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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범죄자에서 펑크 뮤직의 시초가 되다

제임스 브라운(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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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 비지니스계의 제왕” “미스터 다이너마이트” “소울 브라더 넘버원” “갓 파더 오브 소울” “섹스 머신”, 그리고 “펑크(Funk)의 아버지”……. 이 수많은 수식어들은 단 한 사람, ‘제임스 브라운’을 위한 것이다.

“쇼 비지니스계의 제왕” “미스터 다이너마이트” “소울 브라더 넘버원” “갓 파더 오브 소울” “섹스 머신”, 그리고 “펑크(Funk)의 아버지”……. 이 수많은 수식어들은 단 한 사람, ‘제임스 브라운’을 위한 것이다. 극단적 마초이즘과 섹시함, 에고이스틱하며 폭력적인 면모 등, 그에 대한 이미지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강렬한 것들뿐이라는 점은 그가 대중음악 반세기 동안의 무수한 아티스트 중에서도 얼마나 파격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이었던가를 방증한다. 거기에 그가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펑크 뮤직’이라는 위대한 음악적 자산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수많은 뮤지션과 DJ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토록 강렬한 개성은 어디서 온 것일까? 왜 그토록 강인한 펑키 그루브가 태어난 것일까? 대답은 역시 그의 삶에 있을 것이다. 키워드는 ‘신분 상승의 욕구’.

수많은 역사적인 뮤지션 중에서 그와 같이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도 드물다 하겠다. 물론 델타 블루스 시대의 블루스 맨들은 거의 걸뱅이에 가까운 극빈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도 하지만, 그가 탄생한 1933년 5월 3일 이후에 태어난 블랙 뮤직 아티스트 중 누구도 제임스 브라운보다 빈곤한 환경에서 성장한 이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린 나이에 눈이 맞아 집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그의 부모가 살던 곳은 숲 속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그의 부친은 숲 속에서 ‘테레빈유’를 얻기 위해 필요한 송진을 채취하며 그것을 내다 팔아 연명하고 있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그의 모친은 결국 집을 나가 버리고 만다. 훗날 유명해진 그가 수소문 끝에 그녀를 찾아내어 다시 함께 생활하기 전까지, 그는 어머니의 행방을 전혀 모른 채 성장하게 된다. 부친은 언제나 밖에서 일을 했고 숲 속의 오두막 주변에 사람이 살 리 만무했다. 그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그에게 유일한 벗이라곤 다섯 살 무렵 부친이 사 준 하모니카뿐이었다. 어깨너머로 익힌 블루스는 매일 밤 계속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하모니카 연주는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블루스의 선율은 홀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어린 아이에겐 너무나 슬픈 것이었을게다. 부친은 언제나 뼈 빠지게 일했지만 집안 형편은 결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일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거리를 찾아 이주할 결심을 하게 된다. 어린 제임스는 오거스타에 사는 고모의 집에 맡겨지게 된다.


그의 고모는 오거스타에서 매춘 업소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빈곤한 생활은 마찬가지였다. 입을 옷도 없이 매일 불결한 차림으로 등교하곤 다시 집으로 되돌려 보내지기 일쑤였다. 기지촌이었던 오거스타 거리는 2차 대전이 끝나고 줄곧 불경기가 이어졌고 어쩔 수 없이 유곽도 폐업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제임스는 그동안 유곽에 자주 드나들던 단골들에게 기타를 배우거나 고장 난 오르간을 받아 연주를 하는 등 차츰 음악의 세계에 눈뜨기 시작했다. 루이스 조던, 카운트 베이시,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등의 R&B나 재즈 음악에 심취하게 된 그는 서커스, 매디슨 쇼(매디슨 쇼에 대해서는 리틀 리차드 편(☞ 보러 가기)에서 언급한 바 있음), 민스트럴 쇼(역시 흑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악극) 등의 악극단이 동네에 순회 공연차 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구경을 갔다. 그 무렵 그가 눈여겨보았던 ‘쇼 무대’의 요소들은 훗날 그가 이끌게 되는 ‘제임스 브라운 리뷰’(40여 명의 가수, 댄서, 연주자들로 이루어진 그의 백업 그룹)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그렇게 음악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 나아가던 그였지만, 당장에 음악가의 길을 가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의 친구들 중 대부분은 훗날 그가 일류 야구 선수가 될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은 프로 복서가 목표였다고 하니, 과연 그 현란한 스텝과 (마이클 잭슨의 저 유명한 ‘문 워크’도 제임스의 ‘펑키 치킨’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강철 체력은 이 시기부터 다져진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의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청춘 시대도 어느 날 갑자기 종말을 고하게 된다.

