점에선 생존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사내의 몰락기이자 생존기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아우르는 제목이 쉽게 안 떠올랐다. 그런 차에 편집부에서 ‘재와 빨강’이라는 제목을 지어 줬는데, 마음에 들었다. 색채 대비도 선명했고. 세계의 이미지와 주인공이 몰락해야 하는 삶의 조건이 재색이라면, 생존은 쓰레기 더미에서도 희미한 잔 불이 타오르는, 연약하게 남아있는 잔 불 이미지가 빨강에 있다고 봤다. 그리고 빨강에는 생명력의 이미지도 있지만, 피의 이미지도 있다. 피 자체도 상반된 이미지가 있다. 죽음의 이미지도 있지만, 출생할 때 핏덩이로 나오는 것처럼 피 자체가 생명이기도 하다. 핏빛이라면 죽음을 연상하지만, 거기엔 생명의 이미지도 동시에 있다. ‘재와 빨강’이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쥐를 쓴 이유도 나온다. 가장 싫어하는 동물이어서란다. 좋아서가 아니고. 한편으로 쥐에서 핵심적으로 가져온 것은 끈질긴 생명력이다. 쥐들이 살아남는 것처럼 인간도 살아남을 거니까.
“주인공이 쥐를 잡는 것도 역설적이다. 쥐와 같은 처지가 됐다고 느끼면서도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 쥐를 잡거든. 역설적인 상황에 빠진 주인공의 이야길 하고 싶었다.”
세 번째 낭독이 이어졌다. 주인공이 볼품없고 사소한 시간을 잃었다는 자책에 빠진, 슬픈 정조를 지닌 부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 지나간 생애가 너무나 사소하고 볼품없어서, 그런 인생에 회한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사소하고도 사소한 일로 채워진 현실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의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pp.167~169)
형식과 구조를 축조한 방법
문장에 대한 생각, 글 쓰는 스타일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처음 단편을 쓸 때 그는 짧게 썼는데, 점점 긴 문장이 좋아지고 이번 장편을 쓰면서 문장이 길어졌단다. 상황이나 행동에 대한 짧은 묘사보다 진술이 많아지는 문장으로 변화하는 과정.
“성석제 선생님이 벽돌 같은 문장이라고 하셨는데, 그 벽돌 크기가 커진 것 같다. 예전이 작은 적벽돌로 촘촘히 쌓았다면, 이번에는 회색의 구멍 뚫린 큰 벽돌로 간격을 넓게 해서 써 나간 느낌이다. 문장에 대한 생각이 자꾸 바뀌어서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3부로 이뤄진 이번 소설의 구상은 이렇게 이뤄졌다. 그는 보통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생각한 뒤 써내려 가는 편인데, 마지막 장면은 종종 바뀐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보고 생각하면서 처음 구상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편의 경우엔, 변화의 폭이 크진 않는데, 이번 첫 장편은 애초 구상한 결말에서 크게 바뀌었다. 처음엔 탈출기였다. C국에서 화물에 담겨 빠져나오는데, 나중에 나와 보니 쓰레기 더미에 있는.
그런데, 어라 익숙한 거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혹성탈출>의 이미지였다. 그러면서 방향이 바뀌었다.
“마지막 장면을 쓰레기 산에 나무 상자가 버려진 걸 떠올렸다. 그런데 삶의 조건을 잃은 사람이 결국 잃는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업이나 아내를 잃은 게 아니라 자신을 잃어서 고독하고 쓸쓸해야 하는데, 쓰레기 더미에 놓이면 이 사람보다 시스템에 독자들이 관심을 갖게 될 것 같았다. 어떤 사건이든 종국에는 개인의 문제라 생각해서, 탈출기를 버리고 고독하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바꿨다.”
혹시 아내를 죽인 건 누구일까, 하는 추리 소설적 궁금증이 인다면, 편 작가의 이 말을 들어보자.
