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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하고 나하고
이 사진집을 처음 본 건, 니콘이나 캐논에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인 필름 카메라 시절의 일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기 전까지’ 라는 부제가 붙은 『윤미네 집』은 아버지의 눈으로 찍어 낸 딸의 기록이다. 그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은 26년이나 지속된다. 아버지와 딸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새까만 시간들이 이 사진집에 봉인되어 있다.
요즘 내가 다니는 집 근처 작은 도서관의 명칭은 ‘청소년 독서실’이다.
동네에 도서관이 생긴다는 걸 알게 된 후, 만세 삼창을 부르며 좋아했었다. 어렸을 적부터 늘 도서관 근처에 살았던 나로선, 이사한 후 걸어서 갈 수 있는 도서관이 없는 지금의 동네에 영 정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을 지키는 고양이 ‘듀이’ 같은 야옹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떨까. 도서관 ‘개’나, 도서관 ‘앵무새’가 있어도 좋겠고, 봄이면 작은 마당에 팬지를 심고, 겨울이면 로즈마리를 키워서 아슴아슴한 냄새가 책장마다 배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예상과는 달리, 그곳엔 거짓말처럼 옛 직장의 내 ‘보스’와 똑같게 생긴 사서 분이 앉아 하루 종일 사무를 보고 있어, 나를 두 번 놀라게 하긴 했지만.
아침 9시에 열어서, 밤 11시까지 하는 이 독서실에는 정작 청소년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서 열람실을 사용하는 시간이 아이들의 학교 수업 시간과 겹쳐서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이곳은 늘 한적하다. 엄마와 함께 책을 빌리러 오는 조숙한 다섯 살배기 숙녀조차도 까치발을 하고 조물딱 한 입술 위에 검지를 꼭 올려놓은 채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 같은 책을 고를 정도니까.
사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서관에 매일 오는 사람은 나와 일흔이 훌쩍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두 사람뿐이다. 주중에 도서관에 가 본 사람이라면 아마 알 거다. 책 냄새가 아련히 밀려오는 오래된 서가를 채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돋보기를 쓴 채 한학을 공부하는 한 할아버지, 족보 연구에 골몰하는 할아버지, 고우영의 『십팔사략』을 열심히 읽고 계신 할아버지……. 재밌는 건, 도서관에 할머니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게 좀 슬프다.
한강의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도서관 서가에 서서 읽은 책이었다. 도서관에 딸린 식당에서 2,500원을 주고 유부국수를 사 먹은 나른한 오후였다.
마침내 피아노 학원에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 뒤를 따라다녔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계시면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있고, 빈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면 그림자처럼 뒤따라가 부엌에 서 있었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아직도 그 마당의 침묵,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빨래를 털어 널던 모습, 자꾸만 내 종아리로 기어오르던 커다란 개미들이 생각난다. 별다른 고집없이 자라던 둘째가 한번도 안하던 시위를 하니 부모님은 조금 당황하셨던 것 같다. 곤혹스러운 며칠이 지난 뒤, 마침내 어머니는 꽥 소리를 지르셨다. 안된다니까! 우리 형편에. (중략) 얼마 뒤 나는 문방구에 가서 10원을 주고 종이 건반을 샀다. 책상에 네 귀퉁이를 압정으로 붙여놓고, 학교에서 간단히 배운 대로 노래를 연주했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까닥거리며 신나게 쳤다. 시위를 하거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그저 아이다운 낙천성이었을 뿐이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내가 종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던 때가, 그 시절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중학교 2학년 가을쯤부터 집안 형편이 조금 풀렸던 모양이다. 마루에 소파가 들어왔고, 아저씨 몇이 와서 낡은 싱크대를 떼어내고는 흰 나무 문이 달린 깨끗한 싱크대를 설치하고 갔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봄방학이 시작됐을 때 부모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렀다. 엉거주춤 앉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피아노를 배우라고.
3, 4년 전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어지럽게 피아노에 매혹됐던 시기는 홀연히 지나가버렸고, 혼자서 끄적이던 일기나 시에 몰두해 있던 때였다. 사실, 연합고사를 앞둔 중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하는 아이는 없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피아노 학원도 졸업이었고, 계속 한다면 그쪽으로 진로를 생각하는 아이들뿐이었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별로 배우고 싶지 않다고. 시간도 없을 것 같다고.
그때 어머니가 우셨다. 내가 뙤약볕 속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는 그토록 냉정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1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한강의 글을 읽다가 김한길의 오래된 글이 떠오른 건, 각각 나무처럼 커다란 아버지 밑에서 자란, 한승원과 이어령의 딸이 등장하는 에세이라는 공통점 때문이었다. 또 두 사람이 글에서 말하려던 바가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너무 희생하지 말자. 이것은 내 생활신조이기도 했다. 농담처럼 내가 ‘고생 끝에 낙이 아니라 병이 온다’라고 줄기차게 말했던 건, 현재가 어처구니없게도 늘 저평가를 받아 왔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텔레비전만 틀면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라고 윽박지르는 나라에 살다 보면 더 그렇다. 너도나도 보험에 들고, 상조 회사에 가입하는 나라에서 보험 하나 없이 버티고 있는 나 자신이 가끔은 외계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늘 소설가 한강의 나른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녀의 문장과도 닮은 목소리가 아닌가. 예의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가만가만 불렀을 노래 CD는 아쉽게도 도서관 책 속에는 들어 있지 않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린 시절의 뿌연 먼지 같은 기억들이 아련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치 『윤미네 집』의 사진집을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윤미네 집으로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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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집을 처음 본 건, 니콘이나 캐논에서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인 필름 카메라 시절의 일이었다. 음반으로 얘기하면, 버스를 타고 레코드 가게에 찾아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골라 집으로 뛰어가, 더블 데크 카세트에 녹음하던 시절의 일이다. 가끔씩 더 이상 극장에 가지 않고, 레코드 가게에 들르지 않고, 서점에 가지 않는 삶이 끔찍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오래되었단 이유로 절판된 책을 더 이상 찾아 읽지 않는 삶과 맞닿아 있단 생각이 든다.
『윤미네 집』은 겨우 1,000부 정도를 인쇄했다. 아마추어 사진가의 작품이었던 이 사진집의 초판본은 서점에서 살 수 없었는데, 당시 사진을 전공하던 남자 친구는 이 책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사진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는 매력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고. 그때부터 (내게는) 기념비적인 ‘열화당 사진문고’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1997년 가을, 교보문고의 어느 기둥 옆에 비스듬히 주저앉아 처음으로, ‘듀안 마이클’의 사진과 ‘최민식’의 다큐멘터리 사진집을 들여다보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좋아하는 ‘민병헌’의 아름다운 흑백 사진들도 그때 처음 만났다. 사진을 전공하던 친구는 사진의 힘은 ‘시간’에서 나온다고 말했었다. 시간의 틈새가 삭아 만들어진 독특한 질감은 추억을 환기시키고, 어떤 것으로도 만들지 못할 감동을 준다고 말이다. 그의 말이 너무 멋져서, 그날 밤 일기장에 또박또박 그 얘기를 적어 놓았던 기억도 난다.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기 전까지’ 라는 부제가 붙은 『윤미네 집』은 아버지의 눈으로 찍어 낸 딸의 기록이다. 그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은 26년이나 지속된다. 아버지와 딸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새까만 시간들이 이 사진집에 봉인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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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 2008년에서 2009년에 걸쳐 YES블로그에 장편소설 『다이어트의 여왕』 연재, 일간지 연재칼럼을 모아 낸 에세이집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단편집 『아주 보통의 연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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