어엿한 청년이 되어감에 따라 입는 것, 먹는 것에 대한 욕구 또한 강해지는 것은 당연지사. 문제는 그 무엇도 충족할 수 없는 자신의 빈궁한 처지였으리라. 모든 흑인 게토가 그러하듯, 오거스타 거리 또한 각종 범죄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제임스는 물건을 훔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누군가의 차 안에 몰래 들어가 코트를 훔치던 중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이미 초범이 아니었던 그에게 내려진 것은 무려 8년에서 16년이라는 무거운 형량이었다. 아직 미성년이었던 그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무거운 형벌인 듯하나, 당시 미국의 모든 흑인들이 처한 입장으로서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당시 “내가 멍청했기 때문에 붙잡혔을 뿐”이라 자책했다고 한다. 그는 감옥 안에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버텨 내야만 했다. 다행히 복싱에 강했던 그를 만만히 본 수감자는 없었으나 백인 간수들에게는 적잖이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감방 안의 동료들과 가스펠 그룹을 결성, 순식간에 형무소 최고의 인기인이 된다. ‘뮤직 박스’라는 닉네임을 얻은 그는 그렇게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입소 후 3년이 지난 어느 날, 제임스는 가석방의 기회를 얻게 된다. 성실한 생활 태도와 밝은 성격, 그리고 가스펠 뮤지션으로서의 활약이 긍정적인 인상을 준 덕분이었다. 다만 고향인 오거스타로 돌아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고 형무소가 있는 ‘토코아’ 지역에서 생활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다행히 가스펠을 통해 알게 된 친구 ‘바비 버드’의 도움으로 집과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바비는 그 후 오랜 세월에 걸쳐 제임스와 음악 활동을 하게 된다.


1953년 그는 드디어 가스펠 그룹 ‘플레임즈’를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가난한 그들은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악기 상점에서 피아노를 빌려 가스펠이나 R&B를 아카펠라로 연주해야 했다(이와 같은 경우는 당시 흑인 가스펠, R&B 아티스트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고 이러한 형식을 ‘Doo-Wap’이라 부른다). 그 무렵 그들의 레퍼토리는 ‘클라이드 맥패터’(50년대 최고의 R&B 그룹 ‘Drifters’의 창단 멤버) 등의 R&B 커버가 대부분이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저녁엔 라이브를 하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지만, 곧 매니저가 생겼고, 개인 악기를 소유할 수 있었으며, 이동용 차량까지 확보, 점차 그들의 존재도 알려지기 시작한다.

바지런을 떤 덕에 어느덧 지역 내에서는 방귀깨나 뀌는 인사가 되어 있던 어느 날, ‘플레임즈’ 앞에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났다. 바로 ‘리틀 리차드’였다. 그는 아직 ‘빅 히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지역 전체의 넘버원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던 터였다. 당연히 플레임즈의 존재는 그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소속사에 플레임즈를 추천, 덕분에 그들은 훨씬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리틀 리차드가 돌연 서해안으로 떠난 후, 그의 대타로서 큰 기회까지 잡게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그들은 밴드명을 ‘플레임즈’에서 ‘페이머스 플레임즈’로 바꾸게 된다. 무명이면서도 ‘유명한 플레임즈’는 조지아주 이외의 지역에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각지의 라이벌들과 경쟁을 벌여 나가게 된다.

