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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하는 가장 흔한 질문은 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각각의 취향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해 주는 일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작가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백 자로 제한되어 있는 쪽지로 추천한다는 건 어쩐지 좀 민망한 일이기도 해서, 차라리 칼럼을 쓰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1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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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막연히 칼럼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건, 작년 여름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다이어트의 여왕』이라는 소설을 연재 중이었는데, 독자들로부터 꽤 많은 상담 메일과 쪽지를 받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연재소설의 원고보다 훨씬 더 많은 매수의 댓글을 다는(나로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날도 생기곤 했다. 독자들과의 직접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작가인 나로서도 처음 겪는 너무 특별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때의 일들은 지금도 일종의 경이로움 같은 것으로 남아 있다.
긴 호흡의 소설을 쓰다 보면, 어느 날에는 정말 단 한 줄도 못 쓸 것 같은 무지막지한 공포가 몰려올 때가 있다. 그때마다 꼬박꼬박 연재소설을 지켜보던 독자들의 눈동자가 어두운 밤바다의 부표처럼 하나둘씩 떠올랐다. 그 눈동자를 등대의 불빛 삼아, 길고 어둑한 두려움 속을 기어 나오던 때가 생각난다. 떠올리면 누군가의 질문에 일일이 답장을 달던 그 침묵의 시간들이, 개인적인 치유의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하여, 사람들과 소통한다는 건 꼭 소설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깨달음도 얻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에 이장이 된 것 같은 그때의 마음을, 소중히 내 인생의 한 곳에 깊숙이 간직하고 싶다.
독자들이 하는 가장 흔한 질문은 책을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각각의 취향을 모르는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책을 추천해 주는 일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생각해 보면, 작가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몇백 자로 제한되어 있는 쪽지로 추천한다는 건 어쩐지 좀 민망한 일이기도 해서, 차라리 칼럼을 쓰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칼럼이 탄생하게 된 배경도 실은 그런 맥락이었다.
생애 첫 번째 연재소설을 쓰면서, 독자들의 댓글에 답변을 달 수 있을 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정도의 여유가 생길 거라고 도저히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같이 연재를 하던 박민규 작가의 댓글이 없었다면, 허덕허덕 원고 쓸 시간에 쫓겼던 나로선 아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박민규 작가는 인터뷰하기 어려운 ‘하늘의 별’ 같은 존재였다(그는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는 작가로 기자들 사이에서 꽤 유명했다).
기자였던 나는 소설가 박민규에 대한 하나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을 드러내길 지독하리만치 싫어하는 작가’란 내 편견은 그렇게 철저히 깨지고 말았다. 그는 독자들에게만큼은 너무나 따뜻한 작가였다. 연재가 끝나고 그가 내게 보내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맨 앞 장에는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늘 건필하세요!’란 사인이 적혀 있었다. 물론이다! 나 역시, 혼자가 아니라 외롭지 않았다. 독자들이 함께 있었고, 옆에서 힘을 내주는 선배가 함께 있어서 든든했었다.
직장에서 일하던 몇 년 동안, 나는 15매짜리 기사 속에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집어넣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었다. 나는 늘 분량보다 많은 글을 써 대는 지독한 수다쟁이였고, 데스크에게 늘 원고가 길다는 핀잔을 귓불에 딱지가 앉게 들어야 했다. 그래서 영화 평론가 이동진의 얘기는 늘 가슴을 친다(그는 전직 일간지 기자였으니 주로 7-8매짜리 기사를 썼을 것이다). 기사 줄이기에 한이 맺혀서 평론가로 전업한 후, 부메랑 인터뷰 때만큼은 한 영화감독의 인터뷰를 500매 넘게 썼다고 하니, 말을 말자.
서두가 몹시 길었는데, 사실 이토록 장황한 것이(불행히도!!) 이 칼럼의 특징이 될 것 같다. 나는 그때그때 내가 읽는 책들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고, 그 책들 중엔 소설 이외에 내가 즐겨 읽는
사실 베스트셀러를 골라 읽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독서 취향이 후지다고 잘라 말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다. 책을 읽는 행위란 사람마다 다르고, 어떤 사람에겐 그것이 ‘생의 이면’을 바라보는 방법으로, 또 어떤 이에겐 복잡한 삶 속에서 얻는 최고의 ‘휴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좋은 책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운다고 해서, 머릴 쥐어뜯으며 고행하듯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머리 아픈 니체의 철학서도 ‘소설’처럼 읽는 사람이 있고, 『다빈치 코드』 같은 스릴러 안에서 철학서도 던져 주지 못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독서에 있어 보다 본질적인 건, 칼럼니스트나 평론가들의 일류 이류 논쟁보다, 자신에게 맞는 책을 마음껏 즐기고 만끽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건, 지금의 나는 ‘미시마 유키오’가 『금각사』에서 보여 줬던 처연하고 탐미적인 문장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문청 시절 그토록 닮고 싶었던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 또한 그렇다. 나는 미문보다 그 문장이 이야기하려는 바에 관심이 더 많다. 정교하게 짜여진 플롯이나 소설 속에 돌출된 캐릭터와 그것들이 엮어 가는 이야기에 더 매료되곤 한다. ‘빌어먹을!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는 못 쓰겠구나.’라고 느끼는 절망은 대부분 그러한 것들이다.