“이 소설을 추리 소설로 받아들였으면 불친절하게 해야 하는데…….(웃음) 원숭이 숲 장면이 주인공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소설을 관통하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직접 죽였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아내의 죽음에 어떻게든 관여한 일종의 범인이라고 봤다. 직접 상해를 가한 것이 주인공이 아니라 해도. 이 사람이 알 수 없는 삶의 조건에 휘둘려 사회를 폭력적으로 만들고 아내를 죽였던 거다. 삶의 조건이 망가진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세상을 타락하게 만든 사람이라 가해자인 거다.”
Q&A
낭독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독자들과 나눈 질의와 응답 시간.
글을 쓰는 분위기가 환상적인 면이 있다. 그런 걸 써 보려 했는데, 개연성이 없다는 소리만 듣고, 어떻게 그런 걸 자연스럽게 표현하는지 알고 싶다.
“진짜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이 소설을 쓰기 전, 첫 장편을 하려고 굉장히 오래 잡으면서 쓰던 것이 있었는데, 결국 못 했다.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났는데, 누가 범인인지 모르는 얘기였다. 완성에 실패한 것을 생각해 보니, 나는 현실에 밀착된 것을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낮의 아파트는 주부들의 세계고, 현실과 밀착된 부녀회 얘길 써 나가는데, 하나도 흥미롭지 않더라.
소설은 독자도, 작가도 재미있어야 하는데,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내가 재미를 못 느낀다. 그래서 소설은 (현실에서) 10~30cm 떨어져서, 이상한 공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리얼리티는 없지만 ‘등장인물이 왜 이랬을까’ 하는 질문에 답을 하면서 쓰면 작품의 개연성이 생기는 것 같다. 작가가 질문하면서 소설을 쓴다고도 했는데, 그런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한 편의 소설이 되는 것 같다. 작가가 등장인물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없다. 물론 방법론을 이렇게 말했지만, 실제 써 보면 이런 말이 도움이 안 되는 것도 잘 알 거다.(웃음)”
좋아하는 작가나 책이 있다면.
“90년대 초 밀란 쿤데라를 읽었는데, 요즘 다시 읽고 있다. 고전들이 요즘 다시 나오는 추세인데, 옛날 책을 다시 찾아보고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3월 한 달 동안 쿤데라와 체홉을 읽었다. 고등학교 때 다이제스트로 읽었던, 사실은 읽지 않은 세계 고전들을 다시 읽어 보니, 뜻밖에 참 재밌다.”
동물 얘기가 많다. 좋아하는 동물이나 동물을 쓴 이유가 있나.
“사실 애완동물을, 털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쓸 때는 몰랐는데, 발표하고 나니 동물의 왕국이더라.(웃음) 코끼리가 나오는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2006년 어린이 대공원 퍼레이드 중에 코끼리가 이탈해서, 갈빗집을 습격한 사건이 모티브가 됐다. 늑대를 소재로 한 소설도 있었는데,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를 소재로 했다. 당시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다. 늑대나 코끼리처럼 비일상적으로 격리된 동물이 사람들이 있는 일상의 공간으로 튀어나온 게 재미있었다. 나중에 묶고 보니 별의별 동물이 다…….(웃음)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동물들이 파열된 틈으로 비집고 나온 것에 끌려서 소설에 썼다. 실제 동물 좋아하진 않으나, 싫어해서 죽이는 건 아니다.(웃음)”
어떤 후기
약간 궁금했다. 주인공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과거를 잃어버린, 사소하고 볼품없는 생활의 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회한을 품은 그가. 기억이든, 추억이든, 깡그리 삭제된 일상에서 방진 마스크를 쓰고 약품 분사 버튼을 눌뚷던 그가. 그의 슬픔과 비극은 사실 쥐 때문도 아니요, 쓰레기 더미 때문도 아니었다.
문득 과거 때문에 지탱하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쥰세이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밖에 없는 인생도 있다. 잊을 수 없는 시간만을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는 것이 서글픈 일이라고만은 생각지 않는다…… 다들 미래만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나는 과거를 그냥 물처럼 흘려보낼 수 없다.” 북베트남 인민군 소년병 출신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도 이런 말을 건넸다. “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추억의 힘 때문이다.”
과거가 없는 남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살아가고 있는 것, 맞을까.
명확한 건, 오로지 이것.
“쥐란 누가 생각해도 언제든 죽여야만 하는 동물이었다.”(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