빠른 속도로 지명도가 올라가고 있던 페이머스 플레임즈는 드디어 메이저 레코드 회사로부터 러브 콜을 받게 된다. 그것은 오하이오 신시네티에 본사를 둔 ‘킹 레코드’였다. 1956년 2월 4일 그들은 첫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었다. 첫 번째 노래는 그들의 기념비적인 데뷔곡 「Please Please Please」였다. 그러나 이 곡을 들은 킹 레코드의 오너 ‘시드 네이던’은 “Please를 지겹게 반복할 뿐, 대체 어디가 좋은 거야!”라고 분노하며 그들을 추천했던 담당 직원을 해고하고, 킹 레코드 산하의 마이너 레이블이었던 ‘Federa’에서 아무런 홍보 없이 그들의 데뷔작을 발매시켜 버린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발품을 팔아가며 자신들의 레코드를 직접 홍보해야 했다. 순회공연이 있는 각 지방의 라디오 방송국을 돌며 각각의 노래마다 DJ를 달리하여 꾸준히 자신들의 곡을 알려 나갔다. 물론 당시 음악계의 관행이었던 뇌물을 먹일 금전적 여유가 없던 터라 홍보 효과는 금방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금씩 레코드가 팔려 나가기 시작, 결국 데뷔곡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데뷔곡은 히트했지만 후속타가 전혀 나오고 있지 않은 그들에게 매니지먼트 회사는 밴드명을 ‘제임스 브라운 앤 더 페이머스 플레임즈’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밴드의 프론트 맨을 명확히 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이에 반발하여 모두 고향 토코아로 돌아가 버린다. 순식간에 밴드가 공중분해 되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린 제임스 브라운.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다시 한번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호주 투어 중이던 리틀 리차드가 앞으로의 인생을 신에게 바치겠다며 돌연 음악계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따라서 제임스는 ‘땜빵’을 메우기 위해 급히 리틀 리차드의 백밴드에 메인 보컬리스트로서 합류하여 투어를 마칠 것을 요청받는다. 이전에도 제임스는 리틀 리차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리틀 리차드 행세를 하며 공연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내거는 조건으로 대타의 역할을 수락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 밴드의 멤버와 돌아온 플레임즈의 멤버를 규합하여 새로운 밴드를 결성, 다시금 녹음의 기회를 거머쥔다. 그 곡이 바로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Try me」이다. 이 곡은 R&B 차트 넘버원에 랭크되며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렇듯 벼랑 끝 위기에 몰렸던 제임스는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이윽고 그들은 쇼 비지니스의 중심지 뉴욕에 입성, 당시 흑인 연예계의 최고봉이었던 ‘아폴로 씨어터’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연을 2주 앞둔 시점에서 음주와 여자 문제 등 여러모로 불성실했던 밴드 멤버와 제임스가 큰 싸움을 벌이게 된다. 그로 인해 페이머스 플레임즈는 또다시 해산하게 되고, 이에 제임스는 초기 멤버였던 바비 버드에게 도움을 요청, 급히 밴드 멤버를 모집하고 겨우 아폴로 씨어터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애초에 공연을 연기할 수 있었음에도 제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찬스를 보기 좋게 성공시킨 것이다. 그렇듯 아폴로 씨어터의 무대는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것은 흑인 엔터테이너로서 그가 정상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일종의 증명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무대는 다른 뮤지션과의 합동 공연뿐이었고 단독 공연의 기회는 아직 신인이었던 그에게 주어질 리 없었다. 단독 공연을 할 수 있는 조건이란 합동 공연의 무대에서 다른 가수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관객에게 호응을 얻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출연자들 사이엔 언제나 미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그 당시 제임스 브라운과 밴드의 라이벌로서 ‘드리프터스’ ‘해롤드 멜빈 앤 블루 노츠’ ‘아이슬리 브라더스’ ‘비비킹’ ‘플라밍고스’ ‘재키 윌슨’ 등 실로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각축을 벌이며 아폴로 씨어터의 스테이지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의 공연에 음악뿐만 아니라 화려한 의상과 MC, 댄스, 기발한 연출을 추가해 나간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것이 그만의 필살 퍼포먼스 ‘망토 쇼’가 되겠다. ‘1. 쇼의 후반부에 별안간 제임스가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 2. 쓰러진 그를 멤버가 부축, 어깨에 망토를 둘러 주고 스테이지에서 내려 보내려 한다. 3. 그러나 제임스는 그것을 뿌리치고 다시 무대에 올라가 열정적으로 공연을 끝마친다.’는 감동적인(?) 내용의 스테이지 퍼포먼스였다. 사실 이 ‘망토 쇼’는 ‘고져스 조지’라는 프로 레슬러가 링 위의 연출로서 로브(복서나 레슬러들이 걸치는 가운)를 이용하는 것을 TV에서 본 제임스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멤버가 걸치고 있던 코트를 이용했지만 이후 별도로 주문 제작한 망토를 사용하게 된다(코트의 주인이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탓이라고 함).