그것은 내가 번뜩이는 예술적 영감보다 철저히 수공예적인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끝도 없이 문장을 버리고, 버려서 끝내는 비정하리만치 칼 같은 단문만 남겨놓는 작가들이 좋다. 너무 관념적이고 형식 파괴적이라 이해하기 힘든 ‘저 도저한 정체성’보단 언제나 단백질이 풍부한 ‘현실’을 아낌없이 빨아들이는 소설에 열광한다. 다소 신파적이라고 느껴지는 헤밍웨이의(단편이 아닌) 장편이나, 다니엘 페낙의 소설을 좋아하는 건 그 때문이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최고의 문장가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같은 작가들이다. 나는 펜을 들고 고요히 사색하는 우아한 ‘알랭 드 보통’보단 칼을 쥐고 땀 냄새 나는 현실을 칼질하는 우악스러운 ‘앤서니 보뎅’ 쪽에 언제나 더 열광했으니까.
이런 취향들은 이 칼럼에도 고스란히 반영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칼럼에는 샐먼 루시디, 존 치버, 커트 보네거트, 이안 매큐언이나 줌파 라히리 같은 순수 문학의 대가들만큼이나 데니스 루헤인, S.S 반다인, 마이클 코넬리, 조나선 캐롤과 기리노 나쓰오 같은 다소 생소한 이름의 장르 문학 작가의 이름들이 충만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나는 ‘장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솜씨를 드러내는 작가들의 작품에 늘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중적인 장르 문학에 대한 내 애정을 숨길 마음 역시 없다.
이들은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일한, 말하자면 어둠의 장인들이다. 자살과 살인, 절단, 헤모글로빈이 분출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서 800만 가지 죽이는 방법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학자들인 셈이다. 규칙 없는 스포츠가 재미없는 것처럼 장르의 규칙을 비틀고, 재해석하고, 정공법으로 뚫어, 기필코 골대에 골을 집어넣고야 마는 전문가의 노련한 기술을 지켜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므로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위대한 소설가 샐린저의 죽음보다 길고 지루했던 사춘기를 함께 했던 시드니 샐던의 죽음을 더 애달파한 것 역시, 지극히 내 개인적인 독서 취향 때문이다.
일상다반사들에 대해서도 쓰게 될 것 같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오래된 영화, 좋아하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 새로운 만남, 당황스런 이별, 오래 전 사 놓고 듣지 않은 앨범을 듣다 생긴 단상 같은 것들은 이 칼럼에 종종 등장하게 될 것이다. ‘책 읽기’란 지극히 내밀한 행위로, 언제나 사소한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서란 일상과 자웅동체인 셈이다. 만약 내가 실연을 당했다면 나는 김형경의 『좋은 이별』을 읽고 있을지 모른다. 취직에 실패해 방황하는 처지라면 아마도 누군가 쥐어준 『이기는 습관』이나 『건투를 빈다』를 읽으며 투지를 다지고 위로받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계통 없이 무계획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이런 사정이 더 심해서, 신종플루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던 지난 1월에는 『명의』나 『내 몸 사용설명서』 같은 건강 서적을 엄청나게 읽었던 기억도 난다. 이런 책을 읽은 후유증은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심각한 얼굴로 건강 진단을 받기로 결심하고, 주삿바늘이 무섭다거나, 의사 선생이 분명 못생겼을 거란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만들어 내 그것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에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일상다반사.
나는 언제나 이 말의 뉘앙스를 좋아했다.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무언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밥 냄새 풀풀 나는 단어 말이다. 그래서 어떤 칼럼이든 나는 필자의 일상다반사가 드러난 글들이 좋다. 이 또한 칼럼의 특징이 될 것이고, 이 역시 순전한 내 취향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엔 어떤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칼럼을 쓰지 않은 지도 1년이 넘었다. 칼럼은…… 말하자면 작가였던 세월보다 훨씬 오랜 세월 동안, 내게 직장을 주었고, 작가이지 못해 늘 허덕이던 내게 따뜻한 끼니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칼럼을 쓴다는 건 어쩐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완행열차에 오른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익숙한 곳에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쓰게 된 것 역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개인적 취향’ 운운하며 결국엔 제멋대로인 칼럼을 쓰겠다고 선포한 나의 이 길고 지루한 글을 읽어준 여러분들께도 늘 따뜻한 고마움을 전한다. 그러니 이 글이 재미없다면 부디 이곳에 존재하는 다른 칼럼들을 재빨리 클릭하시길. 이곳엔 재밌는 칼럼들이 많이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다.
휴……. 이제 부지런히 책 읽을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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