그는 연간 350일이나 라이브를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공연의 대부분이 올나이트 공연(그렇다! 하룻밤을 꼴딱 새우는)이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어느덧 그는 ‘원나이터의 제왕’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하루 평균 2시간 반은 무대를 휘젓고 다니던 그는 매회 3~4킬로그램의 체중이 줄었던 탓에 공연 후엔 언제나 식염제나 포도당 정맥 주사를 맞아야 했다고 한다(그가 마약을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이대로라면 몸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그는 자신이 공연 프로모션 자체를 맡아 효율적으로 공연 일정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흥행 면에서 이 방법은 리스크가 크지만 성공할 경우엔 그만큼 큰 이익을 노릴 수 있기도 했다. 그는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손으로 콘서트를 준비하고 홍보 및 티켓 판매까지 주관하며 보다 효율적으로 이익을 올리는 아티스트로 발전해 갔다. 이 모든 것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강력한 추진력으로 공연 프로모션 이외의 분야에까지 자신의 결정권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위험 요소를 동반하고 있었지만 실적을 쌓으며 조금씩 활성화되어 갔다. 그의 출세작이 된 라이브 앨범 <Live at the Apollo>는 그런 그의 의지가 있었기에 발매가 가능했던 작품이었다. 지금이야 라이브 앨범이라는 것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지만 1963년 이 앨범이 발매될 당시의 라이브 앨범이란 스튜디오 라이브에 박수 소리를 덧입힌 정도의 것으로서 관객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린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Live at the Apollo>는 그때까지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작품이었다. 당연히 이 앨범의 기획을 제임스로부터 들은 킹 레코드의 사장 시드 네이던은 앨범의 제작에 반대했다. 거기에 굴하지 않은 제임스는 빚을 끌어다 레코딩을 단행한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을 듣고 시드 네이던도 발매를 허용하게 되지만 그 앨범에서 싱글을 선택하도록 제안한다(타이틀 넘버 한두 곡을 준비하자는 의미). 그러나 제임스는 거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 앨범이 어디까지나 온전한 한 장의 작품집으로서 인식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앨범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으로 싱글 컷이 없는(타이틀곡이 없는) 앨범으로 발매되기에 이른다. 앨범은 꾸준히 팔려 나갔고, 라디오 프로그램에 따라서는 한 면 전체를 틀어 준 곳도 있었다. 그렇게 이 앨범은 빌보드 히트 차트에서 66주에 걸쳐 랭크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 앨범은 싱글을 중시했던 당시 음악 업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레코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인세 등 금전적인 면에 있어서 과거의 오래된 관행을 그대로 고수하던 킹 레코드에 환멸을 느낀 제임스는 킹 레코드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머큐리 레코드와 계약을 한다. 그러나 역으로 킹 레코드로부터 고소를 당한 그는 자유로이 녹음을 할 수 없게 된다. 재판소는 그에게 보컬 녹음은 킹 레코드에서, 연주 녹음은 머큐리 레코드에서 해야 한다는 웃긴 판결을 내려 버린다. 그리하여 당분간 라이브 활동에 전념하는 것으로 고비를 넘긴 그는 킹 레코드로부터 대폭적인 계약의 재검토를 약속받으며 결국 재판에서 승소하게 된다. 결국 그는 자유와 돈,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고야 말았다.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밴드의 새로운 멤버로서 기타에 지미 놀란, 드럼에 멜빈 파커, 색소폰에 메이시오 파커가 합류했다. 이 세 명의 존재감이란 이전의 멤버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들의 탁월한 리듬감이 더해져 제임스 브라운의 사운드는 ‘소울’에서 ‘펑크 뮤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메이시오 파커는 혼 섹션(금관 악기의 선율을 이용한 부분을 말함)의 편곡을 기존의 멜로디 위주가 아닌 16분 음표를 바탕으로 한 비트감 넘치는 프레이즈 위주로 전개함으로써 이전의 대중음악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편곡 스타일을 제시했다. 이에 힘입어 제임스는 자신이 마음속에 그려 왔던 펑크 사운드를 마음껏 구현해 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결과물로서 1965년 <Papa's got a brand new bag>이 탄생되기에 이른다. 그렇게 모처럼 탄생한 완벽한 ‘펑크 사운드’였지만 공교롭게도 세상은 ‘단순한 댄스 뮤직’에 더 이상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1965년의 미국 사회로 말하자면 인권 운동과 베트남 반전 등으로 급물살을 이루던 시기였고 그것은 더욱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 정치와 인종 문제, 반전 문제 등의 시대적 화두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제임스 브라운도 마침내 60년대라는 사나운 격랑 속에 휘말리게 된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